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아침 일곱시 반인데도 불구하고 햇살이 따가웠다. 좀 서늘할만도 한데, 여름에게 자비란 없는 듯 했다. 반팔 셔츠를 입을만도 한데, 회사 지침 역시 자비란 없다. 그나마 얇은 정장을 입었지만 목을 꽉 조이는 넥타이는 여간해서 참기 힘든 더위를 선사해줬다. 참기 힘들면……. 뭐 어떡해, 그래도 참아야지.
더군다나 오늘은 가두캠페인의 날, 어깨부터 허리까지 내려오는 띠도 차야 했다. 회사 이름과 사랑합니다, 라는 흔한 문구가 새겨진. 단추나 찍찍이라도 만들어놓지, 고정할만한 장치도 없어서 옷핀으로 고정해야했다. 정장에 구멍을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뭐든 각이 져야 손님에게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차장님 덕분에 끝끝내 정장 상의까지 걸쳐서 옷핀을 뚫어야만 했다.
은행이라고 무조건 창구업무만 보는 건 아니다. 주기적으로 출근시간에 맞춰 거리 홍보도 해야한다. 옛날에는 무전기 한 대씩 들고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는데, 요즘 그런 방식으로 금융거래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생각해보면 퇴보한 거 아냐? 그 때는 무전기라도 있었지, 지금은 그냥 무조건 아침 일찍 나와서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자는 건데……. 창의적인 마케팅 방안과는 거리가 있어보였지만, 일단 윗선에 뭔가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가두캠페인만한 것이 없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그린은행입니다. 이번에 새로운 적금이 출시되어서요…….”
인사, 소개, 안내, 홍보. 어느 것 한마디 귀기울여 듣는 사람이 없다. 단 한 사람도. 하지만 아무리 내가 덥고 짜증이 나도 이 사람들이 밉지는 않았다. 내 출근길을 생각해보면 어차피 나도 똑같이 반응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전단지를 아득바득 받아가는 것은 옆에 조그맣게 달린 물티슈 때문이리라. 그리고 채 십초도 지나지 않아 전단지는 횡단보도 앞 쓰레기통에 들어가있을 것이고, 지점으로 돌아갈 시점엔 전단지가 쓰레기통의 절반 정도를 메우게 되겠지.
“승민씨. 좀 더 적극적으로 해 봐, 응?”
잠시 숨 좀 돌리려고하면 차장님이 넌지시 격려를 해준다. 힘이 난다. 그래, 내가 여기서 밑바닥부터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 이십년 뒤에 차장을 달고 부장을 달아도, 지점장을 달아도 아침에 띠를 두르고 나와서 전단지를 돌리겠구나! 힘이 난다.
“안녕하세요, 그린은행입니다.”
십 분정도가 지나면 대사가 짧아진다. 할 말은 전단지에 충분히 적혀있으니까 관심이 있다면 읽겠지. 같은 인사를 반복하면서 머릿속에는 생각이 가득했다. 가만, 본사의 마케팅부서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 현수막 디자인? 홍보 모델 섭외? 정작 광고는 지점의 길거리 홍보로 일임해놓고 손님들이 좋은 상품을 알아봐주기를 기대하는 걸까?
안녕하세요, 그린은행입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 중 내 눈을 마주쳐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쪽에서 뭔가를 드리겠습니다, 주춤주춤 자세를 잡는 것만 보여도 고개를 홱 돌리고 보폭을 갑자기 늘리는 사람들뿐이다. 혹은 귀에 꽂은 이어폰 줄이 걸리지 않게 두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지나가거나. 무슨 말을 한들 들리겠어. 나는 차장님이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지점에서 멀리 걸어 나오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대충대충 전단지와 티슈만 안기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면 시선은 자연히 아래로 향하기 마련이다. 누가 오는지는 봐야겠고, 얼굴은 볼 일 없고…….
그런데 어쩐지, 저 멀리에서 이 쪽을 보더니 주춤거리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그럴 사람은 나랑 같은 입장으로 영업하는 사람이거나 우리 지점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일텐데. 하지만 굽 없는 살구색 신발, 그 위의 짙은 청색의 스키니진과 그 위에 펑퍼짐한 하얀색 블라우스는 어느쪽도 아닌 것 같았다. 더군다나 비율이 굉장히 좋았다…….
“오빠?”
들릴 리 없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쳤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동그란 눈알, 화장기 없이도 하얀 얼굴이 어리둥절함을 한 가득 안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출근하신 거에요?”
“어, 어…….”
놀람도 대답도 아닌 이상한 말로 얼버무리며, 나는 황급히 허리를 폈다. 다행히 다른 지점사람들로부터 멀리 걸어나와 있어서, 내가 이야기 하는 걸 볼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반면 주리는 아직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텐데…….
“물티슈 가질래?”
망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그대로 물티슈를 바라보던 주리는, 이내 살포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두 손으로 받았다. 아, 조금만 더 웃어서 그 때의 눈웃음을 보여줘……. 마음속으로 속삭이던 찰나, 주리는 한 마디만을 남기고 옆을 휙 지나쳐 걸어갔다.
“고생하시네요, 오빠.”
그렇게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동안 굳어있었다.
왜? 왜 별다른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쳐 간 걸까? 내가 창피해한 걸 안 걸까, 자기도 창피했던 걸까? 그렇게 고개를 숙여가며 전단지를 돌리는 내 모습이 보잘 것 없어 보였던 걸까?
주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실망했을까? 저 오빠 대기업 들어갔다더니, 길거리에서 전단지 돌리고 있다더라. 문득 이번 주에 교회에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맞이하면 어떨까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어쩌면 주리도 별 생각이 없을 수도 있어.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순식간에 지나쳤으니.
손에 남은 전단지가 묵직했지만 어영부영 걸어서 지점앞으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들고나온 분량을 소진한 듯 했지만, 역시나 차장님들은 조금씩 남아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남은 물티슈와 전단지를 받아들며 내가 남겨온 분량을 숨겼다.
“여러분, 내일부터 하복 입어도 된대요.”
차장님의 말조차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땀버벅이 된 목과 턱 주변을 연신 쓸어내리며, 내가 무슨 바보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자꾸만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