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문제는 계획단계에서부터 발생했다. 유럽은 책이나 음악으로만 접했던 곳이라 어디부터, 무엇부터 봐야할지 막막했다. 일단 길부터 정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지도를 폈는데, 생각보다 복잡했다. 유럽은 진정한 가능성의 대륙인가, 어디로든 들어가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가고 싶었던 큰 나라들은 어찌나 서로 떨어져 있는지.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중에서도 유명한 나라는 어느 한 국가, 혹은 두 국가 정도를 제외해야 경로가 이상적으로 맞아 떨어지게 붙어있었다. 주사위에 붙어있는 숫자 5 모양으로 점을 찍어놓고 한 숨에 모든 점을 선으로 이어봐라, 단 지났던 점을 지나지 말고! 같은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막상 이어놓고 봐도 썩 그리 아름다운 모양은 아니었다. 여행에서 아름답지 않은 경로는 곧 추가적인 시간과 비용을 의미했다.
『여보세요? 저 있잖아…….”』
그래서 일단, 지인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유럽을 다녀온 사람은 아는 사람중에도 몇 몇 있었고, 직접 다녀온 사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이탈리아! 형 이탈리아는 꼭 가봐야해요.』
『유럽은 영국이지. 야 런던만 가지 말고 일단 영국 북쪽으로 가면…….』
『기왕 가는 김에 스페인 클럽도 한 번 들러줘. 클럽 가본 적은 있냐?』
『나는 개인적으로 체코가 좋더라. 체코에 가면 그 꼴레뇨라는 게…… 근데 너 회사는 어떡하고?』
『오빠 솔직히 진짜 유럽은 동유럽이에요. 러시아에서 나오는 건 어때요?』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영국에서 북쪽을 통해 들어갔다가 런던으로 가서, 스페인으로 이동한 뒤에 이탈리아를 찍고 체코를 통해 동유럽을 거쳐 러시아에서 나오면 되는 구나.
어.....
이렇게 알차게 유럽의 알멩이만 빼놓고 도는 루트도 없는 것 같다.
무턱대고 지인들의 조언을 전부 종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 분명 인터넷 검색과는 다른 생생한 조언들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내게 주어진 예산과 시간 안에 적합한 도시와 이동수단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감수가 필요했다.
『비행기 표는 예약하셨어요?』
『아니 아직!』
『세상에……. 일단 카페부터 가입하고 찾아보세요.』
보다 많은 정보가 없이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인의 추천을 받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유럽 여행 카페에 가입했고, 교통편과 나라별 볼거리 등 내가 몰랐던 것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동안 심도있는 검색결과, 나는 여행 계획을 마침내 수립할 수 있었다!
부분계획, 부분 즉흥으로 가보자(...)
런던을 시작으로 파리를 거쳐, 유럽의 어디든 떠돌아다니다가, 프라하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 예약은 왕복 비행기 티켓(런던 in, 프라하 out)과 런던에서의 한인 민박, 런던→파리의 유로스타와 파리에서의 민박이 끝이었다. 첫 주를 제외한 나머지를 즉흥으로 해야하는 셈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만의’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여행과 음악의 공통점은, 함께한 사람이 기억에 남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그럼 여행을 나혼자 떠나면 무엇이 기억에 남을까!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까, 아니면 함께 한 나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해 의미있는 발견을 하게 될까?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집에서 선반처럼 쓰이던 커다란 트렁크를 힘겹게 끄집어 내 먼지도 털기 전에 그 입을 벌려 차곡차곡 옷들을 접어 넣고. 설레고 흥분되면서도, 출발일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기대되면서도 두렵고, 얼른 가고 싶으면서도 준비가 덜 된 것 같은, 개강일을 앞둔 대학생 마냥 묘한 긴장감이 마음에 자리잡았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이런 긴장감을 느껴본 적 없었다. 그저 출근 전에는 무섭고, 출근 후에는 정신(혹은 자아)이 없었고, 퇴근 후에는 다음날 출근이 두려웠다. 설레면서도 무섭고……그런 복합적인 감정은 애초에 생겨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는 동료들, 선배들, 모두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왜일까? 우리가 살면서 선택하고 갖게 되는 직장은 우리 삶의 절반을 함께 할 친구이자 터전이니 당연히 즐거워야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살면서 즐거운 일만 하겠어’,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해’. 직장에 먼저 다닌 선배들은 보통 이 두 문장으로 이런 기이한 현상을 납득하곤 했다. 합치면, ‘좋아하는 일을 직장으로 삼기에는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다’가 된다.
생각해보면 비슷한 의문을 학창시절에도 가지곤 했다. 분명 주어진 재능은 각자가 다 다르고 세상에는 그 모두를 포용할만큼 다양한 분야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왜 우리 모두 수능을 보고 대학을 가야하는 걸까. 당연히 가질만한 의문인데, 요즘에는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그 의문을 가진 사람의 정신적인 성숙도를 평가하곤 한다.
모두가 알고 있다. 부모님들, 학교 선배와 선생님들, 교수님들, 직장인 동기와 선배들까지. 모두가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모두가 뱉는 대답은 한결같다. “네가 나중에 크면, 이 모든 부조리들을 바꿔보렴.” 대부분의 어르신(으로 대표되는 사회 및 직장 선배)들은 이러한 사회 현상을 고치기보다 가르치려하고, 그 현상 유지에 일조하는 것을 적응했다하며 뿌듯해하곤 했다.
우리가 느끼는 부조리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 높은 위치에 가면 편해지는 일이 많아서일까? 그 때문에 부조리를 개선한다는 것 자체가 나의 혜택을 뺏어가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초에 이 모든 불편함이 부조리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인걸까?
우리가 가지는 의문이 십년 전이라고, 이십 년 전이라고 없었을 리가 없다. 분명 그 때도 미뤘기 때문에 여태 이 문제가 점점 더 고착화하는 것일진대, 대답이 변하질 않으니 사회도 변하는 게 없다. 바꾸려면 지금 그 현장에 있는 사람부터 바뀌어야 한다. 어린 사람들, 아직 꿈꾸는 사람들에게 떠넘길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