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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 유랑기 #3.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예전에 뮤지컬 시나리오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큰 기대를 안 하고 접수를 했는데 서류를 통과해서 굉장히 많이 준비를 하고 함께 음악을 준비했던 친구와 면접을 보러 갔었다. 결과는 시원하게 그 자리에서 탈락. 다만 면전에서 ‘뮤지컬의 ㅁ도 모르시네요’ 라든지, ‘알파벳도 모르면서 글을 쓰려고 하시네요’ 등등 다소 무례한 말들을 듣고도 제대로 대꾸조차 못했었다(애초에 뮤지컬은 M 아닌가? ㅁ도 알파벳이 아닐텐데) (그럴거면 애초에 서류를 왜 통과시킨거지)


지금도 그 기억은 트라우마 비슷하게 기억 한 구석에 남아있다. 매번 그 자리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끝나고 나서야 기억하는 편이라, 퇴직 전에도 걱정을 하긴 했다. 속 시원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고 나가면 어떡하지.


『차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퇴근 전에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평소에 업무차 아무렇지 않게 쓰던 메신저였지만, 그 날따라 엔터키가 왜 그리도 무겁게 느껴지던지. 평소보다 이른 저녁 8시경, 퇴근을 위해 아직 못 다한 업무 관련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며 답장을 기다렸다. 차장님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셨는지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왜? 어? 왜?”

“아 저 그게……. 저 쪽에서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차장님 자리로 다가가며 소근거렸다. 그러면서 손님과 상담할 때 쓰는 상담실을 두 손으로 가리키고 있자니 어쩐지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인터넷에서 읽어본 퇴직 후기 중에는 속 시원하게 욕하고 서류를 집어 던지고 온 사람부터, 이대로면 이 회사는 미래가 없습니다! 일침을 가하고 문을 발로 차며 나온 사람까지. 여러 가지로 참 속 시원한 이야기들이 많던데. 아무래도 내 성격상, 그런 드라마는 찍기가 힘들 것 같았다.


소근거렸지만 사무실에 있는 다른 직원들 모두가 들은 듯 했다. 못 들은 척 모두 모니터에 얼굴을 두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글쎄. 이 시간에 그렇게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컴퓨터에 집중한 적은 일 년 동안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제서야 차장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슥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습관처럼 넥타이와 셔츠를 살짝 가다듬은 차장님을 따라 상담실로 들어가는 사이, 정말 흔히 쓰는 표현인 ‘시선이 등 뒤에 꽂힌다’라는 표현이 어떤 기분인지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괜히 생겨난 말과 표현은 없는 것 같았다.


"뭔데?”


막상 차장님과 마주보고 앉으니 얘기는 술술 나왔다. 퇴직하려고 합니다. 저와 업무가 잘 맞지 않는 것 같고, 하고 싶은 일도 있어서요. 아무래도 쉬이 예상했던 주제는 아니었던 듯,차장님은 안경 너머로 당황한 눈초리를 굳이 숨기지 않으며 왜 그러냐는 말만 반복하셨다.


상담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애초에 ‘힘들어서 고민중이에요’가 아니라, ‘퇴직하려고 합니다’ 로 주제를 가져가서그런지, 퇴직일자를 비롯한 자세한 사항은 지점장님과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으로 십 분정도만에 마무리가 되었다. 사실 차장님이 ‘잘하고 있으면서 왜 그러냐’고 했을 때 할 말이 많았다. 평소에 잘한다고 해주시지, 왜 이제야……. 당연히 부서 직속이시니 관리차원에서 엄하게 하셨겠지만,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엄한 부분이 지나치게 사소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그랬다.


그리고 채 일주일이 지나지않아, 나는 지점장님의 호출을 받았다. 이미 차장님으로부터 나와의 이야기를 모두 전달받으신 상태에서 지점장님은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의 교장선생님, 훈련소 수료식의 교육사령관. 내가 지점장님께 일년 동안 받은 이미지는 그랬다. 업무시간에는 잘 안보이시는데, 회의시간마다 나타나셔서 당신께서 체득한 삶의 지혜를 나누고자 하시고, 그런 좋은 의도 때문에 회의시간이 길어져 비효율을 초래하곤 하시는.


“그래,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참 어색했다. 평소에는 대권씨, 혹은 대권아로 보통 높은 톤으로 버럭하시곤 했는데. 이렇게나 차분한 목소리라니. 그래서 나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그냥 이래저래 맞지 않고, 나가서 하고싶은 게 따로 있다고. 내가 언제 어디서 힘들었고, 또 당신의 어떤 것 때문에 감정이 상했고. 이런 자잘한 이야기들은 이상하게 얘기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 쪽보다 먼저 회사를 나간다! 는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인사부에 퇴직서류를 송부하고 후련하게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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