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스스로 신기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말이 줄어드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파하고 집에 들어서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책가방을 벗어 던지고 하는 일이 있었다. 그 시간 설겆이 하고 계시던 엄마 옆으로 식탁 의자를 끌고와 앉는다. "엄마, 글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시작됐다. 학교 등교부터 하교 때까지 그 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숨이 차도록 미주알 고주알 풀어놓는다. '응' '그랬어?' '정말?' '너무 재미있다!' 엄마의 추임새가 훌륭했음에도 (엄마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야 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알겠다!) 어린 마음에는 충분치 않았던 터 몇 문장을 속사포로 내 던진 후, "엄마 듣고 있지? 방금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다시 말해줘봐."하고 확인사살까지 하곤 했으니 그 시절 우리 엄마는 얼마나 피곤했을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 가끔씩 '그 때 우리 엄마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20여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엄마한테 미안했어."라며 생뚱맞은 죄송함을 내비친 적도 많다.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너무 즐거웠지. 참새같은 우리딸의 쫑알거림을 듣는게 낙이었지. 대신 네 동생이 말이 너무 없잖니. 두 명다 말이 너무 많았거나, 너무 말이 없었으면 그게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 (웃음)"
역시나 '나의 지금이야말로 가장 바쁘지만 가장 행복할 때'라며 통화를 마무리 하시는 엄마.
그렇다고 현재 말을 할 거리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오히려 늘었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더라도 살아 온 날이 적지 않다보니 그 한가지 일과 관련하여 그 간 겪어 온 모든 경험들이 떠오르곤 한다. 덩달아 그 안에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도 우후죽순 피어난다. 옛 추억의 좋은 기억들로 기분좋은 모먼트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명쾌하게 답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들이 더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을의 입장이 많았던 20대의 시절에서 나도 모르게 갑의 입장에 많이 서게 된 지금. 상황과 입장에 따라 그 관점이 너무 다를 수 있음을 알기에 말을 할 때 신중해졌다. 그렇다고 내 생각과 다르게 꾸며 말하진 않는다. 솔직 담백함이야 진정한 소통을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기에.
고로 예전에는 생각나는 족족 말로 표현하기 바빴다면 지금은 생각풍선을 만드느라 바쁘다. 상대방이 던진 말감에 내 말풍선을 붙이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감에 따라 함께 따라다니며 여러 생각들에 심취하다보면 마치 푹신한 구름과 구름 속을 여기서 저기로 뛰어다니는 듯한 느낌이다. 점프를 할 때마다 생각의 거리또한 풍부해진다.
필요한 경우에는 과거 할머니 댁 뒷동산에서 고추 잠자리를 잡으러 뛰어다닐 때마다 사용했던 채망을 가지고 와 생각 풍선 구름 속에 넣은 후 살짝 건져올린다. 그렇다 보면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생각의 알갱이들이 그물에 걸린 듯 채 안에 담겨 올라오게 된다. 당장은 하나 하나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산발적인 모습이다. 괜찮다. 마음 속 또 다른 공간 속에서 하나씩 꺼내 잘 말리다 보면 어느 덧 햇볕 아래 각자의 빛을 발하는 원석이 된다. 때로운 각기 다른 것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합쳐져 또 다른 생각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말인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여러 사건과 생각거리들을 마구 던져주며 말하던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의 의견을 묻는다. 완벽하지 않지만 나만의 관점으로 조합된 '나만의 생각원석'을 선물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구 말하니 속이 시원해졌다는 친구. 나 역시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 내 삶과 경험들을 하나씩 생각 풍선 속에 담을 수 있어 그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너랑 얘기하니까 내 생각도 정리하고 있어서 좋은 것 같애."
집에 와서도 그 것에 대해 메모로도 남겨보고 이곳 저곳에도 상상으로 대입해보고. 더욱 나만의 원석이 제 색을 발하는 느낌이다. 매일 갖는 15분 몽상 시간 또한 더욱 즐거워 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말하기'에서 '생각 풍선 만들기'로 취미를 전향해 준 지금의 중년도 꽤 괜찮은 것 같다.
물론! 이런 시나리오가 어느 곳에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Hello~ 엄마 내 말 듣고 있어요? 내가 그럼 방금 뭐라고 말했는지 말해봐."
이크, 눈치 빠른 우리 둘째에게 들켰다.
설겆이 하는 동안 아예 부엌 카운터에 앉아 바로 옆에서 자기 말을 늘어놓는 우리 집 8살 아이. 엄마가 잘 듣고 있나 검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누굴 탓하겠는가. 빼다 박은 내 어릴 적 모습이니. 대신, 재빠르게 내 생각구름에서 빠져나와 아직 죽지 않는 내 단기 기억력 실력을 발휘, 방금 들은 문장을 그대로 말해준다. 그러면서 갑자기 드는 생각. 그 때 우리 엄마도 왠지 이러지 않으셨을까.
이 역시 엄마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인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