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나의 퇴직유랑기 #6.
서울 → 런던(인천 → 히드로)
5월 9일 아침. 비행기 시간이 13시 30분이었기에, 평소처럼 늦잠을 자려다가 8시에 일어났다! 사실 여행 며칠 전까지는 설레서 잠을 못자기도 했었는데, 오히려 전날은 푹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아침을 안 먹으면 컨디션 조절이 힘든 허약한 체질이라 전날 미리 사둔 샌드위치를 꼭꼭 씹어 먹고, 도심 공항 터미널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10시 경에 탔다.
도심공항 터미널은 생각보다 편리했다. 왕복 버스표는 물론이고 출국 수속도 할 수 있었는데, 공항과는 달리 아침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10분만에 출국 수속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는 어디로 쉽게 통과하면 된다고 설명을 들은 후 설레는 맘을 안고 버스를 탔다. 사실 나는 여행자체보다도, 버스로 이동하면서 창밖을 보거나, 비행기로 이동하면서 영화를 보는 소소한 부분들을 참 좋아했다. 설레는 맘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딱히 힘든 건 없으니까.
익숙한 도로, 건물들을 지나는 데도 기분은 평소와 달랐다. 빈틈없이 높이 솟은 회색빛 오피스텔 건물부터, 하얀 페인트 사이사이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금이 그어진 낡은 건물들까지.매일 스쳐지나가는 풍경이지만, 그 날 하루만큼은 오래도록 봐왔던 친구처럼 친근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얘들아, 한 달 뒤에 보자. 그 때 너희는 얼마나 바뀌어있을까? 나는 또 얼마나 바뀌어 있을까…….
공항에 도착하니 출국수속을 밟는 줄은 역시나 길었다. 다들 목적이 다르겠지만 평일 아침에도 출국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신기했다. 비행기를 타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 백화점처럼 평일 낮에는 한가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게 틀린 듯 했다. 사실 백화점도 그렇게 많이 가보지는 않았는데 그 둘을 비슷하게 생각한 것도 신기했다.
들어가기 전, 나는 마지막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한식당을 찾았다. 유럽의 문화에 푹 젖어오겠다는 마음에 컵라면과 고추장 등 식료품을 일체 담지 않은 터였다. 그렇게 나는 한식당에서라면(...)을 시켜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공항의 라면은 버섯의 냄새가 강해 원했던 라면의 느낌을 얻을 순 없었다. 평소의 건강이 나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곤 했던 맵고 짠 라면의 맛을 기대했던 나는 어딘가 부족한 포만감을 안고 일어났다.
뜨끈해진 배를 살살 두드리며, 도심공항 터미널 전용 출국 수속장을 지나 순식간에 면세점으로 들어섰다. 오기 전 계획했던 대로 출국 전 한시간 반 정도가 남은 시간이었기에 천천히 둘러보며 필요한 걸 사리라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면세점은 컸고 종류도 다양했다. 과연 공항평가 11년 연속 1위 공항. 돌아올 때 지인들을 위한 선물을 지금 아예 다 사버릴까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들고 다닐 생각을 하니……. 고개를 젓고 필요한 것만 사리라 다짐했다.
짐을 며칠 전부터 챙겼음에도 부족한 건 있었다! 유럽의 따가운 햇살을 견뎌낼 선크림과 선글라스. 안 그래도 피부색이 어두운 편이라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사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부주의했던 면이 컸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을 통해서 선크림 바르는 습관도 들이고 선글라스로 눈도 보호해야겠다하는 마음에 통크게 그 둘을 구매했다.
어차피 비행기에 열 한시간 정도 있을테니 선크림은 배낭에 넣고, 선글라스는 포장을 뜯어 입고 있던 셔츠 맨 위쪽 단추에 걸어두자니 진정한 여행객이 된 것만 같았다. 한국을 실컷 둘러보고 떠나는 외국인처럼 여기저기서 셀카를 찍고 있으니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고, 안내 방송이 나오고. 면세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구경하며 나는 천천히 출국장으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