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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치즈 Sep 15. 2022

철두철미한 워킹맘의 이상한 습관

신기하다. 어릴 적에도 시험공부만 하려고 하면 책상 위의 너저분한 물건들이 눈에 그렇게 거슬리더니 지금도 그러한 걸 보면. 유독 할 일이 많은 아침, 일과를 서두르려 일부러 일찍 일어나는 날이면 그날따라 집안이 그렇게 지저분해 보일 수 없다. 머리카락 하나만 주우려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온갖 구석구석을 걸레질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 저녁거리를 위해 주말에 양념해놓았던 제육볶음을 냉동실에서 냉장실로 옮겨놓기만 하려 했는데 어느새 냉장고 정리를 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날엔 왜 이리 날씨가 좋을까. 커피가 내려지는 시간 동안 습관적으로 여는 주방의 창문.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결이 그럴 때마다 '이 같이 좋은 오늘의 첫 시작을 이렇게 허술하게 맞이할 거냐'는 핀잔으로 들리니 결국 뒷마당 벤치에 나앉아 아무 생각 없이 '몽상의 30분 시간'을 보낸다.


문제는 이 순간 농땡이 부리다 후폭풍이 심해질 것을 아는데도 그런 날일 수록 더욱더 '지금 하고 싶은 그것'에 꽂히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습관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의아한 건 평상시에는 누구보다 뛰어난 기질을 발휘하는 '오늘의 할 일 미션 완료'라는 로봇 근성이 이때만큼은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해야 할 것을 일부러 하지 않음으로써 내 존재를 증명하는 반항기의 청소년의 뿌듯함을 느끼고 있으니. 이렇듯 내 계획을 넘어선 작은 일탈에 행복해하는 날을 보면 내 마음의 시간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거꾸로 흘러가나 싶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바쁠수록 시작점을 어그러뜨리는 이 이상한 습관이 결론적으로 그 결과를 크게 그르친 적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탈의 시간 이후에는 갑자기 태세가 전화되면서 다른 일로 낭비해버린(?)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 없던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들여 해야 할 일에 굉장한 몰입을 하게 되니, 오히려 계획했던 시간 전에 모든 일을 마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결론적으로 사랑 속 밀당을 하듯 단조로운 내 일상에 쫀득쫀득한 긴장감을 주는 나만의 재미있는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칫 바쁘면서도 지루한 삶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일과 육아로 점철된 워킹맘의 일상'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대학원 숙제까지 제출해야 하는 오늘 밤. 숙제는커녕 수업 내용조차 아직 파악이 안 된 상태다. 발등에 불인 이 시점 억지로 새벽녘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는데 하필  그 옆 가스레인지에 묵혀진 때가 눈에 들어왔다. 결국 수세미로 15분간 있는 힘껏 열심히 닦아냈으니 누가 보면 새것인 줄 알판이다. 이상한 뿌듯함(?)을 장착한 후 커피를 마시려는 창문 너머로 나뭇 위에 있는 다람쥐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토록 귀여운 장면은 실제 가서 봐줘야 예의 아닌가. 성큼성큼 나가 마치 티타임을 갖든 그 나무 아래에서 커피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한다. 갑자기 울리는 알람. 세상에, 계획했던 일들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애들 등교 준비 시간이 됐다.


'에라 모르겠다.'


이 커피 한 잔이 이 시간 이후 나에게 마법 같은 힘을 주기를. 램프의 지니의 불러내듯 찬찬히 커피잔을 손으로 문질러본다. '암 그렇고 말고. 지금껏 그랬잖아.' 나만의 이상한 습관, 궁지로 쳐했을 때 더욱 발현되는 '초긍정 마인드의 힘'을 발휘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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