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나의 퇴직유랑기 #7.
방송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길게 늘어진 줄을 잠시 보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어차피 때 되면 알아서 들어갈텐데 그냥 마지막에 들어갈까……. 문득 이것도, 우리나라기 때문에 겪는 현상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에이 뭐 줄서는 거야. 어느나라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나조차도 늦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결국 줄을 서서 탑승을 기다리긴 했다.
홀로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기대했던 것은, 여행중에 만나는 새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행의 출발인 비행기의 옆좌석 손님을 나는 꽤나 기대했다. 장장 열 한 시간동안의 비행이며,내내 같이 앉아있을테니 할 얘기도 많겠지. 누가 앉을까, 인생 경험 참 많은 인자한 어르신이 앉았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신혼 느낌의 젊은 남녀가 창측에 붙어 앉아있었다.
배낭을 메고 통로쪽 자리로 가며, 순식간에 많은 질문들이 생겨났다! 세상에, 부부세요? 영국으로 신혼여행 가시는 거에요? 아 신혼은 아니시구나. 아니 두 분 다 너무 젊어보이세요!영국은 어떻게 가게 되신 거에요? 아유 저는 이래저래해서……. 물론 평소에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터라 대화는 금방 끊어졌다.
‘그래도 부부끼리 왔는데 조용히 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
결국 나는 묵묵히 헤드셋을 머리에 끼고 영화만 내리 시청했다. 절대 내가 소심해서가 아니다. 내 자신의 알량한 호기심보다 옆 사람의 소중한 열 한 시간을 배려해드린 것 뿐이다. 그래도 앞으로 새로운 사람 만나면 시도할 대화법을 이미지 트레이닝 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마침 비행기 영화 목록에 스타워즈 시리즈가 전편이 있었다. 어렸을 때 처음 접한 공상과학 영화가 아버지가 녹화해두신 스타워즈6 더빙판이었던 터라, 바로 에피소드 1부터 재생을 시작했다. 어렸을 땐 그렇게도 광선검을 휘두르고 포스로 물건을 집던 제다이가 멋있어 보였다. 나도 포스를 쓸 수 있다면, 광선검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형과는 늘 토론을 했었다. 진정한 광선검은 파란색인가 초록색인가. 형이 어쩌다가 ‘가만보면 빨간색도 멋있긴 함’ 이라고 하면, 나는 형을 민족의 반역자처럼 쳐다보며 파란색이라고 우기곤 했다. 나이가 들면 취향도 바뀌는 걸까, 에피소드 7의 영향이 큰 걸까, 아니면 형에게 무의식중에 설득을 당한 걸까, 나도 지금은 초록색의 느낌을 더 좋아한다. 파란색보다 초록색이 좀 더 마스터 제다이의 느낌이 난다고 해야하나.
어느새 시간이 지나서인지, 혹은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혹은 그냥 예나 지금이나 겁이 많아서인지 스타워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누가 가장 강한가, 요다는 죽은 것일까 살아있는 것일까, 내가 광선검을 휘두를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들을 하곤 했었는데. 요즘은 내가 제다이가 되면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 제다이라면 참 괜찮은 직업 같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만약 내가 제다이가 된다면 정말 열심히 일할 것 같다. 하루도 안 빠지고 포스 수련을 하고,검법 연마도 하고, 외교를 위해 책도 많이 읽고 사람도 많이 접하고. 각 나라 혹은 부족들의 예절을 배우며 경험을 쌓고, 마스터 칭호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 현장으로 파견도 나가고! 하루종일 질리지도 않고 필요하다면 주말도 써가며 야근해도 즐거울 것 같다. 단 하나, 목숨이 위태위태하다는 단점만 뺀다면야…….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최고의 직업은 교육분야인 듯 싶었다. 제다이 교육이라면 안전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으며, 목숨 걸 일도 없을테니(물론 아나킨이 한 번 휩쓸어 놓은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이래서 회사는 인사부와 인재개발부가, 군대도 교육 및 보훈처가 모든 이들의 워너비인 듯 했다. 아니 애초에 교사란 직업 자체가 최고의 직업이라는 말을 듣잖아?
요즘에는 그러고보니, 무슨 작품을 접해도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게임을 하면 게임에 나오는 직업을 동경하고, 히어로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능력보다 다른 인물들의 재산이나 부를 동경하고. 다큐멘터리를 봐도 언뜻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득명세가 궁금하며, 책을 읽어도 이 책의 저자는 인세를 얼마나 받을까가 궁금해하다가 잠에 든다.
그래서 공상과학이나 판타지를 놓지 못하는 것 같다. 동경을 해도 현실과 괴리가 심하니,동경으로만 끝낼 수가 있잖아.
막 스타워즈 한 편이 끝났을 때 쯤, 기내 승무원분들께서 입국심사서류를 나눠주셨다.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물어가며 대략적으로 다 채웠는데, 모든 칸을 대문자로 채워야하는 게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런던의 입국심사가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기 때문에 나는 시험지 작성하듯 최대한 정성스레 칸을 채웠다.
런던 체류일자, 런던에서의 주소, 런던 다음 목적지 등등 소소하다고 느낄만한 것들을 다 채운 뒤에 직업란이 나왔다. 새끼손가락 두마디 정도 길이의 칸을 나는 멍하니 응시하다가,딱 그 칸만 빈자리로 남겨뒀다.
기내 에어컨이 생각보다 강했다. 나는 그 때에서야 기내 담요를 두르고 헤드셋을 살짝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