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야, 온유야.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니! 아빠는 항상 놀라움으로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단다. 어느새 벌써 이렇게 컸는지. 언제 이렇게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졌는지! 너희가 뒤집고, 기어다니기만 해도 방방 뛰면서 신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너희가 처음으로 엄마 아빠가 아닌 다른 말을 시작했을 때 뒤로 쓰러지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말이다. 이제 너희는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서 이불도 개고, 청소도 하고, 책도 읽는구나. 그 자체로 대단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얘들아. 아빠가 하루하루 얼마나 감동하고 있는지 아마 너희는 모를 거다. 너희는 그 존재 자체로 내게 아름다움이고 기쁨이다. 지유야, 온유야. 그러니 부디 스스로를 얕잡아보지 말고, 항상 담대하고 또 당당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려무나.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또 하루를 과거로 떠내려 보내는 일이기도 하다. 엄마와 기차를 타본 적이 있니? 아빠도 너희와 타고 싶었다만, 결국 지하철만 타보고 기차를 같이 못 타봤구나. 이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무튼,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 풍경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단다. 그럼에도 기차는 앞으로 나아가니, 아름다운 풍경은 순식간에 저 멀리 뒤로 사라지곤 하지.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다. 내가 누리던 것들, 혹은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 차창 밖 풍경처럼 순식간에 멀리 보내는 것과도 같지.
그리고 그 이별은 거의 대부분 우리에게 슬픔을 준다. 우리는 살면서 뭔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참 많다. 때로는 다 쓴 물건을, 때로는 갖고 있던 꿈을, 때로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며 기대했던 결과를, 또 때로는 소중한 사람을 보내기도 한다. 사람을 보낸다는 것은 관계의 측면에서 안녕을 고하는 일이기도 하며, 때로는 안타까운 일로 다시 보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보내는 일도 있지. 미련, 후회, 반성, 슬픔, 애도. 그런 이별 뒤에 남는 것은 세상에서 그렇게도 무의미하다고 노래하는 것들인데, 내 마음에 들어오면 어찌나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이 녹록치 않은 세상은 항상 우리에게 열심히 달리기를 요구하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별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빨리 다잡는 데에만 집중하곤 해. 하지만 헤어짐의 순간에 마음을 다잡는 것이 단순한 힘과 의지로 가능하다면 세상에 힘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잠깐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자꾸나.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도 잠깐 돌려보고 말이야. 아빠가 너희, 지유와 온유를 키울 때는 둘다 거쳤던 과정이 있다. 바로 분유를 먹는 일이지. 너희 둘다 일정기간 엄마의 모유를 먹곤 했지만, 그 이후에는 이유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분유를 먹곤 했다. 아마 너희들도 아이를 기르게 된다면 느끼겠지만 갓난 아기의 배꼽시계만큼 정확한 시계는 또 없다. 항상 먹는 그 시간에 눈을 반짝이며 밥을 찾고, 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 표현을 하지. 바로 우는 일이다.
허겁지겁 물을 맞추고 분유를 타고, 따뜻한 물에서도 잘 섞이지 않는 분유를 거품이 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열심히 섞고 있으면 이제 아가는 목이 쉬도록 울고 있지. 그런 너희를 안고 분유를 먹이는 건, 진땀을 빼면서도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너희는 둘 다 아빠를 꼭 닮아서, 콧잔등과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곤 했는데 그걸 보면서도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는 힘을 다해 분유를 먹고 있는 너희를, 아빠는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냥 멍하니 웃곤 했지.
문제는 그 다음이다. 주어진 분유를 다 먹었을 때. 다 먹고 만족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때로 먹고도 배가 고파 우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분유를 더 타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배고프다고 더 줬다가 오히려 게워내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되도록 그 시기에 맞는 적절한 양을 정해두고 매 끼니마다 같은 양을 주려고 했었지. 하지만 아기인 너희들은 그걸 알 수가 없지 않겠니? 때로는 배가 부르고 때로는 배가 고플 수 있었겠지. 표현하는 방법은 우는 것 하나밖에 모르고. 그걸 몰랐던 처음에는 우리도 그럴 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달래려고 애를 썼단다.
하지만 결국 우리도 요령을 찾았다. 우리는 너희가 다 먹은 젖병을 빼지 않고 그대로 너희가 가지고 놀게 두었단다. 처음에는 서럽게 울면서 혼자 젖병을 두 손으로 잡고 빨던 너희들은, 한 번 더 빨아보고 분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고, 다시 한 번 또 빨아보고, 젖병 구석구석 만져보고 빨아보고 핥아도 보다가 서서히 평온을 되찾곤 했다.
“그래, 그렇게 찬찬히 받아들여 보렴.”
엄마와 아빠는 너희를 안고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소화가 잘 되라고 배도 쓰다듬어 줬지. 그러면 너희는 그 다 먹은 젖병을 들고 이리저리 가지고 놀다가, 이내 평온한 얼굴에 잠에 들거나, 한 번씩 까르륵, 웃고 우리에게 안기곤 했단다.
그래, 이 쯤되면 아빠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희는 알겠지. 너희는 지유와 온유니까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뭔가를 떠나보내고 그 슬픔이 너무나 힘겹다면, 억지로 이겨내려 하지 말고 잠시 주저앉아 울기도 해보고, 마음껏 표현해보렴. 아기가 다 먹은 젖병을 꽉 쥐고 이리저리 굴려보듯이, 너희가 떠나보낸 것의 빈자리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받아들이려무나. 충분히 시간을 갖고 그렇게 있다보면 너희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너희를 떠난 그것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너희는 그것이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별의 슬픔은 그렇게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잠시 주저앉아 마음껏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되새기고 추억하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궁상맞다, 청승 떨지 말라 지적할 수도 있겠다만, 그런 주위의 불평 불만은 잠시 접어두고 시간을 가지렴. 마음 구석까지 퍼져있는 기억을 어루만지면서, 아무렇지 않아질 때까지 쓰다듬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얘들아, 너무 애쓰지 말거라. 때로는 그런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그래, 아빠도 이 이별에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구나. 정말로 떠나면서 이런 글을 쓰니 그저 부끄럽고, 또 미안할 뿐이다. 지유야, 온유야. 하지만 삶에서의 이별은 항상 예정된 것이다. 그저 조금 빠르냐, 늦냐의 차이일 따름이야. 아, 아빠가 글로 쓰면서도 참으로 구차한 변명이구나. 지유야, 온유야. 너희를 두고 떠나는 지금이 너무나 한스럽구나. 하지만 아빠는 잘 참아낼 것이다. 너희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고 항상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너희는 너희에게 주어진 삶을 담대히 잘 살아내거라.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덮친다면 잠시 쉬기도 하고, 숨을 돌리고, 기억을 어루만지고 추억에 기대며 말이다.
지유야, 온유야. 너희에 대한 기억은 아빠를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게 만드는 기억이다. 비록 이 병은 아빠를 데려가지만, 결국 죽음조차 아빠를 너희로부터 떨어지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란다. 아빠는 이 글로 너희와 함께 할테니 말이다. 이별이 주는 슬픔은, 그 기억이 주는 힘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기억하고 추억하렴. 그것이 너희를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야.
사랑한다, 지유야. 온유야.
오늘도 잠든 너희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못난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