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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Mar 03. 2016

느린 여행

걷는 여행의 즐거움에 대하여

여행의 속도는 얼마나 빨라야 할까?



저번 주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았는데, 대개는 여럿이 렌터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혼자 다니더라도 렌터카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자기 차를 배에 싣고 넘어온 경우도 있었다. 분명 렌터카를 이용하면 편하고 빠르게 가고 싶은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버스를 1시간씩 기다리느라 지루해질 필요도 없고, 추위에 고생하지 않고 히터나 쐬면서 편하게 목적지에서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걷는 여행', 특히 호흡이 느린 여행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점 역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어쩌면 충분히 재미있는 정도를 넘어서, 왜 여행하는지 의문을 가져왔던 사람이라면 더욱더 생각해 보아야 할 여행의 방식이다.


9천 개가 넘는 좁은 골목길이 얽혀 있는 페스의 메디나에서는 걷는 여행만이 가능하다.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무엇인가를 옮겼을 것이다.


느린 여행을 발견하다.



느린 여행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를 다녀오면서부터 이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프랑스 남부 작은 마을인 생장 피드포트에서 스페인 서쪽 산티아고까지 약 800킬로미터를 대개 약 한 달 정도 걸어가는 긴 여정이다.


역사, 종교처럼 길에 얽힌 이야기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나는 '걷는 여행'의 쏠쏠한 재미에 더 빠져들어 있었다. 이 여정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만약 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포도밭을 지나며 포도나무가 이렇게 생긴 것인지 배우기도 하고, 몇 명만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조용한 분위기를 엿보기도 하며, 낡은 점빵 같은 구멍가게에서 파는 라벨 없는 와인(마치 우리 시골에서 소주병에 넣어 파는 참기름과 같은)을 사 보기도 하는 것은 관광지 방문 위주의 빠른 여행에서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이었다.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굳이 저런 마을을 방문했을 가능성은 없다.
친한 친구보다 더 속마음을 터 놓고 얘기할 수 있는 동행도 만날 수 있다.


다 돌아다니지 않아도 괜찮아.



산티아고 이후 다시 제주에 들렀다. '친구와 함께 3박 4일'이 아니라, 돌아오는 항공권 없이 혼자 기약 없는 일정으로 집을 나섰다. 올레길을 걷고, 올레길이 아니라도 걸었다. 렌터카, 시외버스를 벗어나 두 발로 자연이 주는 여름 내음을 맡으며 걸었다.


편의점 의자에 앉아 올레꾼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 텅 빈 카페에 들어가 적적하던 주인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 어떤 길 모퉁이에서 지나가던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할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누군가와 내일 함께 걷기로 할 때, 서울에서의 내 모습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너그러워져 있었다.


걷지 않고서는 묶여 있지 않은 말과 마주칠 수 없다. 솔직히 긴장했던 순간이다. 뒷 발로 차이기라도 하면 골로 가는거다.
걸어다니는 자만이 이동 중 술도 한 잔 마실 수 있다. 이날은 특별히 소주가 아닌 화이트 와인.


보름 이상 제주에 머물렀지만, 느리게 이동하다 보니 남들이 다들 가는 관광지를 모두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그러나 평소 하지 못하는, 시간의 여유를 느끼며 나 자신과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비록 집에 돌아가면 송두리째 희미해질 생각이라도. 내가 그 생각을 어디에 쓸 것인지와 같은 효용의 문제를 벗어나, '생각하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느껴보는 것은 동물이 아닌 사람만이 가지는 즐거움이 아닐까?


바쁜 여행에서는 눈으로 입력되는 수많은 명소들을 헤매느라 그런 생각이 자리할 겨를이 없다. 누군가에 끌려, 또는 시간에 허덕이며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시간 속에 나 자신은 없다. '어디를 가야만 한다'는 목적이 지배하는 여행에서 주어진 시간은 오로지 그것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꼭 다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다. 남겨두면 다시 가볼 수도 있으니.


오징어인지 한치인지 잘 모르겠지만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
차가 닿지 않는 언덕을 넘어야만 볼 수 있는 광경들도 있다.


마음이 외롭고 고독하고 여유로운 자들의 특권



느린 여행은 마음이 여유로운 자들의 특권이다. 특히 여럿이 함께한다면 느끼기 어렵다는 점에서 외롭고 고독한 자의 것이다. 마음이 외롭고 고독하고 여유로울 때 느린 걸음으로 나가보자. 언젠가는 외롭고 고독하고 여유롭지 못할 수도 있으니 가급적 빠르게.



youmust@rememberhisna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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