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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유랑기 #2.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나의 퇴직유랑기』 2화.


그랬다. 지금 당장 여기가 싫고 힘든 건 알겠는데, 그래서 자신있게 퇴사를 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뭘까, 평생 강한 신념을 가지고 내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은 뭘까?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당당하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부모님께 큰 절 올리며 제가 행복할 수 있는 길로 저는 당당히 걸어가겠습니다 하며 집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는 상상을 해도, 정작 내가 어떤 길로 가야할지를 모르겠다.


김이 빠졌다. 힘들면 뭐해, 못 버티겠으면 뭐해. 어르신들 말에 아무리 조곤조곤 반박할 수 있으면 뭐해, 정작 내 꿈이 뭔지도 모르는데. 사실 꿈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다가오는 월요일이 설레고,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우며, 야근을 해도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생각을 SNS에 올렸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잘 찾아봐’, ‘응원한다’ 거나, ‘그런 건 없다’, ‘포기하면 편하다’거나. 문제는 대부분이 응원을 하면서도, 그런 건 없으니 포기해라라는 글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랬고. 게다가 포기하라는 댓글을 달아주신 분 중에는 존경했던 선생님과 교수님도 계셨다.


고민이 길어졌다. 직장을 그만둬도 새로운 직장에 붙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대학 졸업장외에는 변변한 스펙도, 경력도 없었던 터였다. 분명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야 할텐데, 어디든 들어갈 수는 있을까? 막상 들어간다고 해도, 지금과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되면 다시 나와야하나, 참고 다녀야하나? 참고 다니면 내 인생은 그냥 그저 그런대로 참을만 해질 것인가, 아니면 지금보다 더 비참해질 것인가…….


드라마나 영화처럼, 고민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 책 어딘가에 적힌 글귀, 혹은 길가다 들은 선율에 실린 가사 한 구절, 그런 것들은 없었다. 고민에 고민에 또 이어진 고민과 고민 끝에 결정은 내가 직접 내려야 했다. 남들이 보기엔 꽤나 만족스러운, 허나 미래가 뻔히 보이는 삶.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느 방향이든 새로운 미래를 접하게 될 삶.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불만이 쌓이고 쌓여 점점 그 색이 짙어지면 불안이 자취를 감출만도 한데, 마음 속 걱정의 보따리는 그 용량에 제한이 없는 듯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선택의 고삐를 늦췄다.


하지만 버티기에도 한계가 있었던 걸까. 어느새 나는, 지금까지 모은 돈과 향후 나올 퇴직금을 계산하고 있었다.


첫째, 내 시간이 없고 둘째,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며 셋째,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난다 할지라도 이 삶의 양상은 변치 않을 것이며, 넷째, 그 시간동안 견딜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직장을 먼저 탐색하고 입사 한 후에 지금 이 직장을 나와 이직을 할 것인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어느 직장을 들어가도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결국 내리게 된 결정은 ‘퇴직 후 시간을 갖자’ 였다. 쉽게 말해 백수가 되자.


그래, 백수가 되자. 딱 육 개월만 쉬어보고, 그 다음 다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열정을 불사르며 취업문을 두드려보자. 그 때 가서 ‘아이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며 공채가 열린 회사의 면접실 문을 붙잡고 무릎을 꿇고 빌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후회 없는 선택을 하자. 못 가본 곳,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을 가보며 머리를 식히고 나 자신도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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