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며칠 전 아라와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저녁 시간대가 됐다. 하늘의 금빛과 푸른빛이 경계없이 섞이는 시간, 먼 하늘의 눈부신 빛으로 발 아래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 불과 몇 분만 지나면 도시는 푸르게 물들고, 눈부신 금빛은 붉게 물들고, 머리 위 하늘은 남색 이불을 덮기 시작할 시간.
아라의 아파트 옥상에서 나는 숨을 골랐다. 준비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던 탓에 마음이 급했다.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고, 시내로부터 거리도 어느 정도 있으니 볼 눈은 없겠지. 나는 그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USB를 꺼냈다. 유리인지 플라스틱인지도 알 수 없는 단단하고 투명한 재질의 뚜껑을 벗긴 뒤, 핸드폰에 스톱워치와 함께 동시에 버튼을 눌렀다.
‘급할 때는 눌러. 누르면 삼십 초 안에 네가 있는 곳으로 내가 갈테니까.’
‘삼십 초요?’
‘응. 서울 안이면.’
한서아씨는 분명 그렇게 얘기했었다.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도저히 편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긴 생머리의 여인.
나는 심호흡을 하고 슬쩍 아파트 아래를 내려다봤다. 큰 길쪽에서 들어오는 차량은 아직 없었다. 사실 교통 체증이 심할 시간 대긴 했다. 늦은 오후,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는 시간이니까.
‘아, 그러면 본인이 오는 게 아니라 다른 공무원 분들이 오시는 건가?’
나는 주의 깊게 더 멀리까지 살펴봤다. 하지만 여전히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급하게 사이렌을 울리는 차량이라든지, 하다못해 빠른 속도를 내는 차량이라든지, 아니면 뛰어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늘 그렇듯 아라의 아파트 근처는 조용하고 평온했다.
‘45초....’
그럼 그렇지. 삼십 초는 무슨! 설렜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도 오히려 현실적인 결과에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소리가 들릴 지도 몰랐다. 자동차의 엔진소리, 아니, 어쩌면 헬기나 전투기로 올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
눈을 떴다. 이런 저런 공상에 망상을 하다가 슬쩍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2분 30초.
‘아직 멀었나...’
혹시 공상이 아니라면? 진짜로 헬기를 타고 나타나면?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펴봤다. 물론 조용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눈이 시릴 정도로 청명한 하늘이었다.
3분 50초. 슬슬 짜증이 났다. 아니, 허풍이 너무 심하잖아? 삼십초라니. 3분 50초면 몇 초야 도대체. 180초에다가 50을 더하면 230초. 그렇게 계산하는 사이 또 시간이 흘러서 벌써 4분. 이러다가 삼십 초가 아니라 삼백 초를 찍겠는걸.
4분 45초.
5분 15초.
5분 35초.
5분 45초.
5분 50초......
어쩌면 이게 현실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서울 안에만 있으면 삼십 초라니, 서울이 얼마나 큰데. 누가 들어도 허풍인데, 그 말을 괜히 믿은 내 잘못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고개를 젓다가 문득, 뭔가 익숙한 것을 본 것 같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일상의 풍경에 어올리지 않는 뭔가가 슬쩍 들어왔다가 다시 숨어버린 느낌.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내 왼편에 있는 아파트의 다른 동 옥상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멀리서도 보이는 검은색 가죽 자켓과 그 안에 딱 붙는 하얀 니트. 그 여인은 내 쪽을 보고 손을 흔들더니, 이내 그 쪽으로 오라는 듯 손을 까닥거렸다. 확인할 것도 없었다. 나는 옆 동 옥상 난간을 보고 바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마자 내 눈 앞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서아씨가 서 있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왜 눌렀어?”
그녀는 지금까지 내게 보였던 털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차가운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시험해보려고 누른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 내일이면 결정해야할텐데 그 전에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한서아씨는 팔짱을 끼면서 다시 물었다.
“그럼 그냥 전화를 하지 그랬어?”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내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거리자, 한서아씨는 가만히 노려보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내가 연락처 안 줬냐?”
“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진짜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없네, 진짜.”
“그 때, 최무혁씨가 명함 주시니까 더 좋은 거 주시겠다고......”
“아, 맞다 맞다!! 하 진짜, 그 인간 때문에 되는 게 없어, 진짜.”
한서아씨는 곧장 처음 보여줬던 털털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얼굴의 반을 채울 것 같은 커다란 입으로 웃어보이며, 그녀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뭔데?”
“지금 계신 특수수사팀이라는 게 혹시 정확히 어떤 곳인가요?”
“뭐, 그냥. 이런 저런...... 비밀 수사팀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그냥 이렇게 넘어간다고? 아, ‘비밀’. 비밀이라면 인터넷에 검색이 되지 않았던 건 대충 납득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걸로는, 내 미래를 결정하기에는 부족하다.
“혹시 중대범죄수사과랑 비슷한 건가요?”
“어쭈, 혼자 열심히 찾아봤나보네. 근데 아니야. 네가 일할 곳은 대외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아.”
한서아씨는 오히려 기분이 좋아보였다. 어째 뿌듯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대견하다는 눈치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런 질문보다도, 사실은 한서아씨에게만 할 수 있는 부탁이 따로 있었다.
“그러면 혹시, 지금 그 사건도 알고 계세요? 요새 나오는 오디션 조작 사건.”
“뭔지는 아는데, 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뭔 부탁? 내가 수사하는 것도 아니라서 뭐 나한테 부탁하고 말 것도 없는데. 그리고.”
그녀는 잠깐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더니, 순식간에 한 손을 뻗어 내 귀를 움켜쥐었다.
“아, 아아아!!”
“그리고 어딜 수사중인 일에 대해 청탁을 넣으려고 해, 감히? 어? 너, 너 이거 큰일 난다, 어?”
“아악, 그게 아니고......! 진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어쭈, 경찰보다 빨리 잡을 수 있다 그거지?”
“아뇨, 그게..... 아아아아!”
“아니면 경찰이 지금 헛다리를 짚고 있다, 그런 거야?”
“네, 네...!! 아, 아아악!!”
대답과 함께 한서아씨의 손아귀가 멈췄다.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더 심각해진 얼굴로 내 앞에 다가와서 섰다.
“뭔 소리야?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게.”
“아니, 지금 언론에 나온 방향대로 가면 범인을 잡긴 잡을텐데, 그게......”
“잡을 텐데, 뭐?”
“그게 진짜 범인이 아닐 거에요. 아니, 맞긴 한데, 꼬리 자르기라고 해야하나, 진짜 그 뒤의......”
“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경찰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그런 걸 구분 못 할까봐?”
“그건......”
...... 그렇지. 하지만 다연이 아무리 철저한들 그녀가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는 건 뻔했다. 대외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니만큼 수사도 빠르게 진행 할테고, 다연처럼 연예계 활동을 준비했던 갓 스무살인 사람에게 경찰을 따돌릴만한 기술이 있을리도 만무했으니까. 무엇보다도 다연이 잡힌 다음 자신의 소속사 대표를 배후로 지목하거나, 지목하더라도 그가 잡혀들어갈 확률은 극히 낮아보였다.
“...... 그, 아무튼 제가 오늘 안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혹시 범인을 특정하더라도 내일 본격적으로 시작해주시면 안 될지......”
“뭐, 뭐. 그러다가 범인 도망가면 네가 대신 잡혀들어갈래?”
“아뇨, 오늘 안으로 제가 범인을 잡아다 드릴게요.”
단호하게, 또렷한 눈으로, 조금도 겁먹지 않은 것처럼. 게다가 잡아 오겠다는 확언까지. 나는 최대한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서아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쪼끄만 게 벌써부터 눈을 부라리고......”
“아,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건 그거야? 수사 진행을 내일 오전 중으로 미루는 거?”
“어, 네. 네, 맞아요.”
이미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핸드폰으로 뭔가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어딘가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그렇게 두드린 뒤, 그녀는 핸드폰에서 띠링 소리가 난 다음 얼굴을 펴고 다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됐고. 또?”
“네?”
“뭐, 또 없냐고. 나를 찾은 이유가.”
머리가 텅 빈 기분이었다. 여러가지 상황을 대비해 이런저런 명분들도 생각해뒀고, 핑곗거리도 준비해뒀는데 전부 까먹었다. 머릿속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는 해뒀는데, 정작 책상 앞에 앉지 못하고 천장 위로 몸이 붕 떠오른 기분. 나는 어떻게든 기억해내려 애쓰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이, 한서아씨는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었다.
“혹시 있잖아요, 내일 결정하기 전에.”
“응.”
“제가 세상에 누군지 밝혀지거나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뭐?”
슬쩍 곁눈으로 옆에 있는 한서아씨를 쳐다봤다. 그녀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 무서운 눈빛에 머리가 뒤로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고 손발이 덜덜 떨렸지만 나는 꿋꿋이 그녀를 마주 쳐다봤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너 이거 이거.....”
“아, 아악!!”
그녀는 거침없이 내 어깨에 감은 팔로 내게 헤드락을 걸었다.
“이 새키, 이거. 굳이 굳이 어렵게 부탁을 들어줬더니 이제 아예 사고를 치겠다고 예고를 해?”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어떻게든 팔을 놓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팔은 왜 이리 단단한지, 힘은 또 왜 이렇게 센지!
“너 빨리 말해. 오늘 무슨 짓 하려고 그래?”
“아, 아무것도 안해요!”
“거짓말 하고 있네, 이 새키 이거!”
“아 진짜, 아잇....! 진짜 아파요!”
“아프라고하지, 그럼. 좋으라고 하냐?”
“아오 진짜! 무슨 아저씨처럼......”
“넌 뒤졌다.”
“아아아아악!!”
진짜로 화가 나서 있는 힘껏 한서아씨의 팔을 밀쳐냈다. 하지만 어째 그녀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몸을 있는 힘껏 뒤틀고 발로 뛰어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 때마다, 한서아씨의 몸이 구석구석 단단하다는 것만 알게 됐다. 결국 그녀가 제시한 ‘누나라고 부르면 풀어주겠다’는 조건에 순순히 응한 뒤에야, 나는 그 단단한 헤드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몰라, 나는 너랑 만난 적도 없고 아무 얘기도 못 들은 거야. 알아서 해.”
“네, 저...... 누나.”
“그렇지. 그래, 왜?”
그리고 그녀는 또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씨익 웃어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미소는 사람을 안심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손도 거칠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욕이 절반이지만, 분명 그녀는 미인에 속하는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 대학교 신입생 때 밥을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같은 느낌을, 학교를 졸업하는 지금 사회인으로서 다시 느끼는 기분. 쌍커풀 없는 눈과 반달처럼 휘는 눈웃음, 아이같은 볼과 하얀 피부까지, 동안의 조건은 나름대로 다 갖춘 그녀였다. 입과 손이 투캅스일 따름이지......
“누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만약에 조작이 있었더라면 그 아이돌 그룹은..... 계속 활동을 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엉?”
한서아씨는 눈을 치켜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최무혁씨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지. 서아씨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고는 옥상 아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조작을 했으면 잡혀들어가야지 활동은 무슨. 조작은 당연히 청탁이 있었으니까 한 거 아니야?”
“그러면 만약에 그게 아니면요? 본인들은 몰랐고 방송사에서 조작을 했다면?”
“뭐...... 그렇게 되면 활동 여부는 법정에서 판단하겠지.”
그녀답지않는 두루뭉술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대답. 그래, 재판에서 갈리면 답이 나오겠지 뭐. 그리고 애초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해서 묻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내 생각을 묻는 거면, 나는 반대야.”
“네?”
“야, 인마. 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알고봤더니 답지를 바꿨대. 아니면 시험에서 만점 받은 애를 보니까, 걔만 부분점수를 인정해줬어. 그럼 어떻게 해야해?”
“재시험을 보거나, 아니면 뭐......”
“그런 사후 처리는 제쳐두고, 일단 시험 결과는 무효라고 해야하는 거 아냐. 맞아 틀려?
“그렇죠.”
“일단 경찰이 수사를 들어갔으니 조작 여부는 모를 일이다만, 진짜로 조작이 있었다면 자기들 의도가 있든 없든 오디션 결과는 무효일 거 아냐. 그럼 활동 접고 각자 따로 활동을 하든지 해야지. 애초에 그 오디션에서 데뷔시키는 조건이 최고 등수를 유지하는 건데, 그게 무효가 된 거 아니야?”
그러면 그렇지. 조금 애매하다 싶더니, 이내 그녀의 성격대로 시원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런 대답이 나오면 묻고 싶은 것이 조금씩 더 생기는 법이다.
“근데 저 아는 사람은 그런 얘기도 했었어요.”
“무슨 얘기?”
“결과와 과정 중에 뭐가 더 중요한지는 역사가 따지는 거라고요. 뭐 인체 실험이라든지, 전쟁이라든지, 아니면 뭐...... 아 맞다, 그 사람은 그랬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는 인성파탄자지만 음악은 좋아서 듣고 있다고.”
한서아씨는 내가 말을 하는 동안 난간으로 등을 돌려서 기대섰다. 그렇게 옆에서 내 얼굴이 잘 보이는 자세를 취한 그녀는, 내가 말을 멈추자마자 말을 시작했다.
“좋아, 그럼 거기부터 시작해보자. 이런 가수가 있다고 쳐, 젊었을 때는 학교 폭력과 왕따에 가담하고, 커서는 대마초와 음주운전을 하는 가수가 있다고 쳐 봐.”
“진짜 있는 가수 얘기하는 거에요?”
“아니, 예를 들어보자고, 인마. 말 끊지 말고. 그렇게 인성이 개차반인데도 음악이 좋아서 팬이 수백만이고, 내는 음원마다 차트 신기록을 달성하는 가수가 있다 쳐보자고. 그런데 그 가수가 누구랑 시비가 붙어서 일방적으로 폭행을 하다가 잡혔네? 재판이 시작됐지. 좋아, 그럼 그 가수가 증거로 자기가 수백만 장 팔았던 앨범을 낼 수 있을까?”
“어...... 그래도 돼요?”
“아니, 인마. 하다못해 그게 쌍방 폭행이었다든지, 합의가 있었다든지, 아니면 실은 정당방위였다든지로 얘기를 해야지, 자기가 음악을 잘했다는 얘기는 해서 뭐하냐고. 그걸로 판결을 내리면 그게 공정한 재판이냐? 그 새끼가 음악을 잘 만들든, 팬이 몇 천만명이 넘든, 몇 년을 음악을 해왔든. 사람을 팼으면 잡혀들어가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의미보다도, 듣고 있으니 계속 말씀하시라는 의미로.
“전쟁? 인체 실험? 그 덕분에 개발한 기술로 현대에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있으니 그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정작 그 얘기 한 새끼는 전쟁터 가본 적도 없다에 내가 손모가지를 걸게. 그럼 전쟁에서 죽은 사람, 그 사람의 친구, 동료, 가족은? 그 덕분에 집도 없이 벙거지만 뒤집어쓰고 다 무너져내리는 도시를 걸어다니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래도 전쟁 덕에 인류가 발전했다’ 라고 할 수 있겠어?”
“아니 제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아 그러니까! 너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라고. 과정이 불의해도 결과가 괜찮으면 합리화 할 수 있다? 그럼 컨닝을 하든 부정행위를 하든 대충 수능 만점받아서 좋은 대학가면 끝이고, 대마를 빨든 음주운전을 하든 돈만 벌면 끝이야? 사람 죽이고 시체 유기해도 물건 좀 많이 팔고 이미지 좋으면 끝이냐고. 법과 질서라는 게, 내가 하고싶은 걸 하기 위해서 좀 어겨도 되는 그런 허허실실한 약속이야?”
사실 한서아씨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늘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행동보다는 욕이 먼저 튀어나오는 사람이었는데. 적어도 나와 마주칠 때는. 심지어 그렇게 길게 말하면서, 청므으로 욕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지켜야하는 가치들이 있는 법이야. 그 어떤 결과물로도 규칙을 어긴 걸 정당화할 수는 없어. 나도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안다, 요새 사회를 보면 안 그런 놈들 천지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
한서아씨는 담배라도 꺼내물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별안간 날 돌아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자기 잘 사는 게 최고라도 해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소중한 것들이 있는 법이야. 비단 법이 아니더라도, 그런 규칙들이 아니더라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아라와 버스를 타고 왔던 날이 떠올랐다. 소중한 것들, 그 날 야경이 참 예뻤지. 아라는 더 예뻤고. 그리고 그 날 따라 꼬박꼬박 인사를 건네며 내리던 사람들까지.
“하씨, 갑자기 왜 진지한 거 물어봐가지고. 아무튼, 내가 여기 들어온 것도 그것 때문이야. 그런 새끼들도 공정하게 잡아 족치려고.”
바람이 한서아씨의 머리카락을 뒤로 날렸다. 꼭 배우라도 된 것 같은 표정과 당당한 자세로 한서아씨는 그렇게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뭘 여쭤보기까지 해. 그냥 누나, 이것 좀 물어봐도 돼요? 하면 되지. 뭔데?”
지난 주에 있었던 화재사건을 떠올렸다. 내가 사람을 구하고 있는 데도 밀어내던 구조대원. 그는 구조대원 외에는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원칙이라고, 내가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도 밀어냈었지.
“그런데 그 원칙을 나쁜 짓을 할 때만 어기는 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이야?”
“제가 사람들을 구하려고 했을 때. 그 때는 원칙을 어겨야했어요. 구조대원도 아니고, 정식으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업도 아니지만 현장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구했죠.”
한서아씨는 처음으로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쉰 그녀는, 이내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으면서 옆으로 다가왔다.
“임마.”
“예?”
“너는 왜 규칙을 어긴 건데?”
“사람을 구하려고요.”
“그럼 그 가수는?”
한서아씨가 말하려는 바는 명백했다. 그럼에도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어깨를 몇 번 더 두드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그걸 간단히 해결하는 방법이 따로 있지.”
“네?”
“시우(SIU)에 들어와. 합법적으로, 원칙적으로 모든 긴급 상황에 네가 먼저 나서서 사람을 구할 수 있어. 원칙도 어기지 않고, 네가 하려는 일도 할 수 있잖아.”
그녀는 다시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웃어보였다. 아까처럼 장난기 많은 미소도 아니고, 날 후드려 패다가 억지로 만든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도 아니었다. 눈은 똑바로 내게 고정한 채 입꼬리를 자연스럽게 올린 미소. 누누이 말하지만, 한서아씨는 예뻤다. 반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동경과 존경이 샘솟는 미모. 티없이 맑으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만드는 미소였다.
“아무튼 허튼 생각하지 말고, 내일까지 잘 생각하고 결정해.”
“혹시 그럼 이 버튼은 이제......”
“이제 눌러도 내가 안 올거야. 그거 누르면 뭐 이제 문자 하나 가고 말거니까.”
“아니 저, 누나!”
“됐어, 인마. 늦었어. 아무도 안 와. 그냥 공무원 한 두분 오셔 가지고 건강히 잘 계시나 물어만 보고 갈 거야. 어? 진짜로 내일까지는 허튼짓 하면 안 된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아니, 안 돼.”
그녀는 아예 등을 돌리고 가려다가 어깨 너머로 나를 흘끗 살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후 하고 숨을 내뱉고는 다시 뒤돌아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 진짜 신경쓰이게. 뭔데?”
“왜 저를 그렇게 챙겨주세요?”
“아이씨, 그게 질문이야? 내가 언제?”
한서아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문제는 그 악력도 대단해서, 머리털이 다 뽑히는 기분이었다!
“으이그. 제발, 오늘 하루만 사고치지말고 가만히 있어라, 응? 아니면 치더라도 내가 갈 수 있는 곳에서 사고를 치든가.”
마지막 말을 들릴 듯 말 듯 덧붙인 한서아씨는 내 볼을 꼬집고 몇 번 흔든 뒤 곧바로 아파트 옥상 출입문으로 발을 옮겼다. 순간이동으로 밑으로 데려다드릴까요, 라고 물어보려다가, 면박을 들을 것이 뻔해서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잘 어울린다.”
“네?”
성큼성큼 멀어지면서 한서아씨는 갑자기 그렇게 말을 던졌다.
“코트.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문 앞에서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덧붙이고는, 터벅터벅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갑자기?”
코트를 몇 번 털었다. 아무래도 헤드락도 당하고 어깨동무도 하다보니 서아씨의 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손을 따라 털려나왔다. 슬쩍 들어서 햇빛에 비춰보니, 분명 검은색인데 이따금씩 푸른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신기하네.”
이미 해는 완전히 먼 빌딩들 사이로 넘어간 시간. 머리 위로 남색 이불이 덮이고 옷깃은 저절로 여며지는 시간, 하늘 위에는 별이 보이지 않아도 땅 위에는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불이 수많은 군중의 눈처럼 켜지는 시간.
“이만하면 시간도 됐겠지.”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해놨다. 이제 남은 것은 계획해 둔 장소에서 기다리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