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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유랑기 #1.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진짜 철이 없구나.”

“세상에 맞는 직장이 어딨냐? 맞춰가는 거지.”

“너는 직장인들이 다 우습게 보이냐?”


퇴직. 지금 위에 써 있는 말은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거나, 혹은 상처를 준 뒤에 들은 말이 아니다. 그저 내가 다니던 회사에 퇴직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가족과 친구를 포함한 주변인들로부터 들은 말이다. 내가 크게 잘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난에 가까운 말들을 들었기에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곤 했었다. 사실 이런 말보다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부럽다, 였다. 부럽다 뒤에 이어진 말줄임표 서너 개까지. 왜일까, 왜 일을 하며 돈도 벌고 있는 사람들이 당장 일을 그만 둔 사람을 부러워하게 되는 걸까? 왜 직장을 그만 둔 사람에게는 다소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지는 걸까.


일단 퇴직을 고민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하는 일들을 앞으로 십년, 혹은 이십년 동안 해낼 자신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하루 열 두 시간은 가볍게 넘기는 근무시간, 급여가 들어와도 따질 틈도 없이 일할 수밖에 없는 업무 강도(물론 따질 틈 뿐만 아니라 쓸 틈도 없었기에 어느 정도 돈이 모이긴 했다). 업종 특성상 창문도 없는 곳이었고, 또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었기에 피곤이 더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해가 떴는지 졌는지 알 수 없고, 멍한 시선 따라 마음을 산책시킬 여유가 조금도 허락되지 않았던 공간.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손님의 따가운 시선이 꽂히고, 월말 평가에 반영될까봐 한 달 내내 마음 졸여야 했던 곳. 그 와중에, 그 손님에게 적합하든 하지 않든 프로모션으로 나온 상품을 무조건 추천하고 광고해야하는 영업 및 실적 압박까지.


‘요즘 같이 힘든 시대’에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는 감사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회의감이 들어오는 데에는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왜 이 직장을 선택했을까, 혹은 이 직장은 왜 나를 선택했을까?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취업 시장에 뛰어든 나는 정말 미련했던 걸까? 하다못해 반년이라도 휴학을 해서 내 자신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가진 다음에 미래를 선택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억울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듣고만 살았구나 싶었다. 항상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그 현재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는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항상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와 내가 벌게 될 돈을 걱정했으면서도,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사실 역시 현실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억울하다보니, 무서워졌다.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남들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먼저 걱정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려면, 돈을 벌어서 내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해.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하려면, 돈을 벌어서 굶지 않을 수 있어야 해.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려면, 남들 보기에 게임하는 게 부끄럽지 않게 버젓한 직장을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해.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려면 먼저 남에게 자랑할 수 있으면서 돈이 꾸준히 들어오고, 오랫동안 일 할 수 있는 회사를 다녀야 해. 문제는 그 남들 보기에 괜찮은 직장에 일단 다니게 되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직장을 다니며 만난 어르신들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냐?”


틀린 말은 아니다. 인생 살아가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게 된다면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인생을 살기는 어려울 거다. 하지만, 평생 싫어하는 일만 하는 것보다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좋아하고, 평생 할 만한 일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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