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마침내,.....

by 봄단풍




해가 바뀌고 난 뒤 겨울은 유독 바빴다. 할머니를 보내드리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지만, 나보다 몇 배는 더 지쳐있으신 부모님도 챙겨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해가 바뀐 연초에는 반드시 진행해야하는 결산 업무가 산적해 있었던 것이다. 한 번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도배했던 폭설이 그 다음에도 몇 차례 더 내리는 동안, 나는 야근과 출근, 부모님께 연락과 밤 늦게 찾아뵙는 일을 반복하면서 매일을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었다.


“우수하.”

“예, 차장님.”

“내일까지만 좀 고생하자.”

“넵.”


하지만 정작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가 쌓이고 쌓이다보면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빨리 흘러가곤 하는 법이다. 또 한 번 기록을 경신하는 눈이 내린 1월 말이 지난 뒤. 어느덧 차가운 바람만 부는 도시 곳곳에는 하얀 눈과 까만 진흙이 뒤섞인 회색빛 얼음들만 남아, 한 때 겨울이라는 것이 이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2월 중순이 지나고 있었다.


“다 되어가냐?”

“옙, 한 30분 안에 될 것 같습니다.”

“틀린 거 없나 잘 체크해. 두 번 세 번 체크하라고.”

“옙. 체크하고 보내드릴까요? 아니면 되는 대로 먼저 보내드린 다음에 같이 체크하시겠어요?”

“되는 대로 먼저 보내라. 그게 낫겠다.”


박차장님과 단 둘만 남은 사무실도 이제는 익숙했다. 어떻게 보면 집중이 더 잘 되기도 했다. 힘들 때 사담을 나누며 의지할 남과장님도 없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약한 소음을 내는 다른 팀원들도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박차장님이 또 무슨 용무로 나를 불러서 혼낼까, 신경이 곤두섰었지만, 일단 눈 앞에 닥친 일이 한 가득이니 박차장님의 말이나 태도에 신경을 쓸만한 여유도 없었다.


“나중에도 이런 일은 여러 사람하고 같이 점검하라고. 혼자는 똑같은 것 백 번 봐도 안 보인다니까?”


한 때 불편하게 느껴졌던 박차장님의 잔소리도 한 번 오류를 경험하고 난 뒤에는 두고 두고 기억해야 할 조언이 되었던 것이다. 혼자서는 같은 자료를 백 번을 봐도 같은 오류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말은 필시 논문을 쓸 수 있을 만한 주제다. 아니면 이미 논문이 나왔을 수도 있고.


그렇게 매일 밤을 회사 로비의 불이 꺼질 때까지 일하기를 며칠. 마침내 2월의 중순에 다다라서야 박차장님은 야근의 끝을 선포하신 것이다.


“고생했다.”

“넵, 차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정장 자켓은 한 쪽 어깨에 걸친 차림으로 나는 맥없이 버튼을 눌렀다. 한 때는 넥타이나 셔츠 단추가 흐트러진 것만으로도 지적을 하던 박차장님이었지만, 야근을 시작한 날 이후로는 그런 지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곧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멀리서부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은 좀 늦게 나와라.”

“예?”

“한 열시 쯤 나와. 어차피 내일도 늦게 가야하는데, 마지막이니까 좀 쉬었다 나오라고.”

“아, 넵.”


한 시간. 평소보다 한 시간의 여유가 더 생겼다. 평소같았다면 그렇게 일하고 고작 한시간이냐며 불평을 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그런 호의를 제안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차장님이라서 더 신기하고 귀한 시간으로 느껴진 것인지도 몰랐다.


“집에는 어떻게 가?”

“저는 버스타고 갑니다. 차장님은 지하로 가시죠?”

“어.”

“운전 힘들지 않으세요?”

“맨날 다니는 길인데, 뭐.”


유독 그 날 따라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올라왔다. 나는 괜히 한 번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슬쩍 박차장님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미국은……. 준비 잘 하고 계세요?”

“미국?”

“지난 번에 말씀하셨던 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리베이터 문을 쳐다보고 있던 박차장님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지개를 켰다. 허리에서 나는 뚜둑 소리에 괜히 옆구리를 돌리며 몸을 풀던 그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나서야 입을 다시 열었다.


“알아는 보고 있지. 근데 뭐 그게 쉽게 되냐.”


나는 박차장님이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버튼을 누르고 있다가 그 뒤를 따라 탔다. 나와 박차장님은 엘리베이터의 양 쪽 구석에 기대서서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그래도 그걸 준비하는 것만 해도, 차장님이 능력이 되신다는 거니까요.”

“능력은 무슨.”

“아니, 정말로요. 그래도 미국에 갈 수 있는 걸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건 능력이죠.”


잠시 뒤 문이 닫히고, 차장님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비꼬기 위해 한 것은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차장님만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리고 홀린 듯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일 때문에 지쳐서인지, 밤이라 유독 감성이 북받쳐 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마음의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뭘 나만큼 해?”

“가족을 꾸리고, 애들도 낳고, 키우고 또 다른 나라도 생각 해보고, 그런 것들요. 저는 지금 일도 이렇게 헤매고 있는데.”


박차장님은 또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입술을 뚫고 흘러나오는 체, 하는 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작게 들렸다.


엘리베이터는 큰 소리를 내면서 아래로 향했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무도 없는 건물에서 조용히 내려가자니 온갖 소음이 들려왔다. 웅웅거리는 기계음, 불규칙하게 휘잉 거리는 바람 소리. 그리고 그런 자잘한 소음을 뚫고 박차장님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네가 내 이십대 때보다는 훨씬 낫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차장님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저 서른인데요.”

“아 서른이냐?”

“넵.”

“아무튼. 내가 네 나이일 때보다 더 나아.”


박차장님은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조금만 더 하면 돼. 조금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친절한 기계 안내음을 듣고도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황급히 열림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세요.”


뒤 돌아서 고개를 숙이는 내게, 박차장님은 한 손을 들어보이고는 다시 엘리베이터 한 쪽 구석에 등을 기대고 섰다.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은 엘리베이터는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고, 나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결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새끼, 니가 신입이냐?”


숙였던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틈새로, 나는 확실히 두가지를 볼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웃고 있던 박차장님의 얼굴이요, 두 번째는 그가 문이 닫히기 직전 낮게 중얼거리던 입모양이었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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