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2화

아파트

by 봄단풍


“고마워 승민아, 정말.”


현재 직장에 감사한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주말에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종종 출근을 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평일 야근으로 한 주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주말은 내게 꼭 휴식을 해야만 하는 성스러운 시간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아침부터 낡은 츄리닝에 목장갑을 끼고, 반팔 티셔츠에 수건을 걸친 채 아파트 문 앞에 나와서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예은누나와 두성이형은 아침 아홉시에 딱 맞춰서 등장했다. 쥐색 K3에 각자의 짐을 바리바리 실은 채로. 두 사람은 집을 구한 덕에 얼마전에 상견례를 마쳤지만 양가 부모님은 아직도 못 미더워하는 눈치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둘의 결혼을 발목잡을 일이 없자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 참 굉장한 일이다! 축하드린다는 말에 두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싸울 일만 남았다나.


“이삿짐 센터를 쓰면 좋은데, 큰 짐이 아직 별로 없어서…….”


그래서 내가 아침에 이렇게 나와있는 거다. 아직도 ROTC의 군기가 남아있는 두성이 형과 악수를 위해 재빨리 목장갑을 빼고 인사를 나눈 나는, 관리인이 이런 걸 도와줘야죠, 하며 일부러 넉살을 떨었다. 예은 누나도 두성이 형도 말로는 싸운다 어쩐다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했다. 그런 말에 웃어주시는 걸 보면.


짐을 옮기며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자니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결혼식은 최대한 빨리 잡기로 했단다. 두 사람 다 양가의 허락을 위해 오랫동안 싸워 온 터라 많이 지쳐있었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체력도 없다나. 그리고 곧 부모님들이 직접 집을 보러 오신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전에 대충 짐을 풀어놓고 사람 사는 집처럼 꾸밀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되게 깨끗하네!”


처음 현관문을 밀고 들어온 예은누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80년대 서울 근교에 지어진 단층 아파트의 허름함을 기대하고 들어온 누나에게 방 세 개짜리 아파트는 분명 놀랄만 했으리라. 기본적으로 하얀색 벽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기에, 가구하나 없이 텅 비어 있어도 그다지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빈 공간들은 새 학기를 시작하며 산 노트처럼 내 마음대로 꾸미고 채워야 할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결혼하면 고민하게 되겠지.


“진짜 가구만 들여놓으면 되겠다.”


어느새 다정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두성이형이었다. 이 형에게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도 나올 수 있구나. 늘 군인처럼 바짝 깎은 머리에 정자세로 움직이는 로봇같은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짐을 내려놓고 땀을 흘리며 예은누나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애처가였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형은 곧 어색하게 팔을 빼며 웃어보였다.


예은누나 부부가 가져온 짐은 한 번에 옮기기엔 많았다. 위가 열린 박스에 담긴 짐을 대충 거실 한복판에 내려놓은 뒤, 셋이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승민오빠!”


갑작스레 귀에 꽂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에 놀러왔던 후배인 성훈이와 주현이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지 둘은 청바지에 파란색 반티 차림으로 꽉 찬 배낭을 어깨에 맨 채 아파트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잠시 같이 고개를 돌렸던 예은누나와 두성이형은, 언뜻 보고 내 지인으로 알았는지 다시 차로 돌아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쩐 일이야?”


예의상 목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둘 다 두 손에 종이가방을 바리바리 들고 있었다. 쇼핑이라도 해온 건가, 싶었는데 어쩐지 주전자나 후라이팬 같은 다소 익숙한 물건들도 들어있었다. 설마 이 녀석들.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지만, 언덕을 올라오느라 상기된 얼굴로 숨을 고르는 두 후배에게서 그 모습을 눈치 챈 기색은 조금도 살펴볼 수 없었다.


“지난 번에 묵게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오빠.”


나이차이가 꽤 나는 편인데도 주현이는 넉살좋게 오빠라고 말을 걸어왔다. 본 건 지난 번 한 번이 전부인데. 애초에 붙임성이 좋은 모양이다. 통통한 볼에 하얀 피부는 분명 누구에게나 친근한 여동생 이미지이긴 했다. 슬쩍 뒤에서 아직도 헉헉대는 성훈이를 살펴봤다. 저녀석. 애초에 토요일 아침에 일어날 정도로 부지런한 녀석은 아닌데.


그래, 잘 놀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생각해보니 후배들이 놀고 간 이후로 그 집에 들어가보지를 않았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당연히 잘 치워놨겠지?


“이 짐은 다 뭐야? 나 주는 거야?”


억지로 농담아닌 농담을 꺼내봤다. 잠시 숨을 고르던 주현이는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오빠가 열어주신 집에 짐을 좀 놓을 게 있어서요.”


너네 집이니……? 울컥 입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말을 애써 억누르며, 도대체 둘이서 짐을 얼마나 가져왔는지 확인해볼 겸 뒤에 서 있는 성훈이를 살폈다. 둘 다 배낭에, 양 손에 쇼핑백이라. 아까 예은누나와 두성이형, 셋이서 옮긴 첫 짐의 양과 비슷해보였다. 거의 살림살이라는 얘긴데.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당연히 먼저 연락을 하고 올 줄 알았는데. 그리고 어쩌다 놀다가라는 거지 아예 누가 아지트를 삼으랬냐……. 하지만 이렇게 많은 짐을 들고온 후배들을 바로 돌려보내는 속좁은 선배가 되고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친해진 후배들인데. 잠깐 벗어들고 있던 목장갑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다가, 결국 난 천천히 몸을 옮겨 들어가라는 제스쳐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주현이는 활짝 웃어보이며 힘차게 발을 옮겼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던 성훈이는 재빨리 짐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후우, 한숨을 쉬고 다시금 몸을 돌렸다. 짐을 제대로 풀기전에 가서 조심히 쓰라고 한 마디 정도는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런데 차에서 짐을 옮기던 두성이 형과 예은누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 둘은 잠시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예은누나가 공동의 궁금증을 풀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학교 후배야?”

“응. 둘 다.”

“아……. 저 친구들도 아파트에서 사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빈 데 많아서 놀다가라고 했어.”


잠깐이었지만, 두성이 형의 미간에 못마땅함이 스쳐지나갔다. 예은누나는 대답을 듣고 짐을 옮기는 척 하더니 이내 잠시 두성이형의 얼굴을 살폈다.


“아 근데, 오기 전에 늘 먼저 연락할 거니까 걱정하지마.”

“아 아냐, 그런거. 그런 걱정은 안 해.”


두성이형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아직도 석연치않은 구석이 있는 듯 했다. 시끄러울까봐 문제인거면 둘 사는 데에서 먼 집으로 옮기면 될텐데.


“혹시 저 친구들도 세를 내니?”


차에서 뭔가 큰 상자를 내려놓던 두성이형은, 이내 숨을 고르며 후다닥 질문을 뱉어냈다. 찰싹.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예은누나의 손바닥이 두성이형의 팔뚝을 가볍게 때렸다.


“아이, 야 농담이야, 농담.”


그래. 농담이 아닌 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것 같다.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세를 굳이 안내도 된다고 했는데 내겠다고 한 게 누군데? 나는 뭐 켕기는 게 있어서 주말 아침부터 나와서 짐을 옮겨주는 건가? 이 형도 참.

황당함을 속으로만 삭히면서, 나는 차에서 다음 짐을 꺼내 안아들었다. 예은누나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며 형을 나무라긴 했지만 단순히 내 앞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안 되겠다. 지금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형, 여기 형이랑 누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들어와 있어요.”


나는 잠시 짐을 엘리베이터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친한 형, 동창들, 힘들어하는 친구들 몇 명을 같이 아파트에 받았지만, 딱히 세를 받지는 않는다. 종종 밥을 얻어먹는 정도지. 혹시 그게 불편하시면 집세같은 건 안주셔도 된다고.


“아……. 나는 혹시나 아무나 막 받고 그럴 까봐 그런거야. 아냐아냐 불편한 건 아냐.”


아무나 받는 게 어때서요? 겉으로는 웃어 보이며 고개를 손사래를 쳤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대답이 몇 번이고 메아리치고 있었다. 무슨 상관이신데요? 솔직히 예은누나와 친해서 내어주는 거지, 두성이형과는 딱히 인연이 없었다. 주말마다 교회에서 만나면 인사만 하고 헤어졌었지 같이 밥을 먹은 적도, 놀러다닌 적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본인이 직장을 잘 구했으면 고생하지도 않았을 일을…….


자꾸만 치밀어오르는 화를 짐 드는데에 쓰려고 열중하면서, 나는 그 이후로 하루종일 두성이 형의 시선을 마주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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