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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Sep 10. 2024

홍콩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러 주말에 홍콩에 간다고 얘기했지만 사실 너를 보러 가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금요일 밤 서울 집에서 홍콩 숙소에 도착하는 시간보다도, 너를 만나기 전 지나 보내야 하는 토요일 낮시간이 훨씬 길고 끝이 없어 보였다. 보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부끄러워서 차마 더 일찍 보자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너를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계획이 없다고는 말해줬다. 농담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네가 오기로 했던 시간 10분 전쯤에 약속 장소인 숙소 앞에 나와 있었다. 기다리면서 5분 전까지는 평온하던 마음이 점점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나타날지 저쪽에서 나타날지 두리번거리기를 한참 했다. 도착했다는 문자가 먼저 왔는데 막상 너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나오면 된다는 배려였는지. 어느 쪽에서 네가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볼 때마다 낯설었던 인사 방식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네가 잘하던 것처럼 나도 '하이'라고 인사하고 평온한 표정을 지어봤다.


하이 스트리트는 어딘지 모르겠지만 네가 가자고 하니 나도 갈 뿐이었다. 홍콩은 잘 모르니 사실 어디를 가자고 의견을 묻거나 뭐가 더 좋을지 물어보는 것은 나에게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다. 다만 오늘은 함께 가는 곳이라면 다 좋을 거 같았다. 하이 스트리트는 말 그대로 high여서 지대가 높은 곳에 있었다. 아마도 1박 2일의 여행객들은 오지 않을 것처럼 높은 구석 어딘가 넓지 않은 길 양 옆으로 조그만 상점들이 모여있는 거리였다. 택시를 타고 그곳에 내리자, 너는 택시 기사가 이상한 곳에서 내려줘서 우리를 속였다느니 했지만, 너와 함께 조금 더 거리를 둘러볼 수 있었기에 관광객은 속으로 즐거울 뿐이었다.


무슨 나라 음식인지도 모르고 몇 가지를 시켜 먹었는데 소고기는 양고기와 비슷했고 가지 요리는 부드러웠고 생선 요리는 탕수육이라고 착각하고 먹었는데 그 속은 생선으로 채워진 그런 거였다. 이곳에서도 음료를 시켜야 예의에 맞냐고 물어보는 내 질문에, 너는 홍콩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음료는 시키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인지 자꾸 목이 타서 탄산수를 하나 시켜서 자주 마셨다. 너는 식사를 끝내면 저쪽에 좋은 와인가게가 있으니 거기서 음료를 마실 계획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얼른 식사를 끝내고 싶어졌다. 와인을 마시는 게 지금 식사비보다 더 비쌀 거 같아서 음식점은 네가 계산하도록 놔두었다.


와인가게는 상호가 '프리미 크뤼'였는데 가게에서는 그런 식의 표현을 주로 쓰는 부르고뉴 지역 와인들을 주로 취급하고 있었다. 내가 잘 아는 분류의 와인이 아니므로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좀 더 잘 알았다면 와인 매대 앞에서 너와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척척 골라줄 줄 알았다는 너의 핀잔 아닌 핀잔이 귀여울 뿐이었다. 와인을 고르는 너의 선택에 포마 와인이 계속 들어가기에 아무래도 그걸 택해야 좋을 거 같았다. 사실 나는 쥬브레 샹베르탱 와인이 더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굳이 얘기하진 않았다. 잘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는 나에게는 포마 와인이 더 있기도 하였으므로, 너이든 와인이든 조금 더 친숙해지고 싶었다.


너는 바깥에 자리가 있다고 하면서 가게 안쪽 조그만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발코니 같은 외부에는 넓지 않은 탁자 서너 개가 있었는데 저녁이라고 해도 시원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무도 없었기에 온전히 둘만 있 바깥도 좋아 보였다. 와인 값을 치르고 잔 두 개를 들고 바깥에 앉았다. 서로 사진도 찍어줬는데 사진 속 네 모습은 환하게 웃고 있어 보기 좋았다. 와인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마도 너는 내가 홍콩에 너를 보러 왔다는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눈치였다. 나로서는 네가 그걸 알아주기를 바랐으니 그대로 이야기했지만 너는 선뜻 믿지 않는 듯했다. 길었던 토요일 낮시간에 너를 만나기 전 짧은 문장 몇 줄을 끄적인 쪽지를 건넸다. 너를 보러 홍콩에 왔다는 말을 호텔에 있던 노트에 적었던 것인데 그걸 보고서야 너는 모든 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있는 실내로 들어가기는 싫었던 차에, 지붕 밑에 있어서 비를 맞지 않는 유일한 자리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옮겼다. 마주 보고 앉아있다가 옆으로 앉게 되었다. 난 이 자리가 더 좋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너는 '옆에 앉아 있어서?'라고 되물었다. 당연하다고 대답하는 게 이제는 부끄럽지 않았다. '프리미 크뤼'는 와인 등급을 일컫는 단어이지만, 나에게는 이제 그 가게, 작은 문을 열고 나간 바깥쪽 후덥지근한 자리에서 너와 말을 나눴던 그 기억으로도 남을 것이다.


와인가게를 나와서 토요일 홍콩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밤거리를 걷다 너와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는 트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한 번은 지나치며 보았던 거리를 트램을 타고 다시 스쳐 지나는데, 홍콩은 분명 외국인데 내 기분은 분명 서울 어느 밤거리를 헤매며 시시덕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 두려울 일도 무서울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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