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만남
난 청승이란 단어를 참 좋아했다. 사전에는 궁상맞고 애처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내게 청승은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었다. 혼자하는 산책, 혼자하는 여행, 사람들 속에서도 혼자를 느끼면서 그 감정에 푹 취해보는 일. 내게 청승이란, 내 자신에게 좀 더 친한 척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묻혀있던 세상보다 나 자신에 집중하는 시간이었고, 내 자신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였다.
물론 사람마다 관점이 다른 것이니, 지금 나처럼 혼자 바닷가를 따라 걷는 것 역시 그저 시덥잖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아, 그래도. 남이야 뭐라하든 내게 홀로 하는 바닷가 산책은 목욕과도 같았다. 파도소리, 소금냄새, 눈이 시릴 듯 파란 하늘과 어두침침한 먼 바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게 몸과 마음을 씻기는 목욕. 목욕을 다른 사람과 같이 할 순 없잖아?
살다보면 늘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고, 그렇게 하루 평범하게 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왜 그리도 신났던 걸까? 다가올 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몇 분 뒤의 놀라운 만남을 마음이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아직도 몸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나는 신발을 벗고 바닷가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얕은 바닷물 밑에서 티없이 맑은 두 눈을 마주쳤다.
“……”
얕은 바닷물에 온 몸을 담그고 있던 소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가슴까지 올만한 작은 키의 그 소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갑자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귀를 자극하던 세상 모든 소리가 소녀의 헛기침 한 번에 사라져버렸다. 신기하게도 적막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귀가 온통 먹먹해졌으니.
몸을 일으킨 소녀는 잔잔한 물결 위로 올라왔다. 말 그대로, 그녀는 얕은 파도 위에 두 발을 올린 채 서 있었다. 그 진한 해질녘 하늘 아래에서도 한 줌 그림자 없이 바닷물 위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하얀 피부, 무릎에서 흩날리는 파란 원피스. 물에 젖어 착 가라앉은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내며 눈을 마주쳐오는 소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 오랜만이네.”
잠시 뒤를 돌아봤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아세요?”
내 눈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아이한테 무슨 위압감을 느껴서인지는 몰라도, 내 입에서는 멋대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까무러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아니. 그건 아니고. 너 같은 애가 오랜만이라서.”
분명 겉모습은 어린 아이인데, 말을 뱉는 모양새나 한숨을 쉬는 타이밍이 15년차 과장님을 보는 듯 했다. 내가 놀라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였는지도 몰랐다. 겉모습과 태도의 괴리가 심하긴 하지만, 워낙 평소에 자주 봐오던 태도라서.
“근데 누구세요?”
소녀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눈을 감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조곤조곤 노래를 시작하려는 듯 동그랗게. 그리고 동시에 주위의 그 모든 소리가 돌아왔다.
입을 벌린 건 소녀였지만 목소리를 낸 건 바다였다. 어쩌면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세상인지도 몰랐다. 발목을 간지럽히던 파도가 살며시 인사를 건네고, 사르르륵, 그 파도에 녹아내리는 모래가 화답하고. 옆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장난스레 귓등을 펄럭이며 지나가고, 잊지 말라는 듯 저 멀리 날갯짓하는 갈매기는 소리치고.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소녀가 다시 천천히 입을 다물고 눈을 뜨자, 다시 세상의 그 모든 목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세상 모든 감각이 블랙홀처럼 소녀의 눈과 입으로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여전히 파도는 발 밑에서 살랑이고 바람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지만, 목소리 없는 세상은 도무지 진짜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럼…….”
“응.”
고개를 끄덕인 소녀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다시금 바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끝의 간지러움, 시린 콧잔등, 느끼면서도 자각하지 못했던 감각들도 다시금 생명을 되찾았다.
“같이 걸을까?”
네, 좋아요.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뱉어 놓고 아차싶어서, 나는 일부러 신발을 든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짐짓 여유로운 척 소녀의 옆을 걸었다. 소녀는 말아 쥔 손을 입가로 가져간 채 쿡쿡 웃을 뿐이었다. 친구에게 장난을 성공한 어린 아이의 뿌듯함, 그 외에 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 많이 오지 않아요?”
“많이 오지.”
“근데 왜 오랜만이라고 하신 거에요?”
“뭐…….”
파도 위를 걷던 소녀는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고개를 들고 허공을 바라봤다.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소녀가 한참 뒤에 꺼낸 말이었다. 오랜 생각으로도 잘 정리되지 않는 말일까, 아니면 정리하기엔 할 말이 많은 걸까. 소녀는 그 말을 하고도 계속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궁금했다. 아, 내가 국민MC라면 얼마나 좋아. 툭툭, 편하게 내뱉은 말에 상대도 편하게 자기 생각을 꺼낼 수 있다면.
“요즘은 일하는 게 힘드네.”
다행히 소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왜요?”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은 단순해.”
흠흠. 잠시 헛기침을 한 그녀는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가꾸고, 단장해. 여기서 하는 일이야. 너처럼 여기서 차분히 씻고 가는 사람은 몇 없어, 이제.”
“씻고 간다고요?”
“응.”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나를 쳐다봤다.
“올 때마다 봤어. 씻고 가는 거. 오늘도 씻으러 온 거 아냐?”
소녀는 잠시 멈춰서 그 가녀린 손가락으로 내 가슴 한 가운데를 콕 집었다.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나는 괜히 흥분해서 목소리를 크게 내버렸다.
“난 늘 그렇게 생각했는데!”
뿌듯했다. 누구는 청승이라 하겠지만, 뭐 어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해왔다는데! 결국 내 감각이 틀리지 않았던 거다.
“너같은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도 있고 뭐. 다 그런 거지.”
소녀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손가락을 거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는 질 듯 말 듯 여전히 수평선 언저리에 걸쳐있었고, 바다는 아직도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금방 꺼져버릴 촛불 처럼, 일렁이는 파도 따라 깜빡이는 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