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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 유랑기 #4.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처음 한 달동안은 자유를 만끽했다. 회사 동기들을 찾아다니며 간만에 인사를 나누고, 차도 마시고. 마치 전역 후에 만난 훈련소 동기들처럼 괜히 반가워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도 했다. 일을 핑계로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만나고, 어르신들도 만나고. 응원과 격려도 들었지만, 꾸중과 날 선 비난도 간간이 들어야했다. 하지만 이미 갑작스런 자유에 중독되어서인지 그리 상처받지는 않았다. 그저 후련하고 좋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나자, 그 때서야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소중한 시간인데 그게 벌써 한 달이나 지나갔다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데! 마음은 급해졌는데 막상 손에 잡히는 일이 없었다. 멍하니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별 거 아닌 SNS을 뒤적거리면서 낄낄거리고, 그렇게 시침이 돌아가는 걸 멍하니 구경하곤 했다.


한 번 꺼진 불을 다시 살려내기에는 땔깜이 참 많이도 부족했다. 뭔가를 하겠다는 의욕보다는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쉬어야지 하는 보상심리가 좀 더 강하게 작용했다. 막상 퇴직하면 남들에게 들었던 욕이 우스워 보일 정도로 멋지게 살아야지 싶었는데. 만약 철없다고 놀린 누군가가 그 당시 내 삶을 들여다봤다면, 그것 보라며 코웃음치고는 뒤돌아섰을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을 찾으러 가겠다더니 결국 네가 직장을 나와서 하고 있는 것을 보라며.


그 생각에 미치자 결국 조바심이 보상심리를 이겨냈다. 일단 몸 곳곳에 깊숙이 자리잡은 나태를 벗어내려면 직장과는 다른, 새로운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매일 내가 졸업한 대학교로 출근을 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매일 같이 도서관이나, 혹은 근처 카페에서 자리를 잡고, 과거의 나처럼 열정과 방황을 동시에 내재한 대학생들을 보면서,


똑같이, 실없이 웃으며 SNS를 뒤적거렸다.


이유는 뻔했다. 좋은 습관을 들이더라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머리는 방황하고, 머리가 방황하니 손가락은 익숙한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는 수밖에.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나자 다시금 조바심이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당장 내가 뭘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일단 여기를 떠나보자. 내가 그동안 가보고 싶었는데 가보지 못했던 곳, 항상 가보고 싶어했던 곳. 여기를 가보지 않고 지금 당장 세상의 멸망이 온다면 너무나 억울해 저승에서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할 것만 같은 곳을 한 번 골라서 가보자. 물론, 내가 그동안 저축한 돈과 곧 나올 퇴직금이 허락하는 하에서.


그래. 여행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확신, 내가 회사를 나온 판단에 대한 확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잘못되지 않았음에 대한 확신. 그런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여태 살아왔던 공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어야 할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먼저 여행의 주제를 잡아보기로 했다. 첫째는 생각을 많이 하는 여행. 혼자 여행하며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생각을 많이 하는 여행을 하자. 많이 걸을 수 있고, 관광객에 몰려 이리저리 휩쓸리고 치이기보다, 한적한 곳에서 경치도 구경하고, 걷다가 한숨도 쉬면서 주변을 둘러만 봐도 행복할 수 있는 여행. 한 곳을 갔다가 조바심내며 오늘 안에 여기도 봐야 내일 편하게 저기를 볼 수 있다며 바쁘게 움직이기보다, 한 곳이라도 내 마음에 짙게 남길 수 있는 여행.


또 다른 주제는 위로였다. 그동안 늘 바쁘게 살아가던 나를 위로하자. 스물 일곱 인생 참 열심히도 살아냈는데, 이제 다시금 스펙 및 경력 부족으로 평가절하 받을지도 모르는 나를 위로하는 여행을 하자. 그동안 나는 절대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니고, 앞으로의 삶도 잘못되지 않을 거다. 잘 살아 왔으니 이런 경치도 보고, 이런 즐거움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세상앞에 담대하며, 내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한 인생을 살아왔고, 또 살아낼 거다. 그렇게 나 자신을 안고, 다독이고, 사랑할 수 있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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