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결단

by 봄단풍


아라의 말대로였다. 처음 만났던 한남대교 한복판에서, 다연은 난간에 기대어 가만히 서 있었다. 발끝자락에 닿는 길고 하얀 치마와 하얀 니트는 11월 말에 입기에는 아무래도 추워보였지만, 그녀는 조금도 떨고 있지 않았다.


“아저씨.”


몇 미터 떨어진 곳으로 순간이동했다. 다연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날 그렇게 불렀다. 꼭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난간에 기댄 채 나를 쳐다보는 다연에게서는, 지금까지 내게 보여줬던 소심한 모습이나 절실한 모습, 울먹거리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뉴스 봤어요?”


수상했다. 확 바뀐 그녀의 태도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도. 나는 안면 보호대 안에서 눈만 이리저리 돌리면서 혹시 주위에 수상한 기색이 있는지 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다리 위에 서 있는 건 사람은 나와 다연 둘 뿐이었다.


“끝났어요, 나는. 뭐, 궁금한 거 있어요?”


뉴스가 나간 이후 꾸준하게 날 괴롭히던 걱정. 그건 방송국의 조치에서 기인한 것이다. 예상에서 아예 궤가 빗나가는 대처들, 믿고 있던 사실과 뒤집히는 조사 결과들. 몇 가지 사실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한 뒤,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조작은 없었던 거지?”

“아저씨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요.”


다연은 담담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울고 불고 난리를 치고,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했다던 사람의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증거가 없지 않냐고 되물었을 때 확실하다며 소리를 지르고, 그게 없으면 죽지는 않겠다고 절실하게 매달리던 사람이, ‘애초에 조작은 없었지?’ 라는 물음에 저리도 담담할 수 있는 건가?


“나도 잘 몰라요.”

“모른다고?”


다연은 씩 웃었다. 지난 번 평가표를 받고 겨우 웃어보였던, 희망에 가득찼던 미소와는 분명 달랐다. 똑같이 뽀얗고 예쁜 피부에, 오히려 그 때처럼 운 자국도 없고 눈이 퉁퉁 붓지도 않았는데도, 지금의 미소는 아름답기보다 장난기 가득한 악동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에서 확신했다. 이다연은 처음부터 날 이용한 거다.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어?”

“모르는 걸 어떡해요?”


그리고 어깨를 한 번 으쓱. 정말로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에 머리가 잠깐 띵했다. 그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만 나는 한 번 더 주위를 살폈다. 이건 일부러 화를 돋우려는 거다. 아무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이 여자가 나를 괜히 도발을 할 이유는 없다. 어디서 몰래 녹화하거나 주머니 속에서 내 목소리를 녹음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설명해.”


다연은 귀찮다는 듯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서 똑바로 섰다.


“별 거 없어요. 그냥 걔네 잘 나가는 게 부러워서. 아저씨가 가져다 준 평가표 날짜별로 점수만 바꿔치기해서 인터넷에 올려봤어요. 어차피 대쪽같은 증거가 있는 것보다, 이런저런 정황 여러가지 있는 게 소문내기는 편하니까. 그러니까, 나도 몰라요. 진짜 조작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일단 제가 올린 평가표는 조작이긴 했죠.”


그러더니, 그녀는 혼자 쿡쿡 웃었다. 마치 그게 많은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처음부터 이용할 작정이었어?”

“아뇨.”


다연은 슬쩍 나를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사실 그 때는 진짜 죽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짠. 갑자기 아저씨가 나타난 거에요. 마침 받아놓은 제안도 있었겠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더라고요.”

“그렇다는 건......”

“네. 아저씨 만난 다음에 머리 좀 굴려봤어요.”


다연은 싱긋 웃었다. 허공에 대고 웃는 그 얼굴에 복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터지려는 속을 애써 부여잡고 이를 다시 악물었다.


“연기 잘하더라. 아이돌하지말고 배우를 하지 그래?”

“칭찬 감사합니다.”

“왜 그랬어?”

“뭐를요?”

“너 때문에 멀쩡한 아이들이 조작돌이라는 오명을 썼어. 그 가족들과 팬들도 며칠 내내 잠을 설쳤겠지, 그리고 ......”

“걔네는 회사가 해명해주고 있잖아요?”


이를 앙다물었다가, 일부러 입을 벌리고 턱근육을 풀었다.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누명을 벗어도 오명은 오래가.”


나는 다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다시 느긋하게 난간에 등을 대고 기대서서는, 두 팔을 난간 위에 올려놓고 팔자 좋게 늘어졌다. 꼭 일광욕을 하는 사람처럼. 자꾸 터져나오려는 욕을 참으면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약속을 했었어요.”

“뭐?”

“약속을 했었다고요. 데뷔시켜주기로.”


여전히 늘어진 자세로, 다만 표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연은 그렇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약속한 건 하나였어요. 성공만하면 데뷔시켜주겠다.”

“그 사람이 누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다연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데뷔를 시켜주긴 했다는 게 중요하죠. 딱 나만 빼고.”

“그래서 어쩌라고? 너도 피해자라는 거야?”

“아저씨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고요.”


몇 걸음 다연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다시 난간에 눕듯이 기댄 채로 눈 앞의 허공을 응시하듯 초점없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태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에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었다.


“왜 그랬어?”

“말했잖아요. 연습생말고 연예인하고 싶어서 그랬다니까.”

“그래서 날 이용한 거야? 네가 데뷔하고 싶어서, 멀쩡하게 오디션에 합격한 애들한테 조작돌이라는 누명을 씌운 거야?”

“넵.”


다연은 허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대답하고 입을 앙다물었다.


머리가 돌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심장이 쿵쿵거리고, 기분으로는 체온이 40도는 훌쩍 넘길 것 같은 기분. 손발이 뜨거워지고, 주파수를 잘못 맞춘 라디오처럼 귀에서는 이명이 맴돌았다. 당장 입을 열면 욕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한참동안 숨을 고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도와준 이유는 하나였어.”

“제가 불쌍하니까죠, 뭐.”

“그 과정이 잘못됐으니까!”


다연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버럭했지만, 정작 그녀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불쌍하다고 도와줄 거였으면 홈페이지 열어놓고 익명게시판을 만들었겠지, 자기 썰 풀고 감성파는 사람들 줄 세워놓고 도와줬겠지, 안 그래?”


그제야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다연이 나를 흘끗 쳐다봤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밑으로 떨궜다.


“그 오디션이 잘못됐다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도와줬다고. 너 뿐만 아니라 인생 걸고 절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 마음가지고 장난친 게 너무 분하니까. 그리고 그 불공정한 과정으로 뽑아놓은 사람들로 활동하면서, 자기들끼리 실력있으니 됐다, 팬들이 많은데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속으로 자위하고 있을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 그래서 도와준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잖아?”


다연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꼭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듣고 있는 학생처럼, 그녀는 난간에 기대선 채 몸을 자꾸만 뒤척거렸다.


“미안하기는 하냐? 그 애들한테?”

“내가 왜요?”


처음 만난 날 한참 울고 겨우 꺼낸 목소리처럼, 어느새 다연의 목소리는 무겁게 잠겨있었다.


“왜? 왜라는 말이 나와, 지금?”

“걔네는 팬도 많고 앞으로도 창창해요. 망한 건 나라고요.”

“그럼 된 거야?”


이를 악물었다. 정말로 화가 나는 건, 이 여자는 뼛속부터 글러먹은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점점 움츠러드는 태도만 봐도 뭐가 잘못됐고 뭐가 나쁜 건지 명백히 아는 사람이라는 건데, 알면서도 괜찮은 척 버티고 있는 거다. 다그치는 것만으로도 주눅들거면서, 처음부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뻔히 알면서!


“그냥 불쌍해지고 싶은 거야?”


다연은 얼굴을 홱 돌려서 나를 쳐다봤다. 처음 보는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째려봤다.


“다른 사람을 억지로 까내렸지만 실패했으니 결국 네가 불쌍하다는 거야?”

“어차피 걔네는, 어차피 걔네는......”

“닥쳐. 진실이 밝혀진다고 다 끝나는 줄 알아? 너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는데 어쩌라고요!”


다연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처음의 그 유약하고 소심하면서 인생의 끈을 간신히 잡고 있던 얼굴도, 아까전처럼 세상의 고통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악동의 개구진 표정도 아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얼굴을 잔뜩 구긴, 분노에 가득찬 얼굴.


“공정한 과정이 어쩌고,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고, 누가 부당한 이득을 얻었고. 그게 뭐가 중요한데요? 일단 내가 잘 되고 보는 게 먼저 아니에요? 내 인생 망하게 생겼는데 과정이고 결과고 공정하고 불공정하고 그게 눈에 보일 것 같아요? 당장 내가 인생 망치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생겼는데 무슨 상관이냐고요?”


맞서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입을 멈췄다. 이제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다연의 얼굴은 여전히 분노로 잔뜩 구겨져있었지만,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눈물이 한움큼씩 떨어지고 있었다.


“아저씨가 알아요? 매일같이 연습실에 나가는데 성과는 없고, 사장님은 데뷔시켜줄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곳에 가자니 이 바닥 좁다면서 협박하고, 하다못해 그만두고 싶다고 해도 위약금 얘기하면서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데......! 그래, 나 빼고 데뷔시켰으니까 약속을 어긴거잖아요. 근데 그래도, 겨우 데뷔한 다른 언니들한테 미안해서 따지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다른 소속사 애들은 피해를 입어도 괜찮고, 네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미안하고?”

“네! 그게 뭐 어때서요! 그게 세상이에요, 내가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 까내리기도 해야죠! 아저씨는 좋겠네요, 그럴 일 없이 편하게 살아서!”


다연은 이제 더이상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이제 눈물이 반. 그녀는 계속 엉엉 울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막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면서 겨우 말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많이 알아서, 그렇게 많이 신경쓸 수 있어서 좋겠네요, 아저씨는!”


왜 하필 최무혁씨의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그 때 그 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과정이 어떻고 결과가 어떻고 알게 뭐야?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다연은 니트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몸을 돌렸다. 난간에 기댄 채 한강쪽을 바라보며 한참을 숨을 고르더니, 그녀는 곧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제 좋을대로 해요. 경찰에 절 넘기든지. 어차피 저한테 찾아와서 떠 볼거였으면 녹음기 정도는 켜놨을 거 아니에요? 악당은 밝혀졌잖아요. 범인은 나고, 자백도 있어요. 아저씨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아저씨가 안하면 내일 안에 잡힐 거고, 그 전에 난 여기서 죽어버릴 거니까.”


다연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눈을 감았다.

정말 이걸로 끝인가?


맞지. 증거는 충분하다. 다연은 날 속여서 이용했다. 평가표를 조작해서 공론화한 것도, 처음부터 조작이 없었던 걸 알면서도 허위 사실을 만들어낸 것도 모두 그녀의 잘못은 맞다. 협박 때문이었다고는 했지만 나를 꼬드긴 것도 잘못이지.


하지만 결국 훔친 건 나잖아.

그래, 이 똥을 싼 건 처음부터 나다. 다연에게 모른 척 하지 말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애초에 내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일이다. 세일그룹이 뒤에서 막아줬을 뿐 결국 내가 다연에게 하는 말은 똑같이 내게도 할 수 있었다.


“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공정한 과정을 운운하면서 다그쳤는데, 애초에 내가 그 불공정한 힘으로 살아남는 셈이었다.


다연은 아직도 눈을 감고 난간에 기대서 울고 있었다. 겨우 숨도 고르고 눈물도 닦고 있는 모양이지만, 마음은 쉽게 추스를 수 없겠지. 체포해라, 아니면 자살할 거다.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자기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은 채, 그녀는 그렇게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뭐가 맞는 거지?

다연은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나는 멀쩡히 살아가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죽든 살든 다연이 알아서하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되는 건가?


“......”


아니.

둘 다 아니다.


다만 확실하게 마음을 결정하기 전에, 문득 불편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약속을 했었다’. 분명 다연은 그렇게 말했었다.


“누가 시켰어?”

“누가 시킨 게 아니에요. 좋은 제안이 있었고 내가 응한 것 뿐이지.”

“그리고 그 사람은 그걸 안 지켰지. 말해. 누구야?”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인데요! 제발,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날 어떻게 할지나 결정해요.”


다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자, 이제 아저씨 마음대로 해요. 분풀이로 죽이셔도 되고, 경찰에 넘기셔도 돼요. 어차피 아무 것도 안 하시면 난 죽을 거에요, 여기서.”


너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싸울 생각이었다면 자살을 선택하지도 않았겠지. 아니, 어디서부터 연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끝까지 살아남고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겨우 데뷔한 다른 언니들한테 미안해서’.


그러니까 혼자 떠안고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 거지. 너도, 네가 싼 똥을 네 나름대로 치우려는 거지.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이 똥을 싼 건 나다. 그리고 똥은 싼 사람이 치워야지.


“둘 다 아니야.”

“......네?”

“너 똑바로 들어.”


다연에게 성큼 성큼 걸어가서 한 쪽 팔을 붙잡고 난간에서 떼어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는 사이, 나는 그녀를 인도로 밀쳐낸 뒤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지금 널 어떻게 안 하는 건 네가 불쌍해서가 아냐. 그렇다고 네가 잘한 것도 아니야. 죽고 싶다고 했지만, 정말 너에게 남아있던 길이 그거 하나였던 거에도 동의 못 해. 네가 힘든 걸로 네가 저지른 짓을 합리화하려고 하지는 마. 뭐가 됐든 그건 범죄야.”

“그.....!”

“닥쳐봐, 좀!”


다연의 눈이 커지면서 동시에 입이 멈췄다. 하지만 분명 잠깐 뒤 곧바로 뭐라고 쏘아붙일 것 같은 표정이었던 터라, 나는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넌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해. 그 다음에 네가 죽든, 자수해서 잡혀들어가든 상관 안해, 나는. 대신에!”


자꾸만 끼어들려는 다연의 앞에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제지시키고, 나는 다시 차분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내일. 내일까지만 기다려.”

“......”

“뭘 하든 상관없는데, 내일까지만 기다렸다가 하라고. 알았어?”

“아저씨가 뭔데......”

“내가 뭐냐고?”


다연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네가 지금 나한테 그 말을 할 수 있냐? 어?”


어깨를 움츠리고 나를 올려다보던 다연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잠시동안 몇 번 숨을 고르다가, 보호대가 눈과 코를 잘 덮고 있는지 확인한 뒤 다시 다연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들이댔다.


“딱 내일이야. 알았어?”


팔짱을 끼고 먼 곳을 쳐다보던 그녀는 곧 내게로 다시 눈을 돌린 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한남대교 끄트머리로 순간이동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순간이동해서 어떤 높은 빌딩의 사람없는 한적한 옥상까지 순간이동을 한 뒤, 나는 멀리 보이는 하얀 옷의 다연을 보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연결: 김아라]


통화를 누르려다가 손을 멈췄다. ‘돌아오면 꼭 연락해.’ 그래, 돌아오면. 지금 내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려는 건데 또 아라한테 의존하면 그게 제대로 된 수습이겠어?


곧장 통화를 멈추고, 검색창을 열었다.


[검색어: 이다연]

[검색 결과: 대국민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 / 연습생(LSP) / 최종 탈락]


LSP. 현재 이다연의 공식적인 소속사. 다연에게 데뷔와 관련한 약속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현재 소속사일 것이다.


‘아니지, 아닐 수도 있지.’


[검색어: LSP]

[뉴스: LSP의 신예 아이돌 그룹 ‘럭스’ 데뷔.... (1일전)]


어제? 어제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켰다고?


[검색어: 럭스]

[럭스(단위)]

[럭스(게임 캐릭터)]

[기타 항목: 뉴스]


[LSP의 신인 아이돌, ‘럭스’가 어제 첫 데뷔 쇼케이스를 가졌다. 본래 그룹 데뷔에는 사전 예고를 통해 팬들의 기대를 부풀게 한 뒤 쇼케이스와 무대를 거치는 것이 정석적이나, LSP 박만기 대표 이사는, 단 한 번의 예고와 티저 영상 없이 곧바로 럭스를 데뷔시켰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죠. 무대를 보는 순간 빠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과연 박 대표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럭스’는 빛의 조도를 뜻하는 단위이기도 하지만, 럭키 세븐 스타즈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멤버 일곱 명 전원은 작년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그건 실패가 아닌 소중한 경험, 즉 행운으로 삼겠다는 자세로 뭉친 것이다. 그래서 행운의 상징인 럭키 세븐을 이름에 넣고, 스타가 되겠다는 포부를 스타로 담아내어 럭키세븐스타즈, 이를 다시 줄여서 럭스.]


잠깐. 그러니까 정리해보자고.


이다연의 소속사인 LSP에서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조작 의혹이 불거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킨 것이다. 문제는 그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 그 오디션 프로그램의 탈락자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럴 수 있지.’


흐름을 만들기보다 시류에 편승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거둘 수 있는 법이다. 이런 판단은 어떤 회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이면서 ‘예고 없이’ 데뷔를 했다는 것이, 어째 ‘급하게’ 데뷔를 시켰다는 것으로 읽혔다.


대충 그림은 그려진다. 다만, 속단할 수는 없다. 문제는 시간도 부족하다. 확실하게 알아보는 건 당사자에게 부딪혀보는 것 뿐이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의 타자를 한 번 더 두드렸다.


[검색어: 럭스 스케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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