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소소한 일탈

'알 수 없는 길'로 가보기

by 봄치즈

마음이 바쁜 날이다.

5시 일이 끝나자마자 큰 아이를 데리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테니스 레슨을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야외 테니스장까지 걸리는 시간은 30분. 왔다 갔다 한 시간이다. 노트북을 닫자마자 한 숨부터 나온다. 미국에 산 지 12년 차이면 이 정도 운전에 익숙해져야 하건만 왜 나에겐 여전히 피곤한 일일까.


"엄마, 오늘은 자전거 타면서 엄마랑 동네 산책하면 안 돼요?"


둘째 아이의 말에 순간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산책'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오히려 매일 시간을 못내 아쉬울 따름. 큰 아이 테니스 가는 날은 보통 남편이 둘째 아이를 데리고 동네 필드에서 캐치볼을 하곤 하는데 아이가 굳이 '엄마랑' 산책하고 싶다고 해주니! 자연스럽게 아이 핑계를 대면서 남편에게 큰 아이 라이드를 부탁할 수 있지 않은가.


곧바로 아이에게 헬맷을 씌우며 '큰 아이 라이드를 맡아달라' 남편에게 통보를 했다. 행여나 그가 불만을 표출하기도 전에 후다닥 둘째를 데리고 나선다. 재택근무로 24시간 거의 매일 집에 갇혀있는 상황. 매 주말이면 바닷가를 가며 자연 속에서 힐링을 하고자 하지만 지난 주말에는 무정하게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주말 바다'야말로 유일한 힐링 시간이었는데 그것을 못하고 이번 주를 맞이해서 그런가 이번 주, 유난히 피곤하고 더 무기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자전거를 타고 앞서 달리던 아이가 늦은 걸음을 걷고 있는 나에게 다시금 돌아온다. 자전거 속도가 더해진 시원한 바람. 항상 가동되고 있는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지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오늘 오후 스케줄을 따르지 않고 나를 위해 '일탈'을 했다는 그 사실에 더 큰 쾌감을 느낀다.


머리에 꽃 달아보기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

.

.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비 오는 겨울밤에 벗고 조깅을

머리에 꽃을 달고 미친 척 춤을"


학창 시절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면 한 번쯤 부르게 되었던 가수 자우림의 "일탈". 아이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이 순간, 그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하면서 아이들을 봐주고 일이 끝나면 아이들 방과 후 활동 데려다 주기, 돌아오면 저녁 준비, 아이들과 시간 보내기, 집안일 마무리와 함께 미처 못 끝낸 회사일을 위한 자체 야근.


짬이 없이 틈틈이 짜인 매일의 일과들이지만 이 또한 어느 순간 나에겐 '똑같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생활이 주는 매너리즘에 최근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못 느끼고 있진 않았나.


혹시나 학교 앞 놀이터가 열렸나 그곳까지 가보기로 했지만 예상대로 놀이터 출입문은 닫혀있었다. 되돌아서려는 순간 아이가 소리친다.


"우와, 엄마 여기 봐봐요. 여기 숲 속이 있어요!"


아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놀이터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이 보인다. 그동안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곳이다.


"한 번 가볼까?"

"좋아요! 가다 보면 왠지 과자의 집이 나올 것 같은데... 오! "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이런저런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는 아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무궁화를 닮은 예쁜 꽃 한송. 예쁘다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란다. 이곳저곳 스마트폰에 담다 보니 그 옆의 작은 들꽃들도 눈에 들어 돈다. 나도 모르게 한 줄기 꺾어 아이와 내 머리에 꽂아본다.


일탈이란 걸 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꽃 달고 미친 여자'가 될 수 있는 멍석을 대놓고 깔아줘도, 모범적인(?) 성격에 남들이 보기엔 그저 '귀여운 짓' 정도만 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꽃을 꼽는 것만으로도 왠지 자유를 얻은 느낌. 오솔길 맞은 편의 주택가가 나오기까지 동화책 몬스터 이야기를 했다, 숲 속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사슴 이야기를 했다, 꽃 달고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상상 놀이를 해본다.


유연한 삶의 틀 만들기

정해져 있는 일상의 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엄마가 되면서 나 스스로 그 틀을 너무 단단하게 정해놓고 있지 않았나 싶다. 일을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모범적이고 좋은 엄마'로 지내고 싶다는 욕심이 없었다고 할 순 없다. 그러면서 내 안의 '자유로운 영혼'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나아가는 힘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일탈을 용납 못하는 철창의 틀 안에서만 산다면 삶 자체가 너무 건조해지지 않을까. '즐거움과 재미'야 말로 그 체계적인 나아감에 속도감을 높여주는 삶의 윤활유다. 고로 정했다. 한 두 개 정도의 틀은 쇠가 아닌 잘 늘어나는 고무줄로 만들어 놓기.


가끔씩 내 마음이 원할 때 고무줄로 만든 창살을 살짝 벌려 몰래 나갔다 와보자. 일상의 작은 일탈을 감행하기. 그 무엇이 되든 좋다. 홀로 걷기, 친구와 수다 떨기, 혼자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기 등등


일탈이 주는 해방감, 그리고 그것을 따라갔을 때의 '설렘'이야말로 나이가 들수록 가져야 할 인생의 활력소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 설렘이야 말로 어른들이 항상 그리워하는 '언제나 즐거웠던' 우리 어릴 적 모습 속 비밀 병기이기도 하다.


어디로 닿을지 모르는 오솔길을 걸었을 때의 설렘.

내 앞에 무엇이 나타날까 하는 즐거운 호기심.


잊고 있던 즐거움이 주는 해방감에 30분 계획했던 동네 산책에 한 시간을 넘게 써버리고 말았다. 더불어 늦어진 저녁시간. 그럼 어떠한가. 오늘은 정확한 시간에 저녁을 대동하는 '좋은 엄마'가 아닌 소소한 일탈에 '마음이 즐거운' 엄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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