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과 내려놓음에 관해
내가 그 온천에 다닌 지는 2년이 넘었다.
설악산 등반의 피로를 푸는 용도 뿐 아니라
1박 2일 혹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속초에 왔을 경우
언제나 서울로 올라가기 전의 통과의례는 그 온천에 들러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같은 이름의 온천장이 두 개 있는데 그 중 더 큰 곳이 바로 내가 가는 그 곳.
회사에 다닐 땐 주로 그 곳에 일요일 저녁 5시 무렵에 들르는 편이었다.
어떻게든 속초에 더 있고 싶어/서울에 가기 싫어 밍기적대다가 목욕을 끝내면 7시.
서울에 도착하면 10시경. 짐 정리를 하고 다음 날 출근하면 되는 일정이었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시기였지만 전국의 목욕탕은 코로나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고 나 또한 유일한 낙인 사우나를 버릴 수가 없어
(몇달 참았더니 죽을 것 같아서) 한두달에 한번씩은 다니던 중이었다.
두번째쯤 그 온천에 방문한 날, 그 온천에서 가장 뜨거운 탕에 들어갔다.
마스크 착용이 의무였지만 다들 쓴 척만 하지 코 밑으로 내린다거나 턱 밑으로 내린다거나 쓴 척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런 요식행위를 싫어하는 나는 그냥 팔에 마스크를 건 채 들어가 있었다.
어떤 80대가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탕에 들어왔다.
그녀 또한 노마스크. 범상치 않은 관상을 지닌 분이었다.
턱이 두둑하신데 알 수 없는 포스가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목욕탕 직원(팬티와 브라만 입은 때밀이 아줌마) 한분이 찻잔 받침까지 댄 하얀 찻잔에 티백을 담아 할머니에게 대령하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이 일이 일상인 듯 차를 받아서 우아하게 한모금 마시더니 탕의 턱에 올려놓았다.
호텔도 아니고 서민 목욕탕에 가까운 곳에서 이런 서비스를??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이에 목욕탕 직원이 나를 쏘아보더니 "마스크 쓰세요"라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저 할머니도 안쓰셨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그 할머니는 나처럼 팔에 마스크를 건 흔적조차 없었다. 그랬더니 1분도 안돼서 직원이 할머니에게 마스크를 대령하더라. 그래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착용.
열탕에서 나와 때를 밀려고 착석한 순간 또다시 놀라운 광경을 목격.
꽤 넓은 욕장 가운데에 세로로 놓인 일명 "바가지탕"에할머니와 직원이 나란히 앉은 채 할머니가 세신을 받고 있었다. 직원이 그리 어려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듯 했다.
세신하는 침대(?)는 때 미는 곳 뒷편에 따로 마련이 되어 있거늘 저 할머니는 무슨 권리로 저기 앉아 세신을 받고 있는가? (또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며(강원도 문화인가? 지역 유지인가?)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려는데 욕장 입구에 놓인 냉장고였나 가구였나 그 옆에 커다란 광고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매일경제신문에 났던 전면 광고를 축소 출력해 붙여놓은 것이었다.
온천 길건너 요양용 빌라 단지 분양 광고였다.
이 온천을 개발하면서 그 지역 전체에 온천수가 콸콸 나온 모양이고 그 토지를 매입해 온천 타운을 만든 것이다. 그 분양 광고에는 조그맣게 회장님 사진이 삽입돼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욕탕 속 할머니였다!
내가 그 뒤로 "온천 앙뚜와네트"라고 부르게 된 그 분이다.
(온천명을 명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회장님이 명예훼손으로 법적 조치를 하실까봐. 나름 소심하다)
회장님은 목욕을 마치고 카운터 뒤 본인만의 전용 공간에 들어가서 마무리를 하고 계셨다.
그 직원 또한 동행해 몸을 닦아주고 온 몸에 로션을 발라주고 있었다.
미취학 어린이에게 엄마가 해주는 손길과 같았다.
로션 바르는 부위에 따라 할머니는 팔을 든다거나 뒤로 돈다거나 고개를 숙였고 그 다음은 머리 손질.
티 안나게 근처에서 관찰하느라 마음을 좀 졸였는데 목욕탕에 온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지역 주민의 비중이 70 퍼센트 이상 될 것 같은 곳이라일상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일 수도.
집으로 돌아와 검색으로 할머니에 대해 조금 파(?)봤다. 이 분은 80세가 아니었다! 2022년 현재 나이 91세. 온천이 비결일까. 80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거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그는 40대 초반이던 1970년대 대구의 집을 팔아 속초에서 온천을 개발, 현재에 이르게 되었으며 빌라촌을 지은 이유는 속초에 제대로 된 집을 만들어야 인구가 유입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여장부시구나!
할머니의 정체를 알고 나니 이 곳에 갈 때마다 할머니가 쉽게 눈에 띄었다.
옷을 입고 계실 때 조차도 내 눈에 들어왔다.
가끔 눈을 마주치기도 했는데 설마 본인의 노마스크를지적했던 나를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눈빛만은 또렷하신 그 분.
지난주에는 주말이 아닌 월요일 오후에 방문했는데 또세신을 받고 계시더라. 목욕 끝낸 후 착장한 옷은 표범 무늬. 역시 범상치 않으시군.
2년 가까이 관찰한 끝에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이 분은 하루도 빠짐없이 오후에 온천에 방문하신다는 것.
그것이 본인 소유의 업장이라 관리 측면인지, 건강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가지 요인이 혼합되었으리라. 할머니는 지병이 있어 관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미 건강하지만 관리 차원에서 매일 온천을 하는 것일 수도.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부쩍 관심이 많아진 요즘이다.
백수를 누리시길 응원했던 김동길 교수의 영면 이후 더더욱. 내가 추구하는 늙음은 아래와 같다.
외모나 행동거지에 있어 추한 노인이 되지 말자.
금전적으로 여유로워 여행을 마음껏 다니고, 주변 젊은이들에게 맛있는 음식, 좋은 물건을 베풀고 싶다.
젊은 시절 쌓은 기술(?)로 열심히 봉사하고 싶다. 영어 수업, 꽃꽂이 수업까지는 준비 완료.
건강하게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아픈 상태로 노년을 보낼 바에야 안락사를 선택하고 싶다.
내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온천이나 사우나에 가는 것 또한 건강 관리 차원에서다.
온천 할머니 회장님은 건강 관리 측면에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
이 분을 비정기적으로나마 지켜보면서 궁금증이 폭발한다. 인터뷰해 보고 싶다.
할머니는 건강하실까? 행복하실까?
자손들이 있을까? 온천욕 외 다른 취미는 무엇일까?
돈을 좋아하는 분일까? 아니면 사회 환원으로 이미 관심사가 넘어갔을까?
다른 사업도 준비중일까? 할머니 사업은 누가 잇게 될까?
이미 물려받은 사람이 있을까?
본인은 백살 넘어서까지 살고 싶을까? (물론이겠지. 영원히 살고 싶지 않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내가 기사를 썼던 기업인들의 말로를 보며 들었던 복잡한 심경이 영향을 미친 바가 크다.
대표적인 예가 롯데 신격호 회장.
95세이던 2017년, 30년의 꿈이라며 완공된 롯데월드타워 123층에 올랐다.
그는 2010년부터 치매약을 복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완공된 롯데월드타워를 보면서 실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98세의 나이에 영면했다. 그 사이 자식들은 롯데 경영권을 둘러싸고 추한 법적 다툼을 벌였다. (기사 쓰느라 너무 힘들었다. 복잡한 지분 관계와 양측의 갈리는 입장.)
우리 집 현관에서는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얼마나 선명하게 보이느냐로 그 날의 미세먼지를 가늠한다.
롯데월드타워를 보면서 신격호 회장을 생각한다.
그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서울의 랜드마크인 그 빌딩을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리는 것이었을까.
엄밀히 말하면 그가 아니라 그의 노욕.
신격호 회장을 계기로 내려놓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흔히들 나이를 먹을수록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정신이 온전할 때 내가 가진 것에 대한 미련을 끊어야 한다. 비워야 한다.
허나 나 또한 그 나이가 됐을 때 어떤 마음일 지 알 수는 없다.
끝없이 마음 속으로 훈련해야겠다고만 생각하는 중이다.
다음에 온천 앙투와네트와 탕에서 눈을 마주치게 되면인사라도 건네볼까 한다.
"자주 오시네요~ 저도 서울에서 자주 와요."
그 이후 이야기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