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4. 신인 그룹 럭스(3)

by 봄단풍

“흐, 흐윽...!”


소연은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뭔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숨도 들이마셨지만, 그럴 때마다 울음소리를 내뱉을 뿐 아무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흐, 흐아아아앙......”

“소연아, 괜찮아. 괜찮아.”

“대표님이, 흐으아아아앙.......”


아영은 소연을 안았지만 결국 불길한 예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데뷔를 시켜주나 했더니, 결국 여기서도 대표가 소연에게 뭔가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예전부터 한 번 제대로 먹여주고 싶었던, 지난 몇 년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대표 이사.


“시간 없어요. 빨리 말 해. 당신이 다연씨를 부추긴 거야?”

“아, 아니에요..흐아아아앙.....”


남자는 처음으로 평정을 잃은 것 같았다. 그는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소연의 앞에 더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결국 소연이 말을 시작한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나고였다.


“처음엔......”


남자가 방 안에서 몇 번이나 앉았다가 일어났다가를 반복한 뒤에야,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엔...... 처음엔, 대표님이 진짜라고 했어요.”

“뭐가요?”

“그 오디션 프로그램이요. 조작됐다고, 평가 결과를 바꿔치기 했다고.”


소연은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말을 이었다.


“증거가 있고 확실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난리가 날 거라고, 저만 알고 있으라고 그랬어요. 그런 전화도 들었고 녹취도 있다고, 저한테만 말해주는 거라고, 절대.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된다고.”

“그런데요?”


소연은 몇 번 더 코를 훌쩍이다가 이내 아영이 건넨 휴지를 받아들었다. 시원하게 코를 푼 뒤 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요! 진짜로. 그런데 다연이가 떨어지고 너무 힘들어하니까, 위로를 해주려고 그렇게 살짝 귀띔만 해줬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직후 훗하고 새어나온 웃음소리만 봐도 ‘귀띔만 해줬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걔가 그래도 그 얘기를 듣고 좀 기분이 풀리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뭔가 이상하긴 했어요.”


소연은 한 손에 코를 푼 휴지를 든 채로, 양 손을 들어 뭔가를 설명하려는 것처럼 허공을 휘젓다가, 결국 두 팔을 허공에 툭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냥, 모르겠어요. 뭔가 위로가 된 게 아니라, 그냥......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몰랐죠. 그런데 며칠 있다가 다연이한테 연락이 왔어요.”


소연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아영도 다른 멤버들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들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면 남자는 여전히 소연을 쳐다보며 다시 되물었다.


“뭐라고 왔어요?”

“지금까지 자길 챙겨줘서 고맙다고, 곧 자기가 연락할 거라고.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그게 지난 주였어요. 저도 그게 마지막 연락이었는데, 갑자기 조작 논란이 터지고 막 그렇게 돼서......”

“아무튼, 그게 다연씨와 마지막 나눈 얘기라는 말이죠?”


소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대표님이 전화하는 걸 들었어요. 걔가 진짜로 하든 안 하든 자기는 손해볼 거 없다고. 그런데 그게 다에요.”


소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영과 멤버들이 다시 소연을 감싸고 등을 토닥여주고 휴지를 챙겨주는 사이,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한 그는, 검은 코트를 펄럭이며 문으로 다가갔다. 아영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저기, 잠깐만요. 아직 물어볼 게 있어요.”


남자는 발을 멈추고 아영을 돌아봤다.


“어떻게 된 거에요? 혹시 다연이가 사장 말만 듣고 조작이 있다고 신고한 거에요?”

“아뇨.”

“혹시 다연이가 체포된 거에요? 방송국에서 범인 찾았고 고소할 거라고 하던데?”

“다연씨는 그 일과 관계없습니다.”


남자는 아영의 말이 끝나고 몇 초가 흐른 뒤에야 천천히 대답했다. 아영은 그런 태도가 영 미덥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다. 그 때, 아영에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저씨가 한 거...... 아니죠?”


남자는 잠깐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 곳에 눈을 잡아끄는 것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을 올려다 본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다시 아영에게로 눈을 돌렸다.


“누가 그랬는지 알았으니까, 바로잡으려고요.”


이번에는 아영의 말문이 막혔다.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걸 따질 새도 없이, 이번에는 또 새로운 촉이 아영의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만, 혹시 우리 대표님을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그건 일단 본인한테 듣고 판단해봐야죠.”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러지 마요. 소용 없어요. 제가 해봤으니까 알아요.”

“네?”


아영은 잠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머리를 위로 쓸어넘기면서 고개를 들었다.


“친한 언니 중에 기자가 있어요. 그 친구랑 짜고 지금 사장에 대한 일을 다 폭로하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요?”

“막혔어요. 기사는 무슨, 인터넷에 올리거나 어디 알리지도 못했어요. 사장이 밤마다 술을 아무나랑 마신 건 아니더라고요. 제가 알리려고 모아놨던 증거도 모조리 다 압수당했어요. 아마 다 없애버렸거나 그랬겠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겠다는 듯. 아영도 남자와 함께,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섣불리......”

“그 언니 있잖아요.”

“네?”

“지금도 기자신가요?”

“그거야, 네. 그렇죠. 왜요?”


남자는 마스크 너머의 눈을 빛내면서 아영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아직도 울고 있는 소연을 위로하느라 멤버들이 모여있는 쪽을 한 번 슬쩍 쳐다본 아영은, 남자가 다음 말을 속삭일 때쯤에야 다시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부탁 하나만 할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아영에게만 들리도록 몇 마디를 속삭였다. 아영은 중간 중간 고개를 끄덕이다가, 남자가 마지막 말을 마친 뒤에는 잠시 멍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렇게 수 초동안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야, 그녀는 남자를 쳐다본 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릴게요. 그럼.”


남자는 공손하게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방 안 쪽으로 걸어들어가서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왜......어!?”


바람이라도 쐬려는 걸까 싶은 순간, 그는 곧바로 아영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어!?”

“대박, 진짜다. 진짜 블링크였나봐요......!”

“어디 갔어요? 뭐야?”


사람이 나갈 수 있는 창문이 아니었다. 손잡이를 비틀고 바깥쪽으로 들어올리는 창문으로, 해봤자 팔이나 뻗을 수 있을까 싶은 좁은 창문인데?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이 있는 대기실도 애초에 누군가 숨을만큼 크지도 않았다. 아영을 비롯한 럭스 멤버들은 방 안을 뒤져볼 생각도 못한 채, 창문 아래에 혹시나 아까 그 남자가 있을까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3. 신인 그룹 럭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