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오빠, 시간 있으세요?”
체계적인 세입자들의 관리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고막과 마음을 동시에 울려왔다. 오빠라니. 내 생각에 오빠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은 노벨 언어상을 줘야한다. 이토록 짧은 두 음절의 단어 하나로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단 두 글자만으로 가슴 한 구석이 못 견디게 간지럽다. 사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어 왜?”
쿨한 척. 난 너에게 흔들릴 정도로 가벼운 남자가 아닌 척. 쾌활하게 내뱉었지만 마음 한 구석 묘하게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오빠라고 말을 걸어준 사람이 영 범접하기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깨를 덮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뒤통수로 올려 묶은 머리. 하얀 피부와 동그란 눈, 영화 스크린을 사뿐히 열고 걸어나온 것 같은 얼굴. 올해로 스물 네 살인 진주리양은, 그렇게 앉아있는 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왼 팔에 작은 가방을 건 채 다가오는 걸음걸이조차 어쩐지 모델의 느낌이 나는 듯 했다.
워낙 빼어난 미모 때문에 진주리씨는 교회에서 유명인사에 속했다. 그런데 정작 이 사람과 친하다는 사람은 찾지 못했다. 또 그런 인맥 치고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친구 좀 까다롭다던데? 모임에도 잘 참여 안 하고. 남자들 시선을 즐긴다던데? 등등.
뭐 그럼 어떠랴. 진지하게 만나볼 걸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연애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다만 그렇게 유명하고 예쁜 사람이 말을 걸어주는 것만 해도 뭔가 뿌듯한거다. 인생을 그렇게 잘못 살아오지는 않았구나 싶기도 하고, 주위에서 아는 사람이 이 광경을 좀 지켜봐줬으면 하고.
“오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혹시 바쁘세요?”
“아니 아니, 약속 없어. 앉아서 얘기할래?”
볼수록 큰 키에 긴 코트를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늘씬한 다리.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중순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친 모습은 패션 잡지에 흔히 보이는 모델 같기도 했다. 검은 머리를 대충 틀어 올려 묶은 모습도 참 자연스럽게만 보이고. 의자에 앉으면서 눈을 마주쳐오는 모습도 괜히 예의바르고, 절도있고, 그 와중에 우아함도 겸비했다. 그냥 예뻐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오빠 일은 좀 어떠세요?”
그냥 그렇지. 마주쳐오는 눈을 응시할 용기가 나지 않아 커피를 홀짝이며 슬쩍 먼 산을 바라봤다. 나는 여유있는 직장인이다. 그래. 근데 사실 정말 할 말이 없기도 했다. 하고싶은 말은 힘들다, 그만두고 싶다인데 어쩐지 주리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저도 이제 졸업할 때가 되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아서요.”
내가 알고 있는 건, 주리가 유아교육과를 전공한다는 것과 이번이 마지막 학기라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마주치며 예은이 누나를 통해 알게 됐고, 간혹 인사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연락를 서로 한 적이 없는 피상적인 인간관계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것이 내가 알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였기도 했다. 물론 주변인들의 수많은 수군거림은 제외하고.
“오빠는 어떻게 회사를 들어가게 된거에요?”
“어…….”
가만있어보자. 뭔가 있어보이면 좋을텐데……. 은행에 입행하면서 준비했던 자기소개서와 면접 모범답안들이 바로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 맘에 들지 않았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경제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돈의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몸으로 접할 수 있는 은행에 입행하여, 수많은 경제 주체들과 현장에서 마주치며 경제를 몸으로 익히고 싶습니다……. 아니, 그게 이유가 될 리가 있나.
결국은 대답 대신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자기 소개서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온전히 비운 다음에야, 나는 거짓없는 눈으로 주리의 눈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받아주니 들어갔지.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넣어보다가.”
“그쵸…….”
이해한다는 듯, 주리의 얼굴이 가볍게 찌푸려지더니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자 주리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같이 흔들거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내가 앉아있는 의자도, 내가 마시는 커피가 올려져 있는 탁자도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대학은 졸업할 때가 됐는데, 더 공부할 자신은 없고. 뚜렷하게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당당하게 내가 하고 싶은 걸 남 눈치 안 보고 주장하고 싶었는데, 정작 그렇게 내세울 게 없더라.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으니까 채용공고만 들여다보고, 사이트 뒤져가면서 자소서 열심히 쓰고. 그러다가 받아주는 데가 여기여서 들어간 거지.”
마치 미리 대본을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신기했다. 어쩌면, 준상이형이나 호준이랑 매일 하는 불평거리가 이런 내용이라 입에 굳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잠시 내가 뱉은 말을 곱씹던 차여서, 나는 주리가 저도 그래요, 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저도 그래요. 사실 동기들이나 선배들 보면 다들 임용 보거나 하는데……. 전 임용도 자신없고, 그렇다고 사립이나 사설로 가자니 경력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거든요.”
와. 이런 미인도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가 있구나. 위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비해 굉장히 서글픈 눈으로 손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내가 꼭 위로해주고 싶은 어린 아이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먼 산을 보는 것은 주리, 눈을 마주치려 애쓰는 건 내가 되어 있었다.
“이번 학기만 끝나면 바로 사회로 던져질텐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집에서는 뭐라고 안 해?”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에 툭 말을 던졌다. 하지만 의미없는 질문이 아니긴 했다. 우리네 젊은이들이 다 그렇지 뭐.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다 커서는 부모님 걱정하실까봐 열심히 취직 준비하고. 제대로 된 진로 탐색 없이 시키는 대로 덜컥 대학을 졸업했으니 직장이라고 주체적으로 잘 정하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물론 그렇게 순종적으로 잘 살았어도, 어딜 가나 ‘요즘 젊은 것들은’ 으로 시작하는 욕을 먹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게 우리네 삶 아니던가.
“걱정말고 하던 대로 하라셔요. 어딜 가든 믿어주신다고.”
“오.”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자연스럽게 커피를 한 모금, 홀짝. 원래 인기 있는 남자들은 리액션을 잘한다고 했다. 사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반응이기도 했다.
“좋은 부모님이다.”
유난히 쓰게 느껴지는 커피 한 모금 너머로, 진심이 흘러나왔다. 마주쳐오는 맑은 두 눈이 잠시 동그래지더니, 이내 가볍게 반으로 접히며 만화에서나 보던 그림같은 웃음이 그 곳에 자리잡았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필 하얗게 칠한 천장은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너무나 깨끗해서, 낮에 봤던 눈웃음을 잠들기 직전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