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라면 정중히 사양합니다

by 봄치즈

약간 허기진 느낌. 찻장을 열자마자 사발면들이 보인다. 얼마 전 캠핑하던 중 남았던 것으로 같이 갔던 언니가 챙겨 준 것. 순간 먹을까 말까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라면 먹는 걸로 고민이 되는 걸 보면 요즘 스트레스가 적잖이 쌓이긴 했나 보다. 스트레스가 많으면 유난히 땅기는 음식이 얼큰하고 매운 것인데 물만 부어 먹는 사발면이 제격 아닌가.


그러면서도 라면은 나에게 항상 먹자마자 바로 후회하는 음식이다. 워낙 음식 솜씨 좋은 엄마의 풍성한 집밥을 먹으며 자라왔기에 (우리 집은 치킨 및 피자도 다 집에서 만들었다) 밖에서 음식을 먹으면 MSG 맛을 기가 막히게 잘 잡아낸다. 나아가 화학조미료의 강도가 어느 정도 이상 세면 바로 속이 부글거려 화장실 다니기 바쁘다. 라면 또한 라면수프 안에 MSG가 엄청나니 매번 먹자마자 머리를 띵 맞은 듯한 강력함을 느낀다. 한 젓가락 먹으면 "아 괜히 먹었네." 바로 몰려오는 후회감. 고로 결혼 전까지 라면은 먹은 게 열 번 도 안된다. 게다가 끝까지 하나를 먹어본 적도 없다.


오히려 결혼 후에는 라면 먹는 횟수가 늘었다. 음식을 너무 하기 피곤할 때에도 가끔 먹기도 하지만 유난히 스트레스가 많이 몰려올 때면 얼큰한 음식으로 라면만큼 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받으면 일부러 매운 음식을 찾는 분이 생각보다 많은데요, 사실 이것 또한 일종에 자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너무 매워서 속이 아프고 화장실을 가도 그 매운 고통이 주는 순간적인 희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든요. 그리고 마치 뭔가 해소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진짜 해소된 것은 아니죠. 그게 스트레스의 진짜 원인을 찾아 없애주는 건 아니니까요."


사발면의 강력한 유혹에 '먹어볼까' 손을 뻗다가 얼마 전 매주 빼놓지 않고 보는 프로그램 '금쪽 상담소'의 오은영 박사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긴 어치피 먹어봤자 몇 젓가락 안 먹고 후회하며 버릴 텐데. 엄마 덕분에 라면을 거의 못 먹는 우리 아이들에게 깜짝 간식으로 제공해 주는 게 백 배 나을 성싶다.


'그래 먹지 말자!' 결정을 내리고 대신 차 한잔과 함께 공책을 펼친다. 그러고 보니 손글씨를 안 쓴 지 며칠 된 것 같다. 최근 내가 받은 스트레스들이 무엇이었고 내가 요즘 가장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쭉 써 내려간다. 좋이 위에서 움직이는 펜의 사각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순식간에 안정된다. 그 옆 공란에는 나의 여러 걱정거리들이 당장의 것인지 실제 없는 내 마음속 불안 때문인지 점검을 해본다. 또한 그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실천들도 그 옆에 적어나간다. 근심을 덜어줄 매일 해야 할 작은 일들을 적는 것만으로도 걱정거리들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다.


30분간 열심히 글로 써 내려간 내 마음속 이야기. 스스로에게 직접 묻고 답하니 후련해지는 마음이다. 자꾸 거슬렸던 걱정 찌꺼기들이 찬 바람에 쓸어나간 듯한 느낌. 이는 매운 라면 국물 마시고 난 후 잠깐 느끼게 되는 '순간의 얼큰함'과는 격이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강력한 '라면의 유혹'을 정중히 잘 사양한 스스로에게 뿌듯한 마음이 들어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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