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하씨는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주리씨가 그렇게 물어본 것은 훌쩍 봄이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하늘에 금을 그어놨던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새순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길가에 꽁꽁 얼어붙어있던 하얀 얼음들은 거뭇거뭇한 흔적을 남기며 서서히 녹아가는, 꽃샘 추위도 슬쩍 인사만 하고 사라져버린 봄의 초입.
“뭐가요?”
“박차장님하고요. 요새 잘 지내는 것 같은데?”
회사 근처 산책로를 걸으면서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다. 점심시간만 되면 근처 모든 회사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는 산책로에서, 비즈니스 룩의 남 녀가 걷는 모습은 그리 튀는 모습이 아니었다. 또 사람들이 다 보이는 데에서 당당하게 같이 있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는 주리씨의 생각도 한 몫했다.
“그냥……. 뭐, 달라질 게 있나요.”
“아닌데, 좀 많이 달라졌는데.”
“뭐가 달라졌는데요?”
주리씨는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쳐다봤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그녀는 옆에서 걸으면서 계속 나를 주의깊게 살폈다.
“일단 수하씨, 여유가 생겼어요.”
“여유요?”
“요새 박차장님 얘기도 거의 안하고.”
그건 그랬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변화였지만, 주리씨의 그 말을 듣고 보니 분명히 그랬다.
“그리고 평소에 안 하던 넥타이를 하고 다니고?”
“아, 이거요?”
나는 짙은 남색에 사선으로 흰 줄무늬들이 새겨진 넥타이를 들어올렸다. 겉보기에는 깔끔했지만, 손으로 만져보면 빳빳하지 않고 흐물흐물하게 손가락 위로 흘러내렸다.
“박차장님한테 받았어요.”
“박차장님한테요?”
“네. 안 쓴지 한참 된 거라 버리려다가 말았다나.”
주리씨는 미간을 찌푸리고 작아진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산책로에 가만히 서서 나와 넥타이를 한참동안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내가 고개를 갸우뚱 할 때쯤에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되게 깨끗한데요.”
“그렇죠?”
하지만 찌푸리는 것도 잠시, 주리씨는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다가 곧 생긋 웃었다. 그녀는 후련한 표정으로 다시 앞을 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유, 기분 좋다.”
“왜요?”
“그냥요. 수하씨도 박차장님이랑 잘 해결된 것 같고.”
“해결이라…….”
“설마 고백한 건 아니죠?”
“에이, 무슨 소리에요?”
내가 버럭 소리 지르는 모습을 쿡쿡 웃으며 지켜보던 주리씨는 갑자기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몇 걸음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쁜 일이 없으면 항상 좋은 거죠. 날씨도 풀리고, 이제 슬슬 무거운 코트도 벗을 수 있고. 좋잖아요?”
“주리씨는 코트를 벗어서 좋구나. 나는 코트 덕분에 뭘 입을지 고민을 안 해도 돼서 한동안 편했었는데.”
“정말 다르다니까.”
“그래서 더 잘 맞는 거죠.”
나는 슬쩍 한 손을 내밀었다. 주리씨는 황급히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씩 웃으며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와 그 손을 꼭 잡았다.
“이제 신경 안 쓰기로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고민해보려고요.”
“벌써 손 잡았는데 뭘 고민해요?”
“가끔 생각보다 행동을 먼저 해야할 때가 있는 거죠, 뭐.”
“행동을 먼저 해버리면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그럼 이제 다른 생각을 해야죠. 여기 우리 회사 사람들이 있을까, 누가 봤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아마 백 퍼센트 봤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또 다른 생각 해야죠. 회사에 소문이 나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런 생각.”
주리씨가 옆에서 또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하씨는 생각이 참 많아요. 그리고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따뜻하다는 생각이요.”
“뭐가요?”
“주리씨 손이요. 손이 무지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주리씨가 웃는 소리가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살짝 옆으로 돌리니, 주리씨는 소리내서 웃는 대신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얼굴에 미소를 걸쳐놓고 있었다.
“수하씨 손은 왜 이렇게 차가워요? 우리 달라도 너무 다르네.”
“이런 것까지 다르다고?”
“비슷해지려면 한참 잡고 있어야겠는데요.”
나는 대답 대신 주리씨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아쉽게도 점심시간은 짧았다. 시간 관념이 철저한 상관을 모시고 있는 입장으로서 잠시의 일탈은 꿈꾸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쪽 손이 따뜻한 지금은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었다. 나는 주리씨의 손을 힘주어 잡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낡은 상가 건물에 눈이 간 것도 하필 그 때였다. 빨리 걸으면서 주위를 살피던 도중에 갑자기 시선 한 가운데 들어온 간판. 처음에는 내 눈이 뭘 발견하고 번쩍 뜨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뭔가를 보긴 봤는데 왜 봤는지 금세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불과 두어 걸음을 더 옮기자마자 나는 내 눈이 왜 번쩍 뜨였는지 깨달았다.
<전자담배, 금연껌 팝니다>
요새 유행한다는 전자담배를 파는 작은 가게였다. 요새 유행하는 상표의 물건과 더불어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잡동사니를 파는 곳. 재개발이 예정된, 낡은 아파트 상가에는 으레 있는 그런 정체불명의 가게였다. 나는 주리씨의 손을 잡은 채로 홀린 듯 그 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수하씨?”
두꺼운 유리 맞은 편의 전자담배들을 살펴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주리씨를 쳐다봤다.
“전자담배가 그냥 연초보다는 건강에 좋겠죠?”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그러면 금연껌이 더 나으려나…….”
주리씨는 나와 전자담배를 번갈아쳐다보다가 갑자기 장난기 많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입꼬리는 슬쩍 올리며 아이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녀는, 슬쩍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면서 물어왔다.
“친해지려면 같이 연초를 태우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러려고 사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나는 다시 유리창 너머 진열대로 눈을 돌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기왕이면 건강하면 좋잖아요. 가까운 사람은.”
채 일 분도 되기 전에 나는 포장된 선물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나왔다. 전보다 더 빨라진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하면서 주리씨와 나는 손을 놓고 걷기로 했다. 아직은 같은 회사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도 했고, 또 손을 놓고 걷는 편이 더 빨리 걸을 수 있어서였다.
“수하씨.”
그렇게 회사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주리씨는 검지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서 눈을 돌린 곳엔 새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있었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이 빼꼼 얼굴을 내밀면서 꽃샘 추위의 눈치를 보던 그 봄의 초입.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리씨가 가리킨 곳에는 새빨갛게 물든 단풍이 있었다.
“기억나요?”
앞서서 걸어가며 씩 웃어보이는 주리씨에게, 나는 마주 웃어보였다.
누구도 자신에게 신경쓰지 않는 시절에도 새빨갛게 온 몸을 붉히며 달아오른 봄단풍이 있었다. 아침 산기슭 뽀얗게 내려앉은 물안개에 젖어든 외투처럼, 어느덧 내 마음 한 켠에 물든 당신은 봄단풍을 닮았다고, 나는 혼자 속삭이며 키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