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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신인 그룹 럭스(2)

by 봄단풍

아영을 비롯한 럭스 멤버들이 삼인용 소파에 주르륵 앉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일곱명이었기 때문에 두 명은 뒤에 서고, 남은 두 명은 팔걸이에 앉아야 했다. 아직도 의구심이 남은 아영이었지만, 다른 동생들의 성화와 남자의 진지한 모습에 일단은 그가 하나뿐인 일인용 소파에 앉을 수 있게 비켜준 것이다.


“다연이는 왜요?”


먼저 입을 뗀 건 수아였다. 럭스 멤버 중에서는 막내인 수아였지만, 그런 수아보다 어렸던 유일한 연습생이 다연이었던 터라 마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여기 소속 맞죠?”

“네, 맞아요.”

“혹시 이다연씨가 대표님하고 사이가 안 좋았나요?”


아영을 제외한 나머지 럭스 멤버들은 서로 슬쩍 눈치를 살폈다. 누구도 선뜻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실 대표님하고 친한 사람은 거의 없을 걸요.”

“야!”


아영의 급작스런 야단에 또 다른 누군가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굳어진 분위기였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남자는 아영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이다연씨가 죽을 뻔했어요. 지금도 위험하고요.”

“네?!”

“아닌데, 저번에 봤을 때는......”


그렇게 말을 꺼냈던 멤버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아영도 남자는 의심스러웠지만, 다연은 실제로 지난 주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연씨가 소속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제가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아는 부분이 있다면 말해줘요.”


모두가 고개를 앞으로 빼고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말이 끝난 후 선뜻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깐만요.”


먼저 입을 연 건 아영이었다.


“예?”

“녹음은 하지 마세요. 어디서 몰래 녹음기 켜놓고 그러지 말라고요.”


남자는 아영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해요. 그 쪽한테 피해가지 않게 할게요.”


하지만 아영은 그대로 믿지 않았다. 무단으로 침입한 남자를 어떻게 고작 말 한 마디로 믿을 수가 있겠어?


“저, 저는......”


그 이후에야 수아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영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다연이는 잘 모르긴 하는데, 대표님이 워낙 좀...... 거친 면이 있으세요. 다연이도 그렇고 저희도 많이 혼나면서 배워서......”


곧 몇 개의 고개가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단호한 면이 있으세요. 엄격하기도 하고.”


아영은 안도했다. 다행히 그녀의 동생들은, 처음보는 사람에게 이것 저것 다 털어놓을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연습생활이 긴만큼 눈치도 늘고 상황을 보는 눈도 자랐겠지.


“그 때가 무섭지 않았어?”

“언제?”

“왜 그 때,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언니 고소한다고 했을 때.”

“고소?”


남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자, 누군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예전에 저희랑 같이 들어온 언니가 있었거든요. 오디션 보고 들어왔는데, 저희는 다 계약할 때 그 언니가 계약서 내용이 이상하다면서 갑자기 안 나왔었거든요.”

“그래서 대표님이 막 초장부터 기합 빠졌다면서 뭐라고 엄청 욕하고, 전화해서 빨리 안 돌아오면 막 죽일 거라고 엄청 화내셨는데..... 알고 봤더니 그 언니가 로펌에 찾아갔더라고요.”

“근데 그 다음이 더 무섭지 않았어?”


몇 명의 멤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처음 입을 열었던 사람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무서웠던 게, 노발대발하면서 막 화를 내면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 때부터 되게 담담하신거에요! 사장님이. 그러면서 막 법무팀 분이신가? 아무튼 그런거 담당하시는 분이랑 얘기하는데 되게 담담하게 ‘아, 그럼 고소해도 되겠네요.’ 그러면서 넘기셔가지고......”

“그게 더 무서웠죠.”


아까보다 많은 고개들이 끄덕였다. 아영도 그 내용은 알고 있었다. 더 자세하게. 애초에 고소를 해봤자 얼토당토않은 계약 내용에서 기인한 문제였으므로, 법정으로 가면 본인이 손해보는 영역이었던 터라 결국 사장은 그 연습생의 부모님과 만나서 합의를 봤다고 들었었다.


“그 소문도 있지 않아? 밀어줄 때는 진짜 잘 밀어주신다고.”

“맞아. 진짜 한 번 맘 먹고 밀어주시면은 음방 1위는 무조건 찍고.....”


다시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다만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입만 뻥끗해도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닌, 모두가 할 말이 있지만 눈치를 살피는 침묵. 간지러운 두 입술을 꾹 닫고 있는, 금방이라도 재채기나 기침처럼 쌓아뒀던 말이 터질 것 같은 침묵.


“그, 워낙 잘 밀어주시니까. 이런 저런 일도 불사하고 다 밀어준다, 뭐 그런 의미죠.”

“맞아요, 막 사재기도 불사한다 그런 헛소문도 도니까요.”


어디선가 퍽 소리가 났다. 그 덕에 마지막 말을 마쳤던 멤버는 얼굴을 찌푸리고 속삭였다.


“아 왜! 헛소문이라고 했잖아. 헛소문.”

“헛소문 아니야.”


그 때, 뜬금없이 말을 꺼낸 건 아영이었다.


“언니?”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놀란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잠시 동생들 눈치를 살폈다. 웬걸,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고 경고할 때는 언제고 정작 중요한 얘기를 자기가 먼저 털어놔버린 셈이다.


“그건 내가 봤어.”

“그럼 진짜 음원 사재기를 하는 거에요?”

“돈 주고 그 핸드폰 수십 개 켜놓고 하는 거?”


동생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아영은 황급히 남자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녹음 안 하는 거 확실하죠?”

“네. 절대로 안 해요.”

“언니, 조금만 더 자세히 얘기 해줘요. 언니는 다 알죠?”


가장 연습생 시절이 길었던 아영이었기에, 다른 동생들이 그렇게 묻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영도 당한 것도 많았고, 보고 들은 이야기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걸 전혀 모르는 외부인 앞에서 이야기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하......”


아영은 잠시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멤버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알아둬서 나쁠 것 없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물론 연예계 생활을 거의 포기하고 계약만료만 기다리던 그녀와는 다른 입장들이겠지만.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알아둬야 한다. 이건 눈 앞의 남자를 믿고 말고와는 다른 문제다. 본인은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적어도 이 동생들에게는 아직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나중에 왜 알면서도 얘기 안해줬냐고 따지게 만드는 것보다는 미리 알려주는 게 나을 수도 있고!


“재이야, 매니저 언니한테 문자 하나만 보내. 약국에서 이것 좀 사다달라고.”

“응!”

“그리고 저기요, 이런 것들을 얘기해주는 게 다연이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약속은 꼭 지켜요. 우리가 이런 말 했다는 건 다른 사람이 절대 모르게 하는 거.”

“약속할게요.”


남자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오늘 처음보는 남자였다. 물론 연예계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스크 구멍 안으로 보이는 눈에서는 진심으로 걱정어린 눈빛이 느껴졌다. 지금 아영과 멤버들이 하는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을 것이라는, 혹은 듣고 다른 곳에 성급하게 옮겨다니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


“너네랑 같이 왔다가 첫 날에 나간 애는 계약서 내용 보고 나간 거였어. 사장님이 고소한다고 말은 해놓고, 오히려 계약서 내용 때문에 본인이 신고당할 것 같으니까 걔네 부모님하고 합의보고 마무리했다고 들었어.”

“헐?”

“그럼 우리 계약도 잘못된 거에요?”


동생들이 웅성이는 사이, 아영은 계속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음원 사재기도 진짜야. 업체랑 짜고 돈 시켜서 한다더라. 대신 티 안나게 10위권 안으로만 한대. 그 덕에 우리 선배들이 행사 많이 뛰잖아.”

“그것도 몰랐어요.”

“난 알았는데!”

“언니 그러면 그것도 진짜에요?”

“뭐가?”

“그, 그......”


재이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단어를 뱉었다.


“스폰......”


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가장 듣기 싫었으면서, 그녀의 사장을 가장 혐오하게 된 사건. 그녀는 멤버에게 대답하는 대신,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서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있잖아요. 제가 올해로 스물 일곱이에요. 아이돌 치고 데뷔가 늦잖아요?”

“그래요?”

“네. 늦은 편이에요. 그 이유가 뭐였냐하면요. 사실은 원래 몇 년 전에 저는 데뷔를 하기로 했었어요. 멤버들도 다 정해졌고, 그 때도 연습생 몇 년만에 데뷔하는 거라 드디어 빛을 볼거라고 기대를 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영이 처음 꺼내는 이야기에 동생들도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입은 꾹 닫은 채 아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멤버를 확정한 그 날 팀 회식을 한다고 해서 갔더니, 술자리에 처음 보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나와 있더라고요? 서로 사장님, 사장님거리면서, 누구누구 이사님은 어떻게, 그러면서 이미 술판을 벌이고 계시더라고요. 데뷔를 하기로 결정한 날이니 높으신 분들도 오셔서 즐기는 자리인가보다 했죠.”


아영은 잠시 숨을 고르고, 그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오가는 얘기를 듣다보니까 저는 상상도 못한 사람들이었어요. 어디에서 무슨 업소를 운영한다는 사람도 있고, 경찰이라는 사람도 있고, 동남아 쪽에서 무역한다는 사장님도 있었고. 정치인, 아 그 어디 의원인가 그런 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누군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대기실 밖은 이따금씩 한 두 명씩 지나가는 발소리 말고는 조용했지만, 금방이라도 누가 들어올 것 같은 느낌에 아영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그런데, 회식인데 멤버들 중에 저만 온 거에요. 그리고 종종 봤던 다른 연습생들 몇 명하고요.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어요. 거기에서......”


아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뒤에 이을 말은 아직도 장면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었지만, 그만큼 떠올리기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 강요했어요. 스킨십을.”


남자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영을 쳐다보고 있는 그 눈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반면 다른 멤버들은 헉 소리를 내면서 숨을 삼키거나 서로를 쳐다보기 바빴고, 누군지 모를 누군가의 손은 아영의 어깨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 그래서 싫다고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더니 갑자기 데뷔팀에서 짤렸고, 연습하며서 기다리라는 통보를 받았죠.”


예전에는 몇 번이고 울었었다. 몇 년 전만해도, 자신보다 늦게 들어와서 새로운 그룹으로 데뷔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었다. 억울했지만 신고를 할 수도 없었고, 할만한 곳도 없었다. 버티다보면 다시 한 번은 기회를 주겠지. 그 막연한 희망 비스무리 한 것 밖에 아영이 기댈 곳은 없었다.


“......그랬어요.”


그렇게 몇 년을 버텼으니 이제 무덤덤해졌다. 그래,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이미 작년부터 데뷔는 포기했고, 계약 만료만 기다리며 나간 뒤 무슨 일을 할지 궁리하던 아영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일을 돌이켜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 그......”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마무리는 했으니까. 아영이 다시 입술을 깨물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 밑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사이, 어느새 멤버들이 모여서 아영을 한 명씩 붙잡고 안아주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애매한 위로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그저 가볍게 손을 잡거나 어깨를 붙잡거나, 혹은 가까이에서 안아줄 뿐이었다.


“.......으흠, 흠!”

“고생많으셨어요.”


갑자기 눈 앞에 들이밀어진 휴지를, 아영은 황급히 낚아채고는 눈 밑을 꾸욱 눌렀다. 그렇게 하면 눈물이 새어나오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게 벌써 몇 년 전일이라......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 때 모습은 진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장의 휴지를 더 건넸다. 그는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냇물이, 강물이 아무리 빨리 흘러도 움직이지 않는 바닥이 있어요. 바다도 그렇대요.”

“갑자기 무슨...... 시인이세요?”

“다큐멘터리에서 하던 말이에요. 돌아가신 아버지랑 같이 마지막으로 본 프로그램이었어요.”


남자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않게 꺼냈다. 하지만 정작 본인도, 마스크 뒤의 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리고 있었다.


“힘든 기억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 아니에요. 일단 다연이 때문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그 쪽도 사람 이용하는 악질처럼 보이지는 않고요.”

“다연씨랑은 다들 친하세요?”


멤버들 중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이 못 본 애도 있을 거에요. 작년에 오디션 탈락한 다음에 사장님이 연습실을 안 내줬으니까.”

“아저씨는 다연이를 어떻게 아세요?”


그 때 말을 꺼낸 건 또 다른 멤버였다. 남자는 잠깐 흔들리는 눈으로 그 멤버를 흘끗 쳐다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다연씨가 사고가 날 뻔한 걸 구했습니다.”

“헉......!”

“말도 안 돼!”

“지금은 괜찮아요?”

“너 연락처 있잖아!”

“근데 연락이 안 된지 한참 지났는데......”

“톡 보내봤어?”

“나 지난 주에 보낸 거 아직도 답 안왔어.”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남자는 다시 한 번 끼어들었다.


“다연씨는 일단 지금은 괜찮아요. 그런데 들으면서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절대 데뷔는 없을 거라고 했던 사장님이, 갑자기 이렇게 멤버를 모아서 팀을 만들어준다는 게 혹시 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나요?”


멤버들의 눈이 빠르게 좌우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까처럼 얘기를 해도 괜찮은지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조리있게 설명을 잘 할 수 있을지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재이가 입을 열었다.


“아실지는 모르겠는데, 저희는 전부 작년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탈락했었거든요.”

“그건 사장님이 용기를 주신 거에요. 탈락했다고 인생 끝났냐고, 그걸 기회로 삼아보자고.”

“너희들이 실력이 없어서 탈락한 게 아니다, 때를 잘못 만났을 뿐이다라고......”


그 다음 말을 이어나간 건,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다 닦아내고 목도 가다듬은 아영이었다.


“사실 좀 속보이는 노림수라고 생각했어요. 조작 논란 터지자마자 오디션 프로그램 탈락자들을 모아서 데뷔시킨다는 게. 웃기잖아요.”

“그러면 조작은 없었다고 확신을 했었던 건가요? 처음에 조작 의혹이 터졌을 때도?”


아영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였다.


“그거야 알 수 없죠. 근데 그러려니 했어요, 조작이 있었든 없었든 저는 그 프로그램에서 죽을 쒔으니까요. 공정하게 채점을 했든, 조작이 있었든 제가 거기서 성공하지 못할 건 알고 있었어요.”

“언니!”

“왜 그래요, 언니...... 언니도 잘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나봐요. 뻔한 노림수라고. 그래도...... 그래도, 인생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같이 몇 년동안 고생한 동생들하고 노래 한 곡이라도 남길 수 있으면 좋으니까. 그래서 하겠다고 했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 와중에, 남자는 한 번 더 끼어들었다.


“이다연씨도 오디션에서 탈락했는데 왜 데뷔조에 포함되지 않았죠?”

“어......”

“그건 저희도 잘......”


멤버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는 사이, 아영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느릿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다연이는...... 다연이는 오히려 저희 중에는 사장님하고 제일 친했을 거에요. 중학생 때 들어와서 오래 있기도 했고, 그만큼 저희가 못하는 말을 사장님한테 쉽게 꺼내기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사장님은 다연이가 어리면서 당돌하다고 또 저희보다 잘 챙겨주시기도 했고.”

“그러고보니까 진짜 다연이는 왜 빼셨지?”

“솔로로 하지 않을까?”

“매니저 언니가 그러던데,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고. 배우 하고 싶다고 그랬대.”

“근데 다연이 한참 연락이 안 되던데, 그럼......”


멤버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남자는 다시 한 번 한 명 한 명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다연씨는 이미 기사가 나기 전부터, 오디션 조작에 대한 내용이 터질 것을 알고 있더라고요.”

“네?”

“혹시 최근에 다연씨와 이야기를 나누신 분은 없으신가요?”


다들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멤버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살랑살랑 좌우로 젓거나,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서 다연과의 마지막 연락을 확인했다.


“저는 다연이랑 카페 간 게 마지막인데, 그건 추워지기도 전이라......”

“저는 저번 달에요! 근데 그 때도 그런 말은 안 했는데?”

“마지막에 잘 자라고 카톡한 게...... 저도 저번 달이에요.”

“저도 다연이랑 오디션에 대해서 얘기한 적은 없어서.......”


몇 명이 중언부언 대답하고 난 뒤 아영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오히려 그 저희끼리는 그 오디션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하려고 해요. 탈락한 오디션 얘기를 뭣하러 끄집어내겠어요?”


아영의 말에 멤버들도 한 두명씩 핸드폰을 집어넣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런데 어째 남자의 태도가 이상했다. 늘 말하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그가, 갑자기 멤버들 중 누군가를 가만히 노려보면서 그 쪽으로 몸을 기울인 것이다.


“저기요.”

“네, 네?”

“괜찮으세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으신데.”


남자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했다. 분명 하는 말은 걱정해주는 말인데, 목소리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아, 네... 네, 괜......”

“다연씨랑은 별로 안 친하시죠?”


다른 멤버들이 조용해진 사이, 남자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남자가 쳐다보는 멤버는 소연으로, 수아 다음으로 나이가 어린 멤버였다.


“네?”

“다연씨가 그랬거든요. 소속사에서 자기랑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있다고. 아까 다연씨 얘기를 한 다음부터 표정이 안 좋으시길래요.”

“아, 아니에요! 저 다연이랑 친해요!”

“괜찮습니다, 편하게 얘기하셔도 돼요.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연씨와 관계가 껄끄러운 사람도 있었다 정도만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아니라니까요!”

“화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친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질책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다연씨에 대해서 모르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러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아니, 저 다연이가 연락 끊기 전에 마지막까지도 제가 얘기했는데 무슨...!”


소연은 그렇게 말한 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다른 멤버들이 그녀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어안이 벙벙한 사이, 남자는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 소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뭐라고 했어요?”

“어.....예?”

“다연씨한테. 무슨 얘기 했었냐고요. 오디션에 대해서.”

“저, 저 아무런 얘기도 안 했어요!”


남자는 소연의 앞에 다가와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중해보이는 자세와는 달리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아까 ‘다연이가 연락을 끊기 전’이라고 했잖아요? 다른 분들은 언제부터인지 연락이 안 된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말은 다연씨가 연락을 의도적으로 끊었고, 그 시점을 대충 알고 있었다는 말 아니에요?”


소연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좌우로 돌렸다. 그 사이 누군가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고, 아영을 비롯한 몇 명은 소연에게로 눈을 돌렸다.


“소연아?”


마침내 아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사이 주위를 살피던 소연의 눈은 점점 붉어지더니 이내 촉촉하게 젖어들어갔다.


“소연아. 괜찮아. 무슨 일인데?”


아영이 재빨리 남자의 옆에 앉아서 소연의 두 손을 잡았다. 손을 내린 소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움찔거리고 있었다.


“사장님이 절대로, 절대로......”

“말해 봐. 괜찮아.”

“언니, 나.......”

“괜찮아. 괜찮으니까, 일단 말해봐. 다연이가 위험하다잖아, 응?”


소연을 아끼는만큼, 그녀가 대화를 힘들어한다면 아영이 굳이 그걸 달래면서까지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었다. 남자에게 다그치지말라고 대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영이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소연을 감싼 건, 그만큼 소연의 태도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을 봐왔던 동생이니만큼 소연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그녀의 촉으로도 느껴졌다.


“소연씨?”


남자는 아영을 흘깃 쳐다보고는 그렇게 소연을 불렀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같은 얼굴로 아영과 남자를 번갈아쳐다보다가, 마침내 남자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고정했다.


“다연씨를 위한 거니까 말해줘요. 무슨 얘기를 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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