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나의 퇴직유랑기 #9. 런던 입국 심사(2)
“저기요. 질문은 제가 하고 두 분은 대답만 하고, 당신은 통역만 해줘요. 왜 남매인데 숙소가 다릅니까? 런던 체류 예정일도 다르던데 런던에서 아예 따로 다니시는 건가요? 같이 다니시는 건가요?”
아니 이 사람, 빨리 대답하라더니 왜 질문을 더 많이해……라고 하면 큰일 나겠지. 나는 얼른 다시 그 질문을 그대로 두 사람에게 전했다. 두 사람은 일정이 다르긴 한데 뭐 날 맞으면 하루 쯤 같이 보고……. 식으로 대답하길래 그냥 따로 다니는 걸로 전달했더니, 심사관은 한 명씩 어딜 갈 예정인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그 정도는 그 두 분도 각자 듣고 대답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질문은 더 길게 이어졌다. 현금은 얼마나 들고왔는지, 카드는 가져왔는지, 카드에는 돈이 파운드화 기준으로 얼마나 들어있는지, 그러다가 다시 남매인데 왜 숙소가 다르냐는 문제로 회귀하고. 그렇게 오 분가량을 더 씨름하다가, 심사관은 도저히 안되겠는지 나에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했다.
“아니, 남매가 같이 여행을 왔는데 왜 따로 다닙니까? 전 도저히 납득이 안되네요(It doesn't make any sense to me라고 했던 것 같다)”
나는 흘끗 두 한국인 여행객을 다시 봤다. 줄이 밀려도 워낙 창구가 많아서 다른 손님들이야 수속을 잘 밟고 있었지만, 시간이 오래걸리니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이 쯤되자 나도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정말 못알아듣는 척 하고 가만히 있을 걸…….
“남매가……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그렇대요.”
토로를 하면서도 내 대답을 기다리며 뚫어져라 쳐다보길래, 나는 어영부영 대답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다. 심지어 다른 창구랑 다르게 이 분은 뒤에 다른 심사관과 같이 앉아있었다. 이대일이라니……. 의남매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는 사대일로 싸우는 기분이었다.
그 대답을 끝으로 심사관은 두 사람의 여권에 도장을 쾅쾅 찍었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그 사람은 피곤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바로 처리를 해주겠다며 여권을 요구했다. 아이 보람차다. 다행히 나는 혼자 여행왔고, 주소도 완벽했으니 수속은 금방 끝날 것 같았다. 입국심사 서류도 비행기에서 꽉 들어차게 써뒀다.
“직업이 없네요?”
딱 한 자리만 빼고.
“네. 한 달 전에 퇴직했어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은행에서 일했었습니다.”
“왜 퇴직했죠?”
와. 정말 깐깐하구나 런던.
헷갈렸다. 영어라서 대답하기 힘들었던 건지, 한국어였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할 주제라서 대답하기 힘들었던 건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행복하지 않아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행복하지 않았다라.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한 심사관은 잠시 한숨을 쉬더니 이내 다른 것들을 물어봤다. 현금을 가져왔느냐, 카드를 가져왔느냐, 카드에는 얼마정도 들어있느냐 등등. 앞에서 했던 질문들을 반복하더니 이내 혀를 차며 도장을 찍어줬다.
심사관은 도장을 찍으면서도 내가 방금 전까지 통역해줬다는 사실을 까먹은건지, 아니면 내가 들으라고 한 건지 이거 보라며,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포기를 잘하냐며 투덜거렸다. 헷갈렸다. 어느 나라에나 꼰대는 있는건지, 어느 나라가 구직상황이 비슷한건지.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국심사장을 빠져나왔다.
심사장을 나와보니 앞서 의남매라 했던 한국인 여행객 두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서 기다렸다고. 그런데 정작 내 심사도 오래걸려서 되려 미안해졌다. 마침 타국 땅에서도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각자 숙소로 갈 때까지 같이 이동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에서의 교통권도 함께 구매했다. 이런저런 티켓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오이스터카드(Oyster)가 가장 적합한 듯 했다. 필요한만큼 충전할 수 있고, 하루에 최대로 빠져나가는 금액도 정해져있고, 나중에 보증금도 돌려받을 수 있고. 자판기를 쓰자니 줄도 길고 한 명 한 명 오래걸리는 걸로 보아 조작이 쉽지 않았것 같아 나는 그 옆 슈퍼마켓 창구에서 구입했다. 보증금 포함 약 25파운드.
그렇게 세 사람이 함께 런던 지하철에 올랐다. 히드로공항이 런던 외곽에 멀리 있었는데, 각자 가는 곳은 달랐지만 중심지로 가다보니 꽤 오랜 시간 함께 이동하게 됐다. 킹스크로스역 근처 숙소로 예약한 나는 갈아타는 일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런던의 지하철은 그리 넓지 않았다. 마주보고 앉으면 가운데 트렁크 하나 겨우 들어갈 자리만 남았기에, 겁이 많아 소매치기와 강도를 가장 불안해했던 나는 문 옆 짐놓는 공간에 트렁크를 세우고 그 위에 앉았다. 그 편이 길을 막지도 않고 짐도 안전하게 같이 갈 수 있는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만났다는 두 사람 중 남자분은 나보다 한 살이 많은 형이었다. 역시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떠난 여행이라고. 운동을 좀 해봤기에 학교에서 축구를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나왔다는 그 형은 붙임성이 좋았다. 런던에서 며칠 있다가 파리에서 친구들을 만나 같이 여행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여자분은 스물 한 살의 대학생이었다! 혼자 여행을 하기에는 어린 나이 같기도 했지만 가장 신기했던 건 여행 계획이 삼개월정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캐리어가 우리 셋 중에 가장 컸다. 그 정도면 정말 유럽을 전부 다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 나이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스물 한 살에 뭘 했나……. 생각해보니 그 때 막 입대를 했었다. 육군은 다들 가니 싫고, 해병대는 힘들어서 싫고, 공군은 너무 길어서 싫고. 그런 하찮은 이유로 해군을 지원하고 냅다 갔는데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천안함 사태가 터졌고, 적응할 때 쯤에는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났으며, 말년 휴가를 나오기 직전 김정일 사망으로……. 영 쉽지 않은 군생활이었다.
물론 군대에서도 이런 여행을 꿈 꿔본 적은 없었다. 늘 전역하면 어떻게 복학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을까, 어떻게 처진 나의 인생을 다시금 앞서나가게 할 수 있을까하는 조바심을 달래기 바빴다. 방학 때 한 번 정도, 혹은 한 학기 정도 휴학하고 세계일주나 유럽여행을 떠나는 것을 생각해보긴 했지만 늘 생각에서만 그치곤 했다.
그래서 직장을 관두고 나온 나 자신도 꽤 용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건 나같은 결단을 내린 사람은 은근히 많으며, 나보다 더한 용기를 낸 사람도 꽤 많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