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이 부는 길

나의 또 다른 이름

by 봄치즈

"내가 나를 부르는 '나만의 이름'을 만들어보세요."


아이들이 모두 늦잠을 자는 꿈같은 주말 아침, 홀로 앉아 10분 간 눈을 감고 명상 가이드를 듣는데 그곳에서 생각지 못한 미션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주연'이란 내 이름을 좋아했다. '혜린' '현정' 같이 당시 유행하는 여자아이들 이름처럼 너무 여성스럽지도 않은 것 같고 무엇보다 '두루 나아 뻗어간다'는 그 의미가 멋있게 느껴졌다. '스스로의 발전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 나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그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같아 불릴 때마다 마음 풍요로운 느낌을 받았다.


명상 가이드가 끝난 후 스스로 조용히 '주연아'라고 불러본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다. 내가 이 이름을 언제 들어봤지?

생각해보니 내 이름을 들어 본 지 오래됐다. 엄밀히 말해 지금의 일상에서는 거의 불리진 않는다. 가장 많이 불리는 건 아이들이 부르는 '엄마', 그리고 남편의 '자기야.' 아이들 학교 선생님과 학부모를 만날 때도 자연스럽게 'OO의 mom'으로 나를 소개한다. 미국의 친구들 또한 공식 내 이름이 아닌 미국식 이름을 부르니.


'주연아'라고 한 번 더 불러 본다.

순간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내 모습이 기억난다. 그 이름을 가장 많이 불러줬던 엄마, 아빠의 모습부터 떠오른다. '주연아'라는 엄마의 소리에 집 앞에서 아이들과 롤러스케이트를 타다 뛰어들어가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주연아'라는 아빠 목소리에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내가 좋아하는 양념치킨을 손에 들고 퇴근하시는 아빠가 웃고 계신다. '주연아'라는 엄마 소리에 동생들과 바닷속에서 파도타기를 하다가 밖으로 나가보니 엄마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찰옥수수를 건네주신다. '주연아'라는 소리에 고개를 따라 돌리기 같이 등산을 하던 아빠가 옆 길 산속에서 홀로 곱게 핀 야생화를 가리키신다.


내가 좋아하는 내 이름 '주연아' 안에는 그리운 나의 유년기, 행복했던 청소년기가 담겨 있었다.


이 같은 이름이 현재는 잘 불리지 않아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를 부르는 호칭에도 전혀 불만은 없다. 데이트 시절에는 남편이 불러주던 애칭을 지금도 들을 때만 풋풋했던 그때 시절도 돌아가는 듯하고, 수 백번 듣는 아이들의 '엄마' 소리도 요즘 큰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곧 많이 안 불릴 것 같은 호칭'이란 생각에 매번 감사한 마음으로 호응을 해주는 편이다.


작년부터 활동했던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그리고 이곳 브런치 등 온라인 상에서는 '봄치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러 인친들 또한 나를 그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요즘 세상에 적합하게 잘 지내는 것 아닐까. 특히나 현대는 나의 여러 진면목에 따라 다양한 색을 가지며 활동할 수 있으니, 남이 불러주는 이름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내가 지향하는, 지금의 나만의 이름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이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명상 가이드가 권해준 '나만의 이름 정하기',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아빠의 호 '곰솔'이 떠오른다. 산속 걷기와 바닷소리 듣기를 생각하고 책 읽기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요즘의 나를 볼 때마다 예전에 내가 보았던 아빠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 우직한 소나무 같은 든든함을 가지셨으면서도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아빠. '곰솔'이란 이름을 택하셨을 때 아빠도 지금의 나 같은 고민을 하셨지 않았을까 싶다.


인터넷에서 이곳저곳 순한글 말을 살펴보던 중 마음에 딱 와닿는 말을 찾았다.


늘솔길: 솔바람이 부는 길


보는 즉시 이것이란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목표점까지 쉽게 달려갈 수 있는 탄탄대로에는 마음이 안 가는 편이다. 자연스럽게 내디뎌진 발걸음으로 생성된 작은 길이 조금 더 인간적이다. 걸으며 간간히 그 옆의 야생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작은 행복 또한 내 삶에서는 언제나 중요한 요소다. 바람에 의해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면 인생의 '약간의 곤경' 또한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발전 시간임을 상기시킨다. 그 바람이 솔향기를 전하는 솔바람이라면, 행복했던 경험으로 훗날 기억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코끝으로 솔향기가 전해지는 듯한 느낌. 내 이름을 스스로 부를 때마다 소나무 같은 아빠가 떠올라, 그리고 나 어일 적 함께 했던 우리 가족 , 그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훈훈해질 것 같았다.


왠지 새로 태어난 듯한 벅찬 기분이다. 모닝 페이지에 내 새로운 이름을 적어보고, 요즘 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는 노션에 들어가 전체 이름을 '늘솔길로' 과감히 변경했다.


다른 사람에게 불러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다. 원할 때 언제든 나 스스로 자주 불러주면 되니까.


늘솔길, 오늘 하루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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