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5화

아파트

by 봄단풍

“승민씨. 잠깐만.”


차장님의 호출이다. 이럴 때는 사무실이 있는 회사가 부럽다. 은행 특성상 내 자리 바로 뒤에 부서 차장님 자리가 있으니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흠칫 흠칫 놀라게 된다. 무엇보다 일하면서도 계속 뒤에 눈치가 보이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일까…….


“얼마전에 프로모션 할당된 거 알지.”


걱정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 매일 신용카드, 펀드, 그리고 방카슈랑스까지. 할당된 손님의 수와 금액을 유치하지 못하면 그 날 지점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상갓집이다. 모두가 눈을 부라리고, 개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죄인을 색출해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문제는 할당된 목표가 애초에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목표였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입을 열지 못한다.


“아는 사람이라도 없어? 오늘 안에 채워야지. 손님한테 없으면 승민씨 아는 사람 이름이라도 몇 명 적어놓고 가, 퇴근하기 전에.”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는다. 이제 그마저도 질린것인지, 차장님은 한숨을 푹 쉬시고 몸을 돌려 먼저 나가신다. 오늘은 또 누구를 팔아야 하나……. 문득 눈을 돌린 인스턴트 커피 상자가 텅 비어있다. 혹시나 싶어 다른 품목들도 확인해본다. 녹차 티백, 휴지, 종이컵, 응대용 머그잔, 설거지 안한 컵들. 흘러나오는 한숨을 애써 억누른 채,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힘겹게 돌렸다.


“……아냐 여보. 나도 당연히 얘기 했지…….”


탕비실 싱크대를 정리하고 있자니 어디선가 두런두런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보다 이 년 정도 먼저 입사한 오대리님이다. 며칠 전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돌아오자마자 지점 내 모든 분노를 받아내고 있는 사람. 회사에 없었으니 그만큼 마땅히 우리의 욕을 받아라, 하는 듯한 태도로 회사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짜증을 다 쏟아놓고 있었다.


불과 오 분전, 대리님은 다음 주에 있을 결혼 기념일을 위해 휴가를 하루만 쓰고자 계획을 올렸지만 반려당한 것이다. 월요일인 것 외에 특별한 업무가 있던 것도 아닌데 차장님은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는데 휴가를 또 쓰는 게 말이 되냐’며 기각했다. 도대체 예비군 훈련과 휴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라에서 이 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으로도 부족해서 불러대는 훈련인데다가 가장 기본적인 개인물품인 핸드폰도 못 가지고 들어오게 하며, 오지 않을 경우 벌금까지 내야하는 피곤한 훈련에 불려가는 것이 휴가를 반려할만큼 크나큰 손해란 말인가.


사실 이유는 알고 있다. 첫째로는 애초에 오대리님 자체가 너무 착해서 회사의 모두가 막 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예비군 훈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에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것 자체가 출근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휴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서 얼마나 힘든지, 흙바닥에서 구르고 사람들에게 연락도 못한 채로 모르는 사람과 숙식을 같이 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회사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휴가, 그것도 고작 하루를 못 쓰게 하는 건 좀 이해가 안 됐다. 자기도 결혼 몇 십년차라 다 안다, 그냥 퇴근하고 가서 맛난 거 먹어라, 그걸로 족하지 않냐. 뭘 휴가를 내려고 하냐. 첫 번째 기념일 그런거 시간 지나면 다 의미 없다. 이런 식으로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오대리님을 다시 한 번 일에는 관심없고 어떻게든 쉬고싶어하는 직원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이다.


싱크대 정리를 마치고 조용히 남자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말이 남자휴게실이지 사실 기계실에 의자 두어개 가져다놓은, 통풍도 될까말까한 좁은 공간이다. 오대리님은 거기서 그렇게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승민아. 조용히 이름을 부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대리님의 모습이 그토록 처량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얘만 아니었어도…….”


굳이 뒤에 말을 잇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 조용히 손을 잡고 싶었지만 남자들끼리 그게 뭐냐며 싫어할까봐, 말없이 어깨를 주물렀다. 어차피 이 사람의 지금 이 모습은 나의 멀지않은 미래의 모습이다. 힘내라, 힘내라 우승민.


오대리님이 만지작거린 핸드폰에 불이 켜졌다. 바탕화면에는 어느새 머리카락이 덮수룩하게 자라난, 아직 이불에서 기어다니는 한 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사진을 바라보는 오대리님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입술 사이에서 기나긴 한숨만 새어나올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대리님께 짐인가요, 힘인가요?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내 미래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이라도 빠른 퇴근이 지금 당장은 더 급한 문제니까.




집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고 나니 아직도 페인트 냄새가 진동을 한다. 삑, 문이 열렸습니다. 그래 나도 안다. 밤 열 시를 막 넘긴 시간, 피곤이 극에 달해서인지 머리고 띵하고 아픈데 문득 앞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쓰레기가 담긴 낡은 종이상자를 품에 안고 나온 준상이 형이었다.


“오 형. 짐 다 옮겼어?”

“응. 정리중이다.”


신기하다. 형을 마주치고 나서야 새삼 이 아파트가 내 것이라는 게 다시 한 번 느껴졌다. 동시에 텅 비어있는 나머지 집들에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나니 어쩐지 좀 무서워졌다. 얼른 아는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시끌벅적한 터전을 만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하루하루,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도 나누고 그들 이야기도 들어가면서 현실을 견뎌낼 여력이 좀 더 생기겠지.


“한 잔 할래?”

“니가 사라.”


생각할 여지도 없었던 대답이었는지. 기다렸다는 듯 돌아온 대답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생활은 자기가 오래했으면서……. 그러고보니 문득 다른 층에 있는 호준이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아, 형. 형이랑 같이 들어온 내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준상이형과 호준이를 소개시켜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둘 다 낯을 가리긴 했지만 내가 있었고, 쭈뼛쭈뼛하면서도 술을 빼는 사람들은 아니었으니. 함께 치킨집에서 축구얘기를 하다보니 둘이 금방 친해졌다. 뿌듯하다. 이러다가 나 빼고 둘이 만나서 놀러가면 질투가 좀 많이 날 것 같다.


치킨을 먹으며 나는 회사에서의 일을 열심히 풀어냈다. 준상이형은 연신 맥주를 들이키다가 자기도 똑같다며, 자기가 겪은 일을 털어놓는다. 열심히 들으며 나와 호준이는 몇 번의 욕으로 추임새를 대신하고, 또 호준이는 자신의 친구의 일을 꺼내 놓는다. 탁자 위에 쌓여가는 닭 뼈, 혹은 맥주잔처럼 말 마다 들어가는 욕의 횟수가 늘어가고, 마음의 짐도 더 무거워진다.


그런데도 기분은 좋다. 내일의 출근이 두렵긴 하지만, 오늘처럼 또 서로 떠들면서 웃고 욕으로 넘길 생각을 하니 그다지 우울하지 않았다. 다만 맥주 두 세잔이 내일의 기상시간을 늦출까봐, 그 사실 하나만이 걱정이 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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