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쏼라 쏼라... 오케이? 땡큐!"
마감 기한을 며칠 앞두고 모두가 분주한 하루. 전화로 바쁘게 일을 지시하는 팀장의 격양된 목소리는 여느 날 보다 더욱 빠르다. '정신 차리고 잘 들어야지' 하는 순간, "알았죠? 내일 오전 10시까지 보고서 보내도록 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진다. 얼른 방금 들은 팀장의 주요 용건을 노트에 정리해 보지만...
"A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를 쓰라고 했고, 지난달 했던 B 프로젝트 결과와 비교 분석한 것도 넣으라 했고, 이번에 같이 한 C 프로젝트 분석도 조금 넣으라고 한 것 같은데... 그런데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라고 했지?"
입사 1년 차 까지는 매일 이랬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영어 실력인데, 얼굴 표정과 제스처 없이 오롯이 수화가 저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에 의존해 중요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얄궂던지. 그럴 때마다 재택근무의 한계를 더욱 크게 느끼며 출근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나아가 '이곳이 한국이었으면 이런 걸로 고민도 안 할 텐데...' 수없이 한탄하곤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야 지금처럼 화상 회의가 활발했지, 그 이전에는 제대로 된 화상회의 세팅 및 사이트도 없었다.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로 지시를 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통화가 많은 날에는 항상 목부터 온몸이 뻐근했다.
사실 잘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전화해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러나 회사 초년생 무렵에는 그 잠깐의 창피함이 왜 그리 죽기보다 싫었는지 모르겠다. '그 사소한 소통도 원활하게 하지 못한다'라고 비칠까 봐, 나아가 '한국인은 일 못 한다'는 이미지를 남길까 봐(현재도 회사의 유일한 한국인이다) 혼자 자존심을 세우며 사서 고생을 하곤 했다.
가장 곤욕스러웠던 사서 고생은 만약 A라고 했는지 B라고 했는지 확실치 않다면 두 가지 버전 결과물을 다 준비하는 것이다. 혼자 야근을 자처하며 두 배의 시간을 들여 모든 버전을 준비한 후, 제출하기 전 은근슬쩍 "A라 하셨었죠?" 물어본 후 눈치껏 맞는 버전으로 제출하는 식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다.
더불어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가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본래 완벽주의 성향이 있기도 했지만, 미국에 와서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결점과 함께 대부분의 직원이 백인인 회사에서 '소수 이민자' 느낄 수밖에 없는 고립감과 소심함까지 더해지다 보니 어느새 점점 더 내성적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힘든 일이 있으면 물어보기보다는 혼자 끙끙거리며 몇 시간씩 걸려 해결하곤 했도 '나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알아달라'며 큰 소리로 티를 내는 데 천재적인 미국인들 사이에서, 시간이 갈수록 나는 더욱더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점은 첫 팀장이 이러한 나의 실제 모습을 그래도 잘 평가하고 좋게 봐주었다는 점이다.
"너는 남들보다 실력도 좋고 전문성이 뛰어나면서도 굉장히 성실한 친구야. 솔직히 우리 팀에서는 네가 가장 월등하니까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
감사하게도 팀장은 윗선에다 나의 장점도 많이 전해 회사에서도 서서히 인정을 받았고 나중에 마음 따뜻한 친한 동료까지 생기면서 서서히 소심해져 있었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은 몇 년 전에 읽은 심리학자 리사 손이 쓴 <임포스터>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러한 모습이 비단 나만이 갖고 있는 진짜 단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워킹맘이 겉으로는 '잘 해내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 의심(임포스터 신드롬) 속에 살아간다고 말한다. 특히 힘든 지점은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남모르게 남들보다 더욱 많이 스스로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실패하면 '개인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인 전체의 한계'로 보일까 봐 더 잘해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 더불어 워킹맘들은 직장에서는 성과를 내고, 집에서는 엄마, 아내 역할을 동시에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누구보다 모든 일에 성실히 임하고 노력하지만 그만큼 대가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소수 이민자로서 말하지 않으면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기 쉽지만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아시아 문화가 가지고 있는 겸손의 미학으로 충분히 성취했음에도 "나는 진짜 실력이 아니라 운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노력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내가 갖고 있었던 지침과 불안이 사실은 ‘나의 나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민자, 소수자, 여성이라는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감정이라 말해주는 이 책을 보며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니 새로이 목소리를 내는 게 이전만큼 어렵지 않았고, 그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조금씩 점점 달라졌다. 주변 엄마들과도 이전보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각자가 혼자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직장에서도 예전 같으면 혼자 해결하려고 애썼을 일들에 대해 이제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필요한 지원을 분명하게 말하며, 반대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제는 내가 속으로 욕했던 그 동료처럼 '자기 평가' 시간에 뻔뻔하게 내 잘난 점을 말하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 놀랄 때도 많다.
물론 여전히 실수는 반복되고, 영어를 잘못 알아들어 밤마다 이불킥을 하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이제는 ‘완벽주의의 까탈스러운 잣대’를 나 자신에게만큼은 내려놓으려 한다. 민망해도 괜찮다. 남들의 시선과 상관없는 나만의 다이어리에, 오늘도 감사일기와 함께 스스로를 칭찬하는 한 줄을 적는다. 소심한 완벽주의 워킹맘에게는, 어쩌면 누구보다도 꼭 필요한 연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