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아들의 일기장
"귀염둥이~내일 한글학교 가는 날인데 숙제는 다 했어요?"
"네, 벌써 어제 다 했어요."
"어려운 것 없었어? 엄마가 봐줄까?"
"없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리뷰할 수 있음 해주세요."
9살 아들. 어릴 적 같은 나이였던 누나와 비교해볼 때 그의 한글 수준은 한참 못자란다. 누나와도 항상 영어로말하니 한글을 배우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은근한 걱정에 한글학교 숙제를 만큼은 항상 챙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글학교 만큼은 꼭 보내는 이 엄마의 고집을 알기에 다행히 숙제는 미리 잘해놓는 편.
'다 맞을꺼라'는 듯 당당한 기세로 마루에 배깔고 누워 레고를 조립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숙제를 검토했다. 이번주는 '했어요, 하다, 할꺼예요' 등 과거, 현재, 미래형에 대해서 배운 듯하다. 여러 예제 및 문제풀이에 이어 해야할 마지막 숙제는 그림일기. 그림을 보아하니 학교에서 요즘 한창인 '뮤지컬 연습'에 대해 쓴 모양이다. 꼬불꼬불한 글씨체를 힘들게 읽어 내려가면서 새롭게 알게된 아이의 마음.
오늘은 학교가 끈나고 강당에서 아이들과 뮤지껄 연습을 했다. 뮤지컬 연습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연습이 끈나고 집에 올 떼다. 그 다음 좋하는 건 쉴때 스낵을 먹는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재미가 없다. 뮤지컬이 안조타. 한 달 후면 끈난다. Yay!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틀린 맞춤법보다도 아이가 뮤지컬 연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 육아 철칙 중 하나는 아이에게 뭐든 '억지로' 시키지 않는 것이다. 고로 모든 일을 하기 전 아이의 의향을 물어보고, 결정한다. 학교 등교 등을 제외하면 아이가 너무 싫어하는 것은 시키지 않는다.
처음에 아이가 뮤지컬을 하기 싫다고 했었나? 지금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레고 놀이를 하는 아이를 보며, 곰곰이 뮤지컬 오디션이 있었던 전날 밤을 상기시켜본다.
"엄마, 학교 뮤지컬 참여하려면 오디선 보래요."
"오, 참여해볼 거야? 그럼 이 노래 듣고 연습해가야겠다. "
"I don't know. 그런데... 뮤지컬 꼭 해야 돼요?"
"꼭은 아니지. 그런데 하고 싶으면 앞으로 석 달간 매주 수요일에 남아서 연습할 거래. 어때?"
"집에 일찍오는게 좋은데."
갑자기, 건너편에 앉아 숙제하고 있던 딸이 한 마디 한다.
"당연히 해야지. 우리 학교에서 뮤지컬이 얼마나 큰 행사인대. 애들도 오디션 항상 다 참여해. 너희 반 친구들도 아마 다 할걸? 너도 꼭 봐봐. Just try it!"
"...오케..."
참고로 우리 딸은 뮤지컬에 참여할 수 있는 학년인 3학년 때부터 매년 빼놓지 않고 오디션에 참가했고, 주연급도 꿰차본 학교 뮤지컬의 베테랑이다. 모든일에 적극적인 큰 아이보다는 다소 소극적인 둘째이지만 그래도 "오케이"라고 했으니 참여하겠다는 의사표현이라 생각했다. 아이의 요청에 뮤지컬 유투브 영상도 찾아줬고 아이도 열심히 보고 따라 연습했다.
오디션을 마친 후 소감을 물어보니, "잘한 것 같애. 선생님이 좋은 목소리 가졌대. 근데 난 그냥 '나무'나 '풀' 같은 background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아이. 당시에는 아직은 무대 위가 부끄러워 그러겠거니 우스개 소리로 넘겼다.
한글학교 숙제를 건네주며 틀린 것을 같이 고치며 슬쩍 아이에게 뮤지컬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근데 엄마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뮤지컬 재미없어?"
"응! 안좋아요. 지난번에도 엄마가 물어봤을 때 뮤지컬 끝나는 순간이 제일 좋다고 했잖아요."
(그랬긴 했다)
"하기 싫어하는 줄은 몰랐지. 근데 왜 오디션 참여했어? 그때 안 한다 하지."
"꼭 해야하는거냐 물어봤는데. 근데 누나가 하라고 강요해서."
(4살 터울인 항상 누나를 존경하고 따라하는 아이. 은근히 누나의 말에 영향을 받았나보다.)
"아 누나가 제안한 건데 그렇게 들렸나보네. 그런데 뭐든 시도해보는 건 좋은 거야. 하고 나서 더 싫을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좋을 수도 있거든. 처음 할때보다 뮤지컬이 좀 좋아졌어 아니면 여전히 싫어?"
"아주 싫진 않은데 그래도 여전히 재미는 없어요."
"엄마는 oo가 집에서 매일 노래 틀고 춤추고 해서 이런 거 좋아할 줄 알았지."
"엄마 나 그런 거 좋아하는데 가족들 앞에서 하는 것만 좋아. 내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말고. 큰 데서는 가서 보는것만 좋아요"
"아.. 몰랐네. 다음에는 너무 하기 싫은 건 확실히 그렇다고 말해. 누나가 좋아해도 oo는 싫어할 수 있거든. 그건 당연한 거야. 다 다르니까. oo는 oo가 좋아하는 거 하면 되지. 내년에 뮤지컬 또 오디션 생기면 그때 가서 잘 생각해보고 말해줘."
"응 땡큐 엄마"
잠시 깜빡했나보다. 같은 의견일지라도 아이들마다 표현하는 방식과 반응의 강도가 다 다르다는 것을. 워낙 자기 의견이 강하고, 남들 앞에서 호불호도 자신 있게 표현하고, 싫으면 절대 안 하는 딸의 반응에 그간 익숙해졌나 보다. 누나보다는 다소 소극적이다라고 생각만 했지 조금 더 아이의 진심을 들여보고 그 의향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안 한 것 같아 미안해진다.
"그래도 이왕 시작해서 잘하고 있고, 공연 날짜가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까지는 열심히 해보자. 끝까지 마치는 것도 중요하거든."
"오케이, 그래도 좋은게 뭔지 알아요? 노래할 때 내 자리가 맨 앞이 아니라는 것!"
주목받지 않는 자리라 좋아하는 아들 모습에 웃음이 난다. 어릴 적 남들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았던 내 어릴적 모습이 떠올라 '그걸 얼마나 다행스럽다 여길까' 너무 이해가 된다.
그와 동시에 한국어 표현에 능숙치 않으면서도 일기장에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 준 아이가 고맙다. 물론 아직 자신의 일기장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 사춘기가 아님에 감사하다.
그저 '첫째 아이 따라 잘하겠거니' 하며 믿었던 것이 아이에게는 '무심함'으로 느껴진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찰나. 매번 잔머리를 굴리며 협상의 틈을 놓치지 않는 아이의 성격이 발동한 듯 싶다.
"엄마~~~내가 그래도 뮤지컬 연습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 할꺼니까 선물로 게임 30분만 하면 어때요?"
눈웃음 애교 필살기로 엄마의 약한 마음을 잘도 공략하는 아이. 아까진 미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더니 어느 새 까불랑거리는 춤으로 나를 웃게 만드는 이 아이의 능력은 항상 놀랍다. 이럴 때 넘어가주지 언제 넘어가랴.
"오케. 우리 아들 끝까지 최선을 다 한다했으니 선물로 게임 30분 쏩니다!"
앞으로는 '아이의 말 속 마음'을 조금 더 들여봐야겠다.
그 일환으로 오늘 요긴하게 이용된 그림일기. 내일 아이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앞으로 매주 그림일기 숙제 내달라고 선생님께 은근슬쩍 부탁 좀 드려야겠다. 물론 아이가 알면 좌절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