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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신인 그룹 럭스(1)

by 봄단풍

“언니, 나 눈물날 것 같아.”


수아는 우는 지 웃는 지 아리송한 얼굴로 애써 아영에게 안겨들었다. 그러고보니 리더인 아영은 스물 일곱, 막내도 스물 둘. 요즘의 신인 아이돌 그룹 치고는 썩 어리거나 젊은 편은 아닌 셈이었다.


[데뷔요?]


처음 소속사 대표가 직접 찾아왔을 때는 갸웃했다. 작년 연습생 오디션에서도 유의미한 성적은 거두지 못하고 떨어졌었고, 그 전에도 잘 챙겨준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었다. 밥 세끼 꼬박 챙겨 먹는 것 가지고 늘 생색을 내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의 자세가 변한 건 지난 주였나, 지지난 주였나?


[탈락했다고 인생 끝났냐? 그것도 벌써 일 년이 지났잖아. 너네들도 그 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사실 소속사 대표면서 저렇게 말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기획사를 보면 매일같이 진척도를 평가하거나 내부 테스트를 통해 데뷔조를 선발하기도 하고, 건강 상태에 맞게 연습 강도와 횟수도 조절해주고 데뷔 계획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던데. ‘일년이 지났으니 달라졌겠지’라는 말을 소속사 대표가 할 수 있는 말이야? 늘 먹는 걸 제한하거나, 핸드폰 사용을 못하게 하거나, 가족들과 연락도 뜸하게 제한하면서 트레이닝을 제대로 시켜주지도 않았는데도 붙어있었던 건 그 망할 계약서 때문이었지.


그래, 그래서 사실은 뒤에서 한 번 크게 뒤통수 때려주려다가 걸려서 위약금을 낼 뻔한 적도 있긴 했지만......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말 때문에. 그래, 딱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지난 해 오디션에서 떨어진 이후 데뷔는 꿈도 꾸지 말라며 반 협박을 했던 소속사 대표에게, 그녀와 함께 불려간 동생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부둥켜안고 대표님 만세를 외친 것이다. 아영도 그 당시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감사인사를 몇 번이고 하긴 했지만, 막상 며칠 지나고 나니 영 찝찝했다.


‘내가 원했던 거잖아.’


그렇게 몇 번을 속으로 되뇌었지만 아무래도 개운치않았다. 어쩌면 데뷔를 하지 못하는 연습생의 일상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도 몰랐다. 트레이너도 없이 춤을 연습하고, 매일같이 유튜브에 다른 아이돌 선배들의 곡을 커버해서 올리고. 구독자도 겨우 만 명을 넘기긴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1.2천의 구독자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늘지도 않았다.


[럭스요?]

[그래, 밝잖아, 밝게 가자고, 어?]


대표라는 양반은 데뷔를 시켜주겠다는 말을 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팀 이름과 뜻까지 정해왔다. 아마 본인이 했다기보다 다른 직원들이 힘을 썼겠지만서도.


[LSP의 신인 아이돌, 럭스: 럭스는 빛의 조도를 뜻하는 단위이기도 하지만, 럭키 세븐 스타즈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멤버 일곱 명 전원은 오디션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라 좋은 경험으로 오히려 행운으로 삼겠다는 자세다. 그래서 행운의 상징인 럭키 세븐을 이름에 넣고, 스타가 되겠다는 포부를 스타로 담아내어 럭키세븐스타즈, 이를 다시 줄여서 럭스.]


대표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의견을 물었고, 아영을 제외한 나머지 동생들은 전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표정이 너무 안 좋아.”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수아를 한 번 더 꽉 껴안아주면서 아영은 다시 며칠 전을 돌이켜봤다. 그녀가 사장의 속셈을 파악한 건 그가 ‘럭스’라는 이름을 가져오고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영을 비롯한 소속사 동생들이 모두 탈락했던 그 오디션의 점수가 조작되었다는 뉴스. 저녁을 먹으면서 접했던 뉴스에서는, 익명의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점수표의 사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애초에 떨어진 사람들만 모은 이유가......’


지난 며칠 간 전국적인 사랑을 받던 아이돌 그룹의 조작 설이 터졌는데, 그 타이밍에 맞게 하필이면 그 오디션의 탈락자들로 모인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킨다. 사업을 하는 사람답게 기가 막히게 시류에 편승을 하는 걸까?


‘오히려 이렇게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면 사람들도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차라리 이런 뉴스가 터지기 전에라도 잘 준비해서 데뷔를 시켜줬다면 그 진정성 정도는 인정할 수 있었을텐데.


아니, 누구한테 진정성을 바라는 거람.


[너네 식비, 연습 시켜주는 트레이너 비용, 직원들 월급, 이런 걸 너네가 다 위약금으로 낼 자신 있으면 그만 둬.]


그래, 그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던 대표였다. 몇 년이 지나도록 왜 데뷔를 시켜주지 않느냐, 이럴 바에 그만두고 새 길을 찾겠다는 말에 그는 항상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리고 그의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연습실을 쓰고 있으면 종종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들어오질 않나, 혼자서도 아니고 험악한 이상의 사람들을 들여와서 술판을 벌이질 않나, 트레이닝 중에 들어와서 기합이 빠졌다면서 몽둥이 찜질을 하질 않나...... 바랄 걸 바라야지. 애초에 기회를 잡아서 데뷔를 시켜주는 것만해도 감지덕지다.


“언니.”


옆에 다가온 재이는 이미 아영의 기분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우물쭈물하면서, 그녀는 아영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일단 이렇게라도 데뷔한 게 다행인 거 맞지?”

“그럼. 당연하지.”


아영은 씩 웃으면서 곧바로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혹시나 걱정할까봐 단 0.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래, 세상에 완전무결한 게 어디있겠어. 또 전부 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어디있겠어? 누구나 그런 삶을 산다. 노력에 대한 결과물은 들인 노력보다 작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 작은 결과물이라도 수긍하면서 발을 떼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멀리 걸어가는 것이다.


“그래, 데뷔한 게 어디야. 이제 시작이지.”


그 말대로다. 나 혼자였다면 마음껏 의구심을 품었겠지만, 지금은 함께 고생했던 동생들이 같이 있다. 그 모든 사람의 꿈이 어떤 방식으로든 한 번에 이뤄졌으니 참아야한다. 만족해야한다. 아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수아를 다시 한 번 꽉 끌어안았다.


덜컥 -

대기실 문이 닫힌 건 그 때였다.


대기실 문이 닫힌 건 그 때였다. 처음에는 닫혀있던 문이 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시로 하신다는 매니저가 담배를 피고 온다고 했었으니까, 금방 피우고 왔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건 처음보는 남자였다.


검은 바지에 검은 신발, 검은 니트 차림에 무릎을 조금 넘는 검은 코트 차림. 거기까지만 보면 방송국 직원이거나 지나가는 다른 팀 매니저거나, 아무튼 평범한 사람이었을텐데. 하필이면 얼굴에 쓰고 있는 검은색 마스크가 눈 두개만 내놓고 얼굴의 위쪽 절반을 가리고 있었던 터라 남자는 보통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누, 누구세요!?”

“‘럭스’ 맞죠?”

“어, 네! 맞는데......”


아직 다른 멤버들은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마스크야 방송 분장일 수도 있으니, 다른 프로의 직원이거나 출연자일 수도 있지. 하지만 이 사람의 분위기는 묘하게 달랐다.


“잠깐만요. 누구시냐니까요?”

“언니, 왜 그래?”


뒤에서 붙잡는 다른 멤버의 팔을 뿌리치고, 수아를 등 뒤로 보낸 아영은 남자를 노려봤다. 얼굴이 가려진 마스크라 표정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굳게 다문 입술이나 이리저리 살피는 눈동자는 누가 봐도 수상했다.


“어!”


어색한 공기를 깬 건 수아였다. 그녀는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어, 저 분 그 사람인데!”

“누군데?”

“그 그! 뉴스에 나왔던 사람!”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마스크를 쓴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고, 수아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서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언니, 이거봐봐. 저 사람 맞아!”


아영은 남자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몸만 기울였다. 하지만 결국 동생들의 성화에 겨우 눈을 돌렸고, 곧 뉴스 화면의 캡쳐본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화재 현장에 나타난 의문의 남자...... 22명 구조 후 사라져]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남자...... ‘블링크’]

“뭐야?”


뉴스를 자주 보는 아영도 한 번 쯤은 들어봤던 소식이었다. 얼굴의 위쪽 절반을 가리는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사고현장마다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하고 사라지는 남자. 그러고보니 옷 차림새는 달랐지만 마스크는 똑같았다. 뉴스 캡쳐본에서 보이는 흐릿한 윤곽으로, 어쩐지 체구도 비슷한 것 같고.


“맞죠! 지난 주에 화재 현장에서 사람들 구하고 사라지신 분!”

“‘블링크’! ‘블링크’ 맞죠!”

“네, 그...... 맞긴 한데.”


남자는 문 너머의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곧장 방의 한 가운데로 걸어왔다. 아영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반갑다는 듯 자리를 만들기 위해 흩어졌지만, 아영만은 꼿꼿이 서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사과할게요. 갑자기 들이닥쳐서.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괜찮아요!”

“여기 앉으세요.”

“잠깐!”


멤버들이 화기애애하게 남자의 자리를 만들어주던 바로 그 때, 아영은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방송국 분 아니죠? 어떻게 들어오신 거에요?”

“언니, 왜 그래......”

“가만히 있어! 앞으로 이런 거 진짜 조심해야해. 너네도 정신 똑바로 차려, 앞으로. 말해요, 어디서 왔어요? 누구시냐고요?”


남자는 아영을 빤히 내려다봤다. 마스크 안에서도 그의 표정이 굳어있는 게 여실히 보였다. 어쩐지 그 눈이 금방이라도 폭력을 쓸 것 같아서, 아영은 슬쩍 몸을 움츠렸다.


“맞아요. 방송국 사람 아니고, 무단으로 들어왔어요.”

“그럼......!”

“이다연.”

“네?”


나가라고 말하려던 아영의 말이 멈췄다.


“이다연 알죠?”

“다연이는 우리......”

“다연이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대답은 멤버들이 했지만, 남자는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마스크 뒤편에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바로 앞에 서 있는 아영에게만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에요. 잠깐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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