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렇게 자꾸 혼자 궁리하는 건데, 응?”
집에 돌아와서도 발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 천만다행으로 방송사에게 고소는 당하지 않을 거라고 쳐. 좋아, 아주 해피엔딩이지.
정말 끝인가? 그게 다야?
“끝난 일이야. 우수하, 더 신경쓰지 마.”
소파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던 아라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거실을 서성이는 동안, 그녀는 계속 그렇게 앉아서 눈으로만 내 움직임을 좇고 있었다.
“끝, 끝. 끝이라고. 제발 좀! 이제 그 여자가 진실을 밝히든, 아니면 회사가 알아서 처신을 하든 너랑은 상관 없다고, 이제. 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유일한 리스크는 네가 훔쳤다는 게 들키는 건데, 그건 세일그룹에서 막아준다고 했잖아?”
“......”
하지만 여전히 방송국의 대응이 마음에 걸렸다.
“너 혹시 괜히 회사 반응 살피면서 뭐가 맞나 재보고 있는 거면......”
“아니야, 그런거.”
귀신이다, 귀신. 아라는 소파에 앉은 채 무서운 얼굴로 나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관 둬. 대기업의 의사결정을 네가 머리 굴린다고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고민하지마, 시간 낭비니까.”
“나도 알아, 그건. 그냥......”
찝찝한 구석이 있어서 논리의 흐름을 다시 짚어보는 것 뿐이야, 라고 대답하려다가 발이 멈췄다.
정말로 청탁이 있었다고 치자. 소속 연습생을 띄우고 싶은 마음에, 몇 개의 소속사가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사에게 돈을 주고 점수를 조작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쳐. 그렇다면 애초에 심사평가표 원본이 있을 필요가 없다. 평가를 하는 시점에 유리하게 점수를 남겨 놓으면 된다. 청탁의 증거는 남지 않고, 평가에 대한 불만만 남을 뿐.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다연의 말에 따르면 분명이 원본이 있고, 이는 나중에 부정 청탁의 근거가 되니 반드시 보관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두번째 경우로 넘어가자. 모든 평가가 끝난 다음에, 생방송이 시작되기 직전에 청탁이 들어갔다면? 그렇다면 전체 평가표와 실제 발표 결과가 다를 수 있겠지.
그 다음. 그렇게 원하는 댓가를 받고 미리 점찍어둔 연습생을 데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서 일년 동안 열심히 활동했고 이제 계약에 따라 해체한 뒤 각자의 소속사로 돌아가면 되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누군가 평가표 원본을 확보했다면서 이를 공론화한다. 그렇다면, 이 때 상식적으로 해야 할 일은 뭐지?
“...... 우수하.”
“왜?”
“나 지금 너 세 번 불렀어. 알아?”
발을 멈추고 아라를 돌아봤다. 그녀의 자세도, 표정에도 조금도 변화는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는 매서운 눈초리까지.
“어...... 미안.”
“코트는 안 벗을 거야?”
“코트?”
그러고보니 나는 아직도 밖에 나갔던 옷차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 어깨를 빼면서 코트를 반쯤 벗으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
잠깐만. 그러고보니 확실하게 확인하려면......
“야!”
“!!”
깜짝 놀란 나머지 몸이 그대로 굳었다. 어느새 앉아있던 아라는 내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와서 서있었다.
“그만. 생각 그만해.”
아라의 얼굴이 불과 한뼘도 되지 않는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평소에는 잘 쳐다보지도 못했던 눈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나는 코트에서 한 쪽 어깨만 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오늘은 일단 쉬어. 잊어버리라고.”
아라는 넥타이를 매줬을 때처럼 내 코 앞에 서서 두 손으로 내 코트 깃을 붙잡았다. 멱살이라도 잡은 것처럼 잡고 잠시 무게를 싣던 그녀는, 이내 내 왼쪽 어깨에 걸쳐진 코트를 벗겨냈다.
“먼저 씻고 와, 얼른. 그만 생각해.”
멍한 눈으로 코트를 벗었다. 아라는 아무렇지 않게 그 코트를 식탁 의자에 던져놓고는, 두 손바닥으로 내 양쪽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까먹는다, 까먹는다, 까먹는다.......”
“아, 아! 야, 아파, 어?!”
“까먹어라, 까먹어라.......”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야!”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나는 힘겹게 아라의 두 팔을 떼어내려다가, 결국 양 손목을 붙잡고 겨우 좌우로 벌렸다.
“아오, 그만....!”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라의 몸이 내 품으로 부딪쳐왔다.
“!!”
“.....!”
아주 잠깐. 아라가 내 품에 들어온 건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느낌만은 선명했다.
따뜻했다.
머리카락, 향기, 숨소리, 혹은 목 근처에 가볍게 닿고 지나간 숨결, 찰나의 순간 느껴진 건 많았지만 여운이 오래도록 남은 건 그 하나뿐이었다.
따뜻했다.
“......”
“......”
그렇게 엉겁결에 몸을 맞대고 있던 것이 몇 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뉴스채널의 코너가 바뀌는 시그널 음악이 재생됐고, 그 소리를 기점으로 나와 아라는 후다닥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 최근 사고현장마다 나타나서 사람을 구해주고 사라지는 남자에 대한 논의가 뜨겁습니다. 이전에 몇 번이나 그렇게 사람을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상 기록이 남은 건은 총 세 번. 그리고 그 세 번 동안, 오십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며칠 전 도심 호텔 화재사건에 마지막으로 나타나서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구조한 이 남자에게, 마침내 누리꾼들이 ‘블링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하는데요. 오늘의 미디어 포커스는, 바로 이 ‘블링크’ 입니다.]
“오, 너 이름도 생겼다.”
“촌스럽게 이름은 무슨.”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남자. 영상에 나타난 이 남자는, 잠시 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집니다. 대신 호텔의 발코니에 나타나는데요. 창가에 매달린 사람의 팔을 잡은 그는 다시 또 사라졌나 싶더니, 이제는 건물 아래쪽에서 나타납니다.]
[네.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과 영상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검은 옷의 남자는 눈 깜빡할 사이에 여기저기서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순간이동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 이 순간이동을 어떻게하는지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이 남자가 어떻게 사람들을 구조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겠군요?]
[네.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과학기술인지, 아니면 초능력인지에 대한 의견이 있습니다만, 이 영상에 보여준 모습이 워낙 비과학적이라 착시현상으로 생각하는 의견도 많습니다. 또한, 직접 이 사건을 목격하지 못한 누리꾼들은 이 화재사건 자체가 애초에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활동에 대해서 누리꾼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대다수의 경우 영웅이 나타났다면서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현장에서 오히려 구조 활동을 지연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먼저 인터뷰 영상을 보시죠.]
기자와 앵커의 대화가 끝난 뒤, 화면은 인터뷰 영상으로 돌아갔다. 누가봐도 분칠과 화장이 과한 한 아주머니 한 분이 병원 응급실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카메라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채 말을 시작했다.
[아니, 저희 딸을 구해준 건 고마운데....... 현장에서 구조대원 분들이 힘 많이 써주셨었거든요. 119 아저씨들이 안전하게 꺼내주시고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대충 자기가 안고 막 나타나니까 지금 애가 의식도 없고......]
[따님은 지금 괜찮으신가요?]
[아뇨, 모르죠... 지금도 계속 의식이 없고, 정말 저는 119 분들이 그냥 구해주셨으면 되는 일을 왜 나서서 그랬나..... 안 그랬으면 우리 애가 지금 멀쩡하게.....]
“아니, 저 아줌마는......!”
분명 아까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던 그 사람이었다. 다 무너져가는 건물에서 겨우 애를 구해다줬더니, 이제와서 뭐라고?
“수하야.”
“아니, 야! 저거......”
“이거 말한 거야.”
아라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사람을 구하기만해도 논란이 되는 세상이라고. 네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이제 대충 알겠어?”
“하지만......!”
“세일그룹에서 막아준다고 했으니까, 이제 잊어버리고 푹 쉬어. 그만 생각하고.”
아라의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들어왔다.
“사람들에게는 때로, 진실보다도 중요한 게 있는 법이야.”
그 말을 끝으로 아라는 평소처럼 할머니를 부르면서 달려나갔고, 나는 뒤에 어색하게 남아서 들어오셨냐 인사를 건넸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할머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수다를 떠는 아라와, 멀찍이 떨어져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 나.
그 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네고 내 방에 와서 혼자 문을 닫고 이불을 덮고, 멀뚱히 뜬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잠에 들었다. 왜 항상 고민할 것들은 한 번에 오는 것인지.
그 다음 며칠간은 여러모로 시끌벅적했다. 인터넷에서도 TV에서도,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방송국의 수상한 정황들을 하루에도 수십 개씩 풀어냈다. 정확한 증거는 인터넷에 올라온 심사평가표의 캡쳐본 뿐이었지만, 그 외에 오디션 참가자들이 불편해 했을 정황,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PD의 과거 SNS 업로드 사진, 정치적 성향, 종교관까지 풀어헤쳐가며 조작의 가능성을 다들 부풀리기 바빴다.
그건 치열한 전쟁이었다. 매일 새로운 정황과 추측들이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오면, 그 자료들은 다시 다른 커뮤니티로 넘어가면서 끊임없이 재생산이 됐다. 그러고나면 불과 몇 분만에 해당 방송국은 공식 발표를 통해 그 반박자료를 내놨고, 그럼 또 다른 새로운 정황이 누리꾼들에 의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러면 또 다시 반박자료가 뜨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대중의 입장도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방송사에서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는 말이 나온 이후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떨어졌던 다른 연습생들의 ‘조작은 없었다’ 증언이 이어졌고, 그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베테랑 가수나 제작자들의 방송국 지지 선언도 점점 늘어났다. 여전히 해당 그룹에는 조작돌이라는 오명이 씌워져 있었지만, 워낙 방송국에서도 강경하게 조치를 하다보니 나서서 규탄하거나 고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요새는 어디 안 나가니?”
“네. 나갈 일이 없어요.”
대충 라면을 끓여먹고 방에 들어오면서 나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방에서 핸드폰으로 뉴스나 커뮤니티 반응은 살피긴 했지만 사실 그 뿐이었다. 아라의 말대로 잊어버리는 게 나은 일. 다만 계속 하릴없이 그 뉴스들만 보는 건, 사실 그 날의 아라의 모습과 느낌을 잊어버리려는 노력이었다.
‘따뜻했지.’
머리카락의 느낌, 샴푸냄새, 불과 며칠 만에 아련하게 남아버린 기억이지만 몸과 몸이 닿았을 때의 따뜻함만큼은 도무지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아라의 연락이 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띠링-
[야]
[왜?]
[너 생각은 좀 정리 했어?]
“?!”
하필이면 그 때 아라에게서 직구가 들어왔다. 그것도 훅. 나는 턱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생각, 그 놈의 생각. 도저히 정리가 안 되더라. 내가 너를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내일 선택하러 가야하잖아]
“어?”
아라의 다음 이어진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어느새, 내일이 바로 약속했던 이 주의 끝이었다. 세일그룹의 방위산업 연구소와 경찰청 특수수사팀, 시우(SIU). 아직은 정확히 어떤 연구소인지, 또 어떤 특수 수사팀인 지도 모르는 두 개의 직장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날.
“머리 아프네.”
침대 위에서 몸을 굴리면서 기지개를 켰다. 애초에 왜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거야? 둘 다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긴 하지만, 이건 선택권을 준 게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강요잖아. 둘 다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둘 중에 하나를 오라고?
다시 핸드폰을 켜고 아무 뉴스나 클릭했다.
그래, 사실은 회피하고 싶었던 거다. 세일그룹과 경찰청이든, 다연과 방송국과의 전쟁이든, 아라에 대한 생각이든. 한 번에 몰아치는 선택의 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었던 거다. 결국 나는 겁쟁이다.
그러고보면 이 능력,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은 참 나와 어울리는 것 같다. 도망치기에는 딱 적합한 능력이거든. 누가 쫓아오든, 날 잡아채든,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보고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도망칠 수 있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더라도, 그걸 막지는 못하더라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지 않을까, 잘만 사용 한다면.
[.... 최근 불거진 논란에 대해, 방송사는 평가표의 스캔본을 공개하며 조작이 없었음을 다시 한 번 확실히 했습니다. 또한 오전 중 진행한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인터넷에 업로드된 평가표의 촬영본은 악의적으로 편집된 것이며, 평가표를 유출한 사람과 인터넷에 업로드하여 공론화한 사람 모두에게 합의없이 철저하게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것임을 발표했습니다.]
사실 부끄럽기도 했다. 여태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최무혁 소장이 확실하게 일을 처리한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 아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누군가는 내가 CCTV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 혹은 사무실에서 평가표를 들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긴 했을테니까.
[방송사는 아울러 업무방해 및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인터넷에 자료를 올린 사람에 대해 고소를 진행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해당 허위사실로 인해 현재 재계약을 마친 소속 가수들은 물론 그 가족과 팬들이 겪은 심적인 고통을 감안했을 때, 선처없이 법적인 조취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되게 힘줘서 얘기하네. 합의없이, 철저하게... 원래 기자가 저렇게 감정적으로 얘기하냐?
[한편 경찰은 현재 해당 자료가 업로드 된 곳이 서울 방배동 소재의 한 PC방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업로드한 사람의 신원을 파악 중에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통상 수사 진척도를 볼 때 하루나 이틀 정도면 범인을 특정하여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어차피 내 선에서는 끝난 일이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송국의 대응은 내가 예측했던 것이 아니었다. 물론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방송국의 강경대응을 절대적으로 믿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방송국도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하고 때웠겠지, 라고 불신하는 사람들이 또 그만큼 있었다. 진실이 어떻든, 이제 CK 엔터라는 새로운 둥지에서 새출발을 하려는 아이돌 그룹에게는 조작돌이라는 이미지가 굳혀진 듯 했다.
“스캔본을 공개한다.......”
생각해보자. 방송국이 스캔본을 공개한다면 당연히 내용을 방송 자막과 똑같이 고쳐서 공개를 할 거다. 애초에 바로 공개가 아니라 공개를 할 수 있다고 예고만 한 것만 봐도 뭔가 찝찝하지. 그런데 정말 그게 현명한 판단일까? 만약에 그 반응을 보고 제보를 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나타나서 그 원본을 직접 라이브로 보여준다면? 아니면 하다못해 그 원본을 증거자료로 경찰이든 검찰이든 넘기게 된다면? 스캔본을 어설프게 조작한 건 탄로날 거고, 그 다음은 수사기관에서 알아서 다 풀어줄 터다. 만약 수사기관을 처음부터 포섭해놓은 것이 아니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설령 이미 수사기관을 포섭해 놨다 하더라도 그건 대기업의 의사결정이라기엔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공식적인 수사기관을 통하지 않더라도 원본과 가짜를 공개적으로 대조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터다. 그러니까, 애초에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진짜에요’라고 들이미는 카드는 효과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큰 거다.
‘그런데 왜?’
불안한 이유는 하나.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 중에 고려하지 않았던 딱 하나의 가능성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아라가 몇 번이고 넌지시 이야기 했던 그 가능성.
‘넌 벌써 얘를 피해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아라는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판단이 아니라, 내게 경고를 했던 거다. 내게 남은 의구심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당사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 하지만.....
우우우웅 -
그 때 흘러나오던 뉴스가 멈추고 진동이 울렸다. 나는 침대 한 쪽에 대충 던져놨던 핸드폰을 황급히 집어들었다. ‘김아라’.
“여보세요?”
[뭐해?]
“어? 그냥 있지. 왜?”
[또 혼자 생각하고 있었구만? 네가 한 게 잘한 일인지.]
“......”
[아니야?]
“귀신이구먼, 귀신이야.”
아라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고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있을 것 같아서 전화했다. 내일 중요한 결정해야하는데 자꾸 신경쓰이면 안 되지.]
“그치, 그런데......”
[한남대교야.]
“어?”
전화기 너머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평소보다도 유쾌한 듯한 아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남대교 한 가운데라고. 지금 그 여자가 있는 곳.]
“누구?”
[모르는 척 하지 말라고 했다.]
“이다연?”
[내가 지난 번에 시켰잖아.]
한참을 고민하고 나서야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다연의 핸드폰에 어떻게든 넣으라고 했던 커넥터. 뭔가를 설치하라고 했지만 그 다음 따로 이유를 말해주지도, 언급하지도 않아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경로가 이상하길래 보고 있었어. 위험한 선택을 또 할 것 같으니 얼른 다녀와. 네 생각도 정리하려면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잖아. 추우니까 코트 꼭 챙겨 입고.]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이건 멍해진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이 비워지고 명료해진 거다. 그래, 확인하는 수는 그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설마 또 투신을 하려는 생각이면, 얼른 가서 잡아야 한다!
[아 참, 그리고. 우리 지난 번에 했던 얘기 말인데.]
끊길 줄 알았던 아라의 목소리가 갑자기 이어졌다. 어쩐지 아까만큼이나 홀가분하고 발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보다 먼저 떠오른 건 며칠 전 같이 야경을 내려다보던 그 날의 분위기였다. 말없이 걷고, 버스를 타고, 다시 걷고. 그러면서 서로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야경을 구경하고, 어깨를 내어주고, 그리고 다시 나란히 걷고.
“무슨 얘기?”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받았다. 아라의 목소리도 아무렇지 않았으니까. 계속 그렇게 유지하자, 흔들리면 안 된다. 내일은 중요한 결정을 하는 날이다, 이런 사소한 일에 자꾸 흔들리면 안 된다. 아라는 나랑 십년을 넘게 알아왔던 사이잖아. 십오년? 십사년? 그리고 심지어 얘는 남자친구도 있는 애라고.
[나 헤어졌어.]
“......어?”
[헤어졌다고. 그게 나을 것 같아서.]
멍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야? 축하한다? 아니, 힘내라? 아니면 어쩌다가 그랬냐고 진지하게 걱정을 해줘야하나? 하지만 내 머리가 굴러가는 속도가 무안할 정도로 아라의 다음 말은 금방 이어졌다.
[해 줄 얘기가 많으니까, 또 사고치거나 일 벌리지 말고 잘 다녀와. 집 온 다음에 꼭 연락해.]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나는 망연히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화면이 바뀌고 떠오른 시간을 살폈다. 오전 열한시 삼십 분.
‘잘 다녀와.’
그 말에 잠시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 말은 기다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도 되는 거겠지. 그리고 기다리겠다는 뜻은, 모든 일을 야무지게 잘 마치고 오라는 뜻이다.
“이다연.”
마음 어딘가를 자꾸 괴롭히는 문제.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나를 도망치게 만들었던 소식들. 내가 해결할 수도 없고, 비겁하게 세일그룹에 기대서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던 일. 아라 덕분에, 또 다시 아라 덕분에 해결의 길이 하나 열린 셈이다.
한남대교. 이 모든 일의 해답이, 지금 그 다리 한복판에 있다. 처음 그 문제를 만났던 그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