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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유랑기 #8. 런던 입국심사(1)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나의 퇴직유랑기 #8. 런던 입국심사(1)


5월 9일 오후 여섯시, 런던 히드로 공항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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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영국이었기에 긴장을 많이 했다. 줄 서서 기다리다보니 어느새 내 앞에 손님이 두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갑자기 공항 직원이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내가 가까이 있어서 눈이 마주쳤는데, 그것을 영어를 잘한다 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건지 직원은 나에게 손짓을 했다.


어……. 큰일인데.


영어공부래봤자 수능영어, 대학영어, 그리고 취업준비를 위한 토플과 토익이 전부였던 나였기에 그 짧은 순간에 생각이 많아졌다. 입시영어가 전부인 내가, 런던에 관광을 온 다른 한국인보다 더 나은 영어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통역이 필요해서 날 부른 것 같은데 나도 똑같이 어리버리하면…….설마 그 사람과 같이 붙잡히거나 어디 구류되는 건 아니겠지. 설사 그런 일이 생겨도 일단 혼자는 아닐테니 다행이다…….


자신없는 발걸음으로 어기적 어기적 기어갔더니, 한국인 남녀가 심사관 앞에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왜인지 첫인상부터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 같았다. 그냥 지금이라도 쏘리를 내뱉고 날 기억 못하게 줄 맨 뒤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다! 그런데 날 데려온 공항직원이 그 큰 몸으로 너무나 절도있고 정중한 동작으로 나를 앞에 세워서, 또 답답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심사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땡큐를 연발해서 도무지 뒤로 도망갈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대신 이 분들 마무리 되면 바로 먼저 해드릴게요.”


다행히 뜻은 알아들었지만 영어로 어떻게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도 연신 땡큐를 연발하며 문제가 뭐냐고 물었더니, 심사관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문제를 얘기했다.


“이 두분 남매라는데, 런던에서 숙소가 다르네요. 왜 그런지 좀 물어봐주실래요?”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수능영어도 듣기평가는 어렵지 않았고, 토익 토플 등 어학시험도 리스닝과 리딩은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스피킹이 문제였지. 입시영어의 전형적인 한계를 품은 나로서는 지금부터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닌 듯 했다. 얼핏 여행 전에 가입했던 유럽여행 카페에서 런던의 입국심사 때는 런던에서 체류할 경우 그 정확한 주소나 장소를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나도 예약했던 숙소에 문의해서 주소를 받아놓은 상태고.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입국심사 서류에도 런던 체류시 주소를 적는 란이 있다.


나와 연배가 비슷해보이는 두 남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심사관의 내용을 확인할 겸 두 분이 남매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 그냥 의남매라고 해주실 수 있어요?”

“네?”


이상하다. 분명 난 영어에 당황할 줄 알았는데, 한국어에 먼저 당황했다. 아니 그 깐깐하다는 런던 입국심사장에서 의남매가 무슨 말……혹시 내가 미처 공부하지 못한 드립인가 이거.


“의남매요?”

“네네.”


혹시나해서 다시 물어봤는데도 두 남녀가 정말 반가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네, 라고만 대답하자 당황은 적잖이 커졌다. 의남매를 영어로 뭐라고 하더라……. 아니 근데 입국 심사에서 의남매라는 말을 해도 되는 건가?


뒤통수가 따갑다. 퇴직상담을 하러 상담실을 들어갈 때처럼 등 뒤에 심사관의 눈빛이 서늘하게 꽂혔다. 영화 타짜의 고니가 아귀의 선글라스 너머로 관찰을 당하며 ‘차갑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별 거 아닌 일이지만 당황한 내색을 하면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나는 얼른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이 세상 가장 사람좋은 미소로 잠시 심사관을 바라본 뒤에, 나는 차분히 두 여행자(로 사료되는 남녀)에게 말을 꺼냈다. 심사관은 두 분 남매로 알고 있는데, 왜 남매가 같은 숙소에 묵지 않는지 궁금해한다고. 그랬더니 여자분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그게……그냥 수속 빨리 밟고 싶어서, 남매라고 하고 같이 온거거든요.”

“그럼 두 분 남매가 아니에요?”

“네. 오늘 비행기에서 처음 만났어요.”


세상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을 뻔 했다.

하지만 심사관은 그런 리액션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저기요(Hey Hey 라고 했다. 자우림인줄). 질문은 제가 하고 두 분은 대답만 하고, 당신은 통역만 해줘요. 왜 남매인데 숙소가 다릅니까? 런던 체류 예정일도 다르던데 런던에서 아예 따로 다니시는 건가요? 같이 다니시는 건가요?”


아니 이 사람 빨리 대답하라더니 왜 질문을 더 많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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