아이의 '거위의 꿈'
아들이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다소 내성적인 성향이라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무엇보다 교우 관계에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1학년 내내 온라인 클래스로 학교를 다녔으니 보통의 등하교를 하게 된 2학년 첫 주,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이의 말은 반가웠다.
"엄마, 보니까 남자 애들이 다 야구팀 들어간다는데 나도 해볼까?"
“그래? 재미있겠네! 해봐.”
우리 동네는 여러 스포츠 중 특히 야구팀이 유명했고, 그만큼 인기도 많았다. 고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방과 후와 주말에 연습 및 경기에 참여했고, 아빠들도 코치로 헬퍼로 열심히 자원하고 있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필드에 모여 관람을 즐기니, 경기 날은 그야말로 동네의 큰 이벤트이기도 했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친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야구를 해보겠다는 아이가 오히려 고마웠다. 덕분에 친한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남편도 열심히 참여하며 지원해 주고, 운동으로 인한 자신감 덕분인지 과거보다는 꽤 의욕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갖추게 되었다.
몇 년을 걸쳐 지금껏 하고 있는 걸 보면, 이제는 단순히 '친구들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정말 좋아하는 취미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취미, 딱 그 정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이 빗나간 걸을 알게 됐다.
"나? 당연히 프로 야구 선수지."
저녁 식사 중 '나중에 뭐 되고 싶냐'는 누나의 질문에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 순간 중지, 그리고 커지는 내 두 눈.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남편의 눈과 그 순간 마주쳤다. 그리고 눈으로 남편에게 소리 없이 물어본다.
'선수를 꿈꿀 정도로 잘하지는 않지 않아? 저 아이가 직업으로까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내 말이... 큰일인데..'
사실 외국 아이들에 비해 체격도 왜소하고 운동 감각이 타고나지 않는 것도 알고 있기에, 우리 부부는 야구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
표정을 다시금 다듬으며 물었다.
"오, 그렇구나.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
"야구가 우선 너무 재미있고요.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엄마 쪽 아빠 쪽 가족들을 보니까 스포츠 선수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스포츠 선수가 되면 집안에서 처음으로 스포츠 계열에 들어간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온리~원, It’s ME!"
"아... 그렇구나. 우리 아들 열심히 해봐. 엄마가 미리 사인받아놔야겠네."
"아, 이제 나가서 배팅 연습해야겠다."
선전포고와 함께 이미 프로 선수가 된 양 의기양양 밖으로 나가는 아들. 아이가 나가자마자 역시나 현실감이 빠른 우리 딸이 냉정하게 말했다.
"엄마, 야구선수 절대 힘들어. 외국 애들이 이미 몸집이 두 배는 큰데. 그리고 우리 집안에 스포츠 선수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런 유전자가 ‘하나도’ 없다는 건데, 안 그래요?"
당연한 말이었다. 게다가 같은 자세도 백 번 해야 알아듣는 아들의 운동신경을 알기에. 아이가 너무 좋아하기에 시켜주는 게 사실이지만 큰 아이에게 입조심을 부탁한다.
“괜히 애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 마. 속상할 수도 있고. 그리고 혹시 아니?”
지금 굳이 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냉정히 그 꿈과 희망을 자르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어릴 적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꿔본 적이 있다. 물론 훗날 '성대가 약하니 말 많이 하는 직업은 힘들다'는 의사의 조언도 있었고 나만의 한계를 스스로 알게 되었다. 게다가 누가 딱히 말해주지 않아도 '예술 직종은 돈 벌기 어렵다'는 당시 강한 사회적 암묵적 합의를 자랄수록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 명제 안에서 내 안의 검열로 씁쓸하게 그 꿈을 버리는 날이 있음을 알기에 그 선택과 판단 또한 사실 아이가 하는 것이 맞다.
반대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노력이라도 더 해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꼭 직업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즐김을 스스로 지지해 왔다면 취미임에도 상당한 수준으로 실력이 늘었을 수도 있고 (물론 지금도 공연을 자주 즐기며 다니지만), 여러 환경이 변한 지금을 보면 또 다른 루트로 그것을 발산시킬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런 점들의 연결선은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기 나름이겠지만 말이다.
설사 현실의 한계로 야구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아이가 건강하고 즐거운 취미로 야구를 계속 이어나가며 자신의 일과 병행한다면 그보다 좋을 일이 있을까 싶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사는 데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필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즐기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한다면 평생 즐길 수 있는 좋아하는 것을 어린 시절에 이미 찾았다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큰 행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은가. 알 수 없는 돌연변이 유전자의 발악으로 실제 MLB에 입성하는 날이 올지. (한국 선수들이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1위 할지 누가 알았으랴)
아들, 파이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