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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대표이사 박만기

by 봄단풍


타닥, 타닥.

박만기 대표의 계산기에 대한 애착은 그의 상고시절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동기가 은행에 입사하고 승승장구하는 사이, 그는 숫자 계산이 느리다는 이유로 취업을 포기하고 사업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사실 사업이 가능했던 건 돌아가신 모친이 남겨주신 몇 안 되는 돈 덕분이기도 했다.


타닥, 타닥.

물론 그 유산이 온전히 그의 사업에 투자가 되었냐하면 그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본인 말고는 아는 바가 없으니. 고등학교 졸업 이후 십 수년간 그의 역사도 똑같다. 지금으로부터 십 여년 전 연예기획사의 부사장으로 갑자기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디 남은 사진도 없고 그를 알고 지냈다는 사람도 없다. 다만 그가 술자리에서 뱉은 자신의 이력들을 미루어볼 때, 그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 준 귀인을 그 십 여년 사이에 만난 것은 확실해보였다.


타닥, 타탁.

불 꺼진 방에서 바깥이 어두워지길 기다리면서, 그는 말없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건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아무 숫자나 두드리고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를 반복. 처음에는 아는 척을 많이 하려고 공학용 계산기를 사둔 적도 있었으나, 두드리는 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 은행에서 자주 쓰는 열 네자리 계산기로 다시 바꾼 것이다.


타닥, 타닥.

다시 그의 역사로 돌아와서,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연예기획사의 사장으로 올라선다. 아니, 그는 사장보다 ‘대표 이사’라는 직함을 더 좋아했다. 원래의 대표 이사가 자리를 내놓은 사유는 다름 아닌 행방불명. 회사의 명운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당돌하고 또 담대하게 대표를 이어받았다. 걱정은 없었다. 실종된 원래의 대표로부터 사업의 노하우는 모두 사사받았고, 그것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적용하기까지 했으며, 그리고......


원래 대표의 행방은, 오직 그와 그의 몇 몇 충실한 직원만이 알고 있었으니까.


타닥, 타닥.

집중해야하는 시기였다. 몇 년간 수익이 고만고만했던 순간에서, 잠시나마 반짝하고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처음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수익. 설마 설마했는데 정말로 실행에 옮길 줄은 몰랐던 계획.


‘요즘 애들은 진짜 당돌하면서 멍청하단 말야.’


그리고 절실하고, 자기 중심적이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건, 이번에 데뷔시킬 아이돌 그룹 럭스의 예상 수익을 점검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길게 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노래도 다른 그룹에서 쓰지 않았던 곡을 재탕했을 뿐이고, 매니저도 한 명뿐인데 올해를 끝으로 퇴직할 예정이고. 안무, 의상, 컨셉의 개발, 팬클럽 관리, 굿즈 디자인과 인터넷을 비롯한 대중의 반응을 모니터링 하는 것까지, 기타 세부적인 비용도 최소화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걔네들은 걸그룹 할 깜냥도 안 되거든.’


그가 노리는 건 하나였다. 지난 일년 간 정상에 있었던 걸그룹. 그 그룹을 뽑았던 대국민 오디션이 조작됐다는 루머가 퍼졌다. 방송사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대처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넣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반반. 그건 이미 대중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의심이 꽤 뿌리를 내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탈락자들로 모인 걸그룹을 데뷔시킨다. 노리는 건 대중의 동정섞인 시선. 괜히 한 번이라도 더 클릭하게 되는 뮤직 비디오, 안무 연습 영상. 한 번이라도 더 듣게 되는 음원, 그리고 ‘탈락했어도 소속 연습생을 챙기는 가족같은 연예기획사’라는 이미지.


‘하지만 얕아.’


그래, 대중은 바보가 아니다. 아마 동정표를 던지기 전에, 데뷔한 멤버들이 그 오디션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보였는지를 먼저 찾아볼 거다. 과거 방송 영상도 찾아볼 것이고, 연습 영상도 찾아볼 터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순식간에 무관심으로 잊혀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걔네들 다 제대로 방송을 탄 적이 없어서 볼 수가 없지.’


그나마 방송을 탈 정도로 잘 했던 건 한 명뿐이었다. 그래, 사실 데뷔를 시킨다면 그녀를 시키는 게 맞는 거였다.


이다연.

어리지만 당돌하고, 행동력도 있고, 눈치도 빠르고. 아쉽게도 그 장점들이 그녀를 파멸로 이끌었지.


타닥, 타닥.

아무튼, 그래서 그가 지금 두드리고 있는 건 예상 지출금액이었다. 럭스의 지원 및 관리비용. 매니저 월급, 방송 출퇴근용 밴의 기름값, 하루 1인당 식비까지, 세세한 금액까지 맞춰보고 있던 것이다.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실제로 나가는 금액은 그의 계산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진 않을 터였다. 그냥, 두드리는 소리와 어두워지는 방 안에서 홀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그의 취향이었을 뿐이었다.


뚜루루루루-

그는 짜증스럽게 전화기를 노려봤다. 빨간 불빛이 깜빡이면서 연신 신호음을 울렸지만, 내선번호임을 확인하고는 그는 소리를 무시했다.


뚜루루루루-

짜증날만한 상황이지만, 때로 그는 오히려 그 소리를 즐겼다. 정확히는 전화 오는 소리를 무시하는 행위를 즐겼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가 알았던 친구들은 모두 직장에 가서 유세를 떨었지만, 정작 전화 한 통도 제대로 끊지 못하고 고객에게 목소리를 바꿔가며 응대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전화를 무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표 이사니까!


뚜루루루 - 뚝.

전화는 금세 끊어졌다. 하지만 그가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며 사색에 잠기기 전, 바깥 복도에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문이 열리고, 오피스룩 차림의 여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저, 대표님. 급한 연락이 왔는데......”

“메모 남겨놔.”


여인은 금방 문을 닫고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평소에 조금이라도 행동을 빠릿하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댔던 터라, 박 대표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서 여인을 노려봤다.


“쉬고 있는 거 안 보여?”

“아, 그. KTN 이용호 기자님이신데, 사장님께 급하게 전해드릴 얘기가 있다고 하셔서......”

“하...... 이 새키가 또 냄새를 맡았나. 밥 얻어먹고 싶으면 기다리라고 그래.”

“그게 아니라, 아주 긴급한 건이라고, 핸드폰을 켜달라고 말씀하셨어요.”

“말씀? 내가 대표지 이용호가 대표야? 어?”

“아, 죄송합니다. 그...... 핸드폰으로 연락하실 거라고, 계속 전화 걸테니 핸드폰 켜달라고 하셔서......”

“됐어, 나가봐!”

“네!”


곧장 문이 닫히고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교육을 해도 한심할까, 그렇게 욕을 먹고 소리를 질렀는데도 멍청할까. 그가 그런데도 그녀를 비서로 두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그녀의 외모가 그의 취향이었다. 둘째, 뭐라고 말을 해도 혼자 삭힐 뿐 대들거나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다. 셋째로, 억지로 퇴직을 권유하거나 자르기라도 하면 실업급여니 뭐니 오히려 드는 비용이 더 많았다.


박대표는 계산기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핸드폰을 켰다. 그래, 늘 이 호기심에 지지. 평소에도 이 기자라는 양반에게 급하다고 연락이 와서 받아보면, ‘너네 누구가 이번에 행사 큰 데서 했다며? 밥 사~’ 라든지, ‘너네 소속에 누가 이번에 반응 좋던데? 밥 사~’ 정도의 연락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시작했으니 뭐라 말은 못하겠다만.’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기자들과의 관계는 이전 대표로부터 배운 노하우 중 하나였다. 적절히 관리하면 한 명의 기자가 수만 명의 팬들을 울고 웃길 수 있다는 것. 물론 그 방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변환한 건 박 대표 본인의 판단이었다. 기왕 관리하는 김에, 아예 맘에 드는 단어까지 골라서 쓸 수 있게 긴밀히 포섭을 해두자. 그래서 거기에도 비용이 꽤 많이 들었지.


우우우웅-


“뭐야?”


핸드폰이 켜지고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곧장 전화가 걸려왔다.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박대표는 얼결에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 여보쇼?”

[아 왜 전화를 이제 받아!!]


울컥. 이 새끼는 왜 받자마자 신경질이야?


“아이고, 이 기자 아닙니까. 이제 부장님인가?”

[기자고 부장이고 나발이고 형님 지금 큰일 났어.]

“뭔데, 뭔데 그렇게 속삭이는데? 무슨 냄새 맡았어?”

[그래. 형님 똥구멍에서 나는 냄새가 지금 여기 진동을 한다.]


두번째 울컥. 아니 이 새끼는 좋게 좋게 전화를 받아줘도 왜 지랄이야?


“진짜 별 일 아니면 앞으로 한 달동안 전화 안 받을 줄 알아.”

[지금 형, 전화가 문제가 아니야. 지금까지 막아왔던 게 전부 터지게 생겼다니까?]

“갑자기 무슨 소린데?”

[그, 그, 뭐야. 지금 형 비리 터뜨리겠다고 이 쪽 바닥에 소스가 다 뿌려졌어. 성접대, 연습생 학대, 폭행, 노예계약, 그리고 이번에 오디션 조작설도 형이 뒤에서 시켰다는 첩보가 지금 온데간데 다 퍼져있다니까!?]


벌떡.


박 대표는 계산기를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 격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 작게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전에 우리가 막아둔 거 있잖아, 왜. 형 그 애들 술자리 불러다가 같이 놀고 그런 거. 예전에 형 연습생 누가 신고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 때 그래서 걔가 모아뒀던 거 다......”

[그래 뺏었지. 형이 가져갔잖아. 근데 누가 지금 그걸 어디서 얻어가지고 다 뿌린 모양이야. 여기저기서 보도하려고 난리라고, 지금. 우리 회사 혼자 막겠다고 될 일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지금 그것만 그런 게 아니요, 형님.]


후우, 후우. 심호흡을 몇 번이고 했다. 살면서 이 정도 위기는 수십 번도 넘게 건너왔던 박 대표다, 고작 이런 일에 휘둘릴 것 없다. 그는 아무도 없는, 이제 완전히 어두컴컴해진 방 안에서 여유있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야, 이제 언론사들한테 연락돌리면 되지. 데스크 올리기 전에 잠깐 얘기 좀 하자고.”

[그게 힘들 것 같으니까 내가 전화를 했지, 이 양반아. 나도 지금 본인한테 먼저 확인하자고, 섣불리 냈다가는 오히려 역풍맞는다고 내 선에서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것도 오래 못 간다, 벌써 다른 데에서는 특종으로 내보내겠다고 검토 들어갔단다.]

“하, 나 씨. 증거가 어딨어, 그게? 내가 그 때 다 뺏어가지고......”

[뺏어가지고 어떻게 했는데?]


박대표의 말문이 막혔다. 사진들, 녹취록 파일들, 동영상 촬영본까지. 그 모든 것들은 그의 창고에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약점은 바로 없애는 것이 맞지만, 그건 약점이 아니라 무기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아마 걔가 더 가지고 있었나보지, 복사본이든 뭐가 됐든! 그리고 형, 지금 그것도 문제가 아니야.]

“뭐, 뭐가 또 있는데?”

[이번에 터진 오디션 프로그램 조작설 있잖아. 그거 지금 방송국에서 허위사실이다, 날조다, 누가 올렸는지 찾는다고 했잖아. 경찰에 신고도 했고 지금 수사 중인데, 이건 나만 들은 거야. 지금 경찰이 이미 형님이 뒤에서 말했다는 정황을 파악한 모양이더라고. 오늘 밤중에 갑자기 급습할 거라고.]

“야 이 미친...... 그게 증거가 어딨어? 그리고 그걸 왜 이제 말해줘?!”

[지금 듣자마자 말해준 거야! 형이 전화를 꺼놨잖아!! 그리고 내가 어떻게 알아, 경찰이 어련히 뭘 찾았나보지!]

“하......”


박 대표는 한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심장이 쿵쿵대고 정수리에서부터 열이 뻗치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전 맞춰입은 정장 셔츠가 유독 겨드랑이를 답답하게 조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다연. 이 쥐새끼 같으니, 그 때 녹음을 따로 안하는 건 다 확인 했었는데?


“일단, 일단 저 있잖아, 기사만 막아줘. 다른 데는 내가 막아볼테니까.”

[아니 지금 그게 한계라니까, 이 양반아.]

“야, 이 새끼야, 내가 그동안 너한테......!”

[아니 다른 데에서 벌써 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막아 그걸! 그리고 지금 그것보다도 경찰이 간다니까? 경찰이!]


또 다시 박 대표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일단 형, 그 증거가 될만한 것부터 잘 챙겨가지고 어떻게 숨기든지 버리든지 해봐. 보도는 내가 지금 막지는 못하겠는데, 적어도 수사는 무혐의로 끝나야하지 않겠어? 일단 이번 기사까지는 나가는 거라고 생각하라고. 나중에 무혐의 띄우고 후속보도로 커버치면 되잖아. 막말로, 형 지금까지 이런 논란 솔직히 한 두번도 아니었잖아. 사람들도 그러려니 할걸?]

“야 이 새끼야, 그거랑 이번 건이 똑같냐?”

[욕은 하지 말고. 이런 것도 다 증거가 될 수 있다니까. 난 할 말 했다, 어?]

“야! 내가 너 임마 지금까지 너한테 준 돈이 얼만데.....”


뚝.


“......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런 미친!!”


책상을 세게 내리치려다가 박 대표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어깨를 펴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게 한참동안 심호흡을 반복했다. 여전히 꽉 맞는 셔츠 때문에 겨드랑이가 답답했지만, 그는 몇 번 어깨와 목을 돌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다. 일단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막을 수 있는 걸 막으면 되는 거다. 차분하게. 그는 핸드폰을 들고, 기자라고 되어있는 폴더를 열어 가장 위쪽의 이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쿠, 박사장님.]

“아이고, 김부장님. 어떻게, 식사는 하셨습니까?”

[간만이네. 아니, 박사장님, 어쩐 일인교?]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아니나다를까, 아무래도 이용호 이 새끼가 많이 오버한 모양이다.


“아니, 좀 섬뜩한 소문이 들려와서 말입니다. 내가 뭐, 오디션 조작설을 퍼뜨렸다, 뭐 그런 얘기가 도는 모양이에요?”

[아하. 그런 소식이 있긴 합디다?]


박 대표는 잠시 벙쪘다. 이용호의 오버가 아니었구나. 있긴 하다고? 그게 이렇게 느긋하게 대꾸할 내용이야?


[아니 근데 뭐 요새..... 저희가 광고 들어오는 게 워낙 시원찮아서, 직원들 월급 주기도 빠듯하더라고요.]


이 새끼가......


물론 김부장은 그보다 나이도 많았다. 연예 기사로는 조회수를 심심치않게 벌어들이는 신문사라 꾸준하게 컨택은 넣고 있었는데, 이 시점에 곧바로 이렇게 요구를 해올 줄이야.


“제가 지금 새로 만든 그룹한테 투자하고 그러느라 현금이 없네요. 바로 넣어드리고 싶은데, 일단......”

[아이고, 내 착각했다. 사실 뭐 광고가 있으나 없으나 특종은 다른 데보다 빨리 내야지.]


박 대표는 전화기를 부숴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하지만 뭐라 더 대답하기도 전에,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니 그보다 괜찮겠어요?]

“뭐가요?”

[경찰이 거기 쳐들어간다는 첩보가 있던데.]


이거, 전화를 받은 이유가 이걸 확인하려고 그런 거구나. 박대표는 이를 갈면서, 최대한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건 저도 처음 듣습니다, 부장님.”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일단 우리도 먹고 살려면 보도는 해야하니까 이번에 빨리 내놓고, 나중에 광고 들어오는 거 봐서 후속보도로 박사장님 이미지 바로 잡아드리면 되겠네. 에이, 그리고 박사장님 내가 잘 아는데, 이 정도는 어련히 잘 헤쳐나오시겠지. 안 그래요?]

“안 그래, 이 새끼야!!”


뚝.


“이익......!”


핸드폰을 집어던지려다가 박 대표는 꾹 참았다. 아니다, 아직 아니다. 이 정도 위기는 아무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자. 기자들은 이미 손을 넘어갔다. 분하지만 일단 특종 경쟁에 들어간 상황에서는 아무리 웃돈을 줘도 막기가 힘들다. 기껏해야 세일그룹 정도 되는 대기업이라면 가능하겠지.


“하.......”


그렇게 기어올라왔는데 아직도 모자라다. 이제야 허리를 펴고 군림할 수 있는가 했는데, 연못에 뻐끔거리고 있는 금붕어들에게 밥을 던져주는 낚시꾼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자신은 그 금붕어들이 기를 쓰고 먹으려는 떡밥에 불과했다.


‘아직 아니지.’


그래, 아직은 아니다. 이 정도에 손 놓고 무너질 수는 없다. 그래도 자신이 지금까지 노력해온 덕에 미리 정보는 구할 수 있었던 거잖아? 경찰이 밤에 들이닥칠 것이고, 오늘 저녁 중에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가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행동은 명확했다.


“야, 밖에 있냐!”


또각, 또각, 또각, 덜컥.


“네, 대표님.”

“아니, 급하게 불렀으면 뛰는 시늉이라도 하든가. 그렇게 느긋하게 다닐래, 어?”

“네? 아, 죄, 죄송.......”

“너 일단 가서 현석이 좀 불러와. 비상이라고, 곧바로 좀 오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사 안에 있는 컴퓨터들 지금부터 싹 다 포맷 한 번씩 해라.”

“네? 갑자기요?”

“하라면 좀 그냥 해라, 어?! 아, 아니다. 그냥 하드를 새로 사와서 전부 바꾸고, 전에 쓰던 건 다 파기해.”

“근데 지금까지 쓰던 파일이나 인수인계 자료들이......”


그 쯤되자 박 대표는 다시 한 번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백업 해둘 건 해두고 치우면 되잖아! 그걸 내가 일일이 설명 해줘야해!?”

“아, 네! 알겠습니다. 현석씨부터 바로 불러 오겠습니다.”


여인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진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정장차림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키는 농구나 배구를 한 것처럼 훤칠했고, 어깨도 양쪽으로 벌어진 것이 무제한 체급의 격투기 선수를 방불케 하는 거구의 사내였다.


“현석아, 비상이다. 잘 들어봐.”


그렇게 시작된 박 대표의 상황 설명을, 현석은 두 손을 양 옆에 둔 가지런한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짧게 올려친 머리 덕분에 경호원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매서운 눈초리로 박 대표의 말을 듣는 눈빛에서는 책사의 카리스마가 엿보이기도 하는 입체적인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한참동안 박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텅 빈 방을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일단 본사에 컴퓨터들은 전부 포맷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네. 오히려 증거 인멸 시도한다고 차후에 더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니 그대로 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대표님 컴퓨터는 통째로 다른 증거들과 함께 ‘창고’로 옮겨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통째로? 하드만 떼면 되는 거 아니야?”

“하드를 바꿔도 기록이 남을 겁니다. 아예 이 자리에는 컴퓨터가 없었던 것으로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그건 조치해두겠습니다."


박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현석은 계속 말을 이었다.


“대표님께서는 다른 자료들과 함께 일단 ‘창고’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차는 지금 바로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래. 일단 거기에도 보관해둔 자료가 있으니까.”

“네, 일단 PC는 통째로 가져갈테니, 그 외에 보관하신 자료가 있다면 전부 챙겨서 이동하시죠.”

“그래. 일단 나도 좀 찾아보고, 5분 안에 내려갈테니까 준비해놔.”

“네. 지금 곧바로 준비해두겠습니다.”




박 대표는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자신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이 곳은 일종의 공장이었다. 박대표가 사들이기 전까지는 그랬지. 지금은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자들의 숙소이자, 박 대표의 중요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 그만의 아지트였다. 그의 모든 더러운 과거가 숨겨진 곳. 여러 기기가 가동되고 있어야 할 1층의 홀에는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려온 전등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한쪽 벽의 끄트머리에는 철골로 대충 지어진 계단과 그 위에는 작은 사무실 하나가 붙어있을 뿐이었다.


“오셨습니까.”


흰셔츠와 남색 정장, 넥타이까지 말쑥하게 갖춰입은 거구의 남자들 몇 명이 걸어나와 그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나같이 굉장한 체구의 남자들이 깔끔하게 정장을 갖춰입으니 잠입한 특수부대 같기도 했다. 그 남자들 사이를 뚫고 걸어나와 인사를 건넨 건, 어울리지 않게 홀로 왜소한 체구의 남자였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일이 좀 있다.”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에 정렬해있는 정장차림의 남자들에게 두 번정도 손짓했다. 그러자 마치 상황별 직무를 정해놓기라도 한듯, 정장차림의 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는 들키면 안 된다고, 올해 중에는 오실 일 없다고 하셨었는데.”

“급한 일이야. 여기 사무실에 있는 자료 싹 다 어디로 좀 옮겨놔야겠다.”


박 대표와 현석, 그리고 체크무늬 정장 차림의 왜소한 남자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 옆으로 몇 명의 정장차림의 남자들이 더 스쳐가는 사이, 그들은 공장 내부의 커다란 홀로 들어가고 있었다.


“형님, 그런데 거기 있는 자료들은 절대 빼면 안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형님께서 혹시나 안 좋은 일 당하면 꺼낼 마지막 보루라고 하셨었는데. 혹시 지금......”

“그런 것 같다.”

“얼마나 큰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형님도 여긴 경찰도 못 찾을 거라고 하셨었는데.”

“어, 이제 알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 남자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동시에 세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홱 돌았다. 초대 받지 않은 새로운 목소리!


“넌 뭐야?”


현석이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나타난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들이 방금 걸어왔던 공장의 홀 가운데에 서있었다. 검은 코트에 검은 신발, 검은 바지에 검은 니트.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 남자는, 심지어 눈만 뚫려있는 검은색 안면 보호대로 얼굴의 위 쪽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너 뭐하는 새끼야?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박 대표는 현석의 뒤에서 짝다리를 짚으며 물었다. 새로 등장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 잔뼈가 굵은 박 대표가 듣기에는 묘하게 떨리는 기색도 느껴졌다.


“그냥 문이 열려있던데요, 뭐.”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 고개를 들고 그들을 빤히 쳐다봤다. 키는 170이 조금 넘을까, 호리호리한 몸까지, 목소리도 체구도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은 남자였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박 대표는 곧바로 등 뒤에 서 있는 왜소한 남자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는 곧바로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소리로 박수를 세 번 쳤다.


드르륵- 콰아앙!


사방에서 열려있던 공장문이 닫혔다. 공장 홀은 순식간에 암흑에 빠졌다. 남은 건 천장에 아슬하게 매달린 백열등 같은 전구들 몇 개 뿐. 마스크를 쓴 남자는 당황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고, 그 사이 현석은 그 남자에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너 뭐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마스크를 쓴 남자는 몇 번 숨을 고르더니 곧바로 박대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디션 조작이라는 허위사실 유포 조장, 성접대에 연습생 학대, 노예계약에 언론 조작까지. 전부 본인이 저지른 거 맞죠?”

“뭐 이 새끼야?”

“지금 딱 기회를 한 번 드릴게요.”


남자는 현석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사과하세요. 피해자들한테.”


박 대표의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쓴 남자가 다그치는 것들은 아까 기자들이 언급했던 내용과 통하고 있었다. 이건 그가 지금까지 기자들에게 들은 위협이 실존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신중해야했다. 지금 여기서 인정해버리면 끝이다. 적당히 간을 보고, 덮을 수 있으면 재빠르게 덮어야한다. 댓가가 필요하다면 지불하면 된다.


“지금 말하는 거 나는 하나도 모르겠고, 나는 그런 거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사무실이 2층이죠?”

“그건 어떻게......”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박 대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남자를 쏘아봤다. 하지만 그 둘이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마스크를 쓴 남자는 코트에서 여유있게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제가 방금 다녀왔거든요.”

“뭐?”

“필요한 건 대충 찍어 뒀습니다.”


남자가 핸드폰 화면을 넘기면서 보여주는 건 사진들이었다. 사진들, 장부들, 그동안 꿍쳐뒀던 온갖 증거물들.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보기에도 명확했다.


“하......”


박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마스크 쓴 남자에게도 들리도록 한탄했다.


“하, 저런 새끼들까지 난리치는 걸 보니까 뭐가 퍼지긴 했나보네. 아니 뭐, 너 뭐하는 놈인데? 유튜브하냐?”

“아뇨, 고민은 해봤는데 저랑 안 맞아서요.”

“그런데 어떡하려고? 그거 찍어서. 뭐 어디 신고라도 하게?”

“아뇨, 아직 못 찍은 게 있거든요.”


마스크를 쓴 남자는 갑자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이제 현석과는 불과 몇 걸음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 박대표와는 십여미터는 떨어진 거리. 공장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전등들 아래에서, 남자는 핸드폰을 들어올려서 박 대표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박 대표님 사과 영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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