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샛별 유치원 원장 김영희씨는 오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둘째 아들이 전날 태권도장을 빼먹은 걸 아침에 알게 됐는데 시원하게 혼내지 못했고, 일주일에 두 번 와서 집안일을 대신 해주는 아주머니가 설거지를 대충 한다는 것을 싱크대 몸쪽 구석 물때를 보고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매일 대충 서명만 휘갈기던 아파트 설문지가 알고보니 102동 동대표 선출 관련 서류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세대가 그녀처럼 대충 서명을 해버린 덕에 그녀가 동대표에 선출된 것이리라.
귀찮은 일이 늘어난 것이다! 물론 동대표라고해서 대단한 직책도 아니고, 엄청난 권한이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모두에게 박수를 받을 정도로 완벽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영희씨가 동대표를 맡은 이상, 모든 세대로부터 ‘이번 동대표는 참 일을 잘하니 한 번 더 합시다’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물론 그런 말이 나와도 한 번 더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지만.
원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늘 출근 시간에 엄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출근 시간에 다른 세대주들과 마주칠 일이 잦았고, 또 까칠한 성격을 밝은 인사로 가리며 좋은 인상을 만들 일이 많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인사를 기억한 사람들이 동대표 서류에 찬성표를 던진 것인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영희씨는 짜증 가득한 아침에 소소한 만족감을 누릴 수 있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여느 때처럼 출근하는 세대들의 눈치를 살피고 또 인사를 던지다가, 문득 영희씨는 낯선 차량으로 눈을 돌렸다. 매일 텅 비어있던 101동 주차장 자리에 평소와는 다르게 두 대의 차가 들어와 있었다. 운전을 얼마나 험하게 했는지 타이어에는 흙이 가득하고 범퍼에 흠집이 가득한 하얀색 마티즈와, 갓 뽑은 듯한 쥐색 K3였다.
에이 참, 아파트 품격 떨어지게. 들어와도 저런 차가 들어온담.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던 영희씨는 다시금 마음에 자리잡은 짜증을 내보내려 심호흡을 한 후에 천천히 운전석에 앉았다. 가만, 옆동에 드디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가? 경매니 리모델링이니 온갖 핑계를 대며 사람을 받지도 않던 그 동에? 늘 꽉 차 있는 102동 주차장을 빙빙 도느라 고생하던 입장에서, 텅 비어있는데도 사용하지 못하는 101동 주차장을 바라보는 영희씨의 마음은 항상 불편했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냥 공용으로 쓰면 되지 뭘……. 그런데, 항상 비어있던 그 자리에 얄밉게도 처음보는 차가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두 대씩이나, 그것도 어디 저렴한 국산차가, 그것도 보급형으로 아주 저렴한 차들이!
그래도 새로 전입을 온 사람들이니 동대표로서 한 번 찾아가서 인사를 해야하나, 잠시 고민하던 영희씨는 힘차게 고개를 저으며 안전벨트를 맸다. 에이, 이제 시작인데 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동대표 회의 같은 게 있으면 대표랑 인사나 하지 뭐. 출차를 위해 주차장을 한 바퀴 빙 돈 영희씨는, 그래도 101동의 저 두 차는 좀 치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엑셀을 살포시 밟았다. 주차장이 지하라서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