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서른여섯 개, 흰색 쉰두 개, 총 여든여덟 개 건반이 있다. 여린 소리부터 센 소리까지 골고루 낼 수 있는 악기, 피아노다. 일반적으로 피아노가 있는 자리는 거실 한쪽이나 음악학원, 공연장 등이다.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악기는 아닌데 요즘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지하철역이나 거리, 공원 등에서 목격된다. 내가 자주 다니는 지하철역에서도 어느 날부턴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주자는 길을 가던 사람들이었고, 관객들도 같은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연주자와 관객으로 같은 공간에 서 있으니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양손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사람이 샘나고, 공공장소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할 수 있는 자신감이 부러웠다.
연주는 서툴고, 실수는 잦았다. 같은 음을 여러 번 되풀이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전혀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피아노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지하철역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는 그냥 소리로만 흩어지지 않았다. 한 음, 한 음 아무 생각 없던 나에게 마음을 울리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 잊고 사는 게 있지 않느냐고, 너는 피아노 연주를 들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사는 것 아니냐고, 멀리 가지 않아도 행복은 가까운 곳에 얼마든지 있는데, 왜 멀리서 찾느라 아등바등 애쓰냐고, 마음속 깊이 쑤셔 넣어두고 모질게 외면했던 물음표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매일 같이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생뚱맞게 지하철 역에 놓여있는 피아노 한 대는 군인처럼 앞만 보고 전진하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끝까지 완성된 아름다운 소리는 아니지만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어쩌면 행복에 대한 답을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