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나의 퇴직유랑기 #10.
지하철을 탄지 한 시간 정도 후에, 나는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미리 구입한 유심칩을 미리 바꿔 놓은 상태였고, 숙소까지의 약도도 다운받아놨기 때문에 딱히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여행의 시작이다. 교통권도 구매했겠다, 이제 숙소만 잘 들어가면 안심하고 여행을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역 밖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쯤, 런던에는 비가 한창 내리고 있었다.
시작이 우울해진 기분이었다. 분명 영국에 비가 자주 온다고 얘기했던 걸 들었던 것 같았다. 역시나 누가 어디서 말한건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가방에 겨우 들어가는 작은 삼단우산을 펴고, 도착하면 픽업을 나오기로 했던 민박집 사장님을 기다렸다.
빗속에서 가만히 서있자니 불안했다. 캐리어에 배낭에 작은 여행용 가방까지, 내 행색은 누가봐도 방금 런던에 도착한 여행객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았고, 어디선가 허리춤에 작은 총을 숨겨놓은 강도 두세명이 금방이라도 일행인 척 와락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집에서 혼자 공포게임을 할 때처럼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곧 나오신다는 사장님을 찾았다.
한시간 같은 이십분이 지난 후에, 사장님이 슬리퍼를 신고 뛰어나오셨다. 그런데 비가 꽤 오는데 우산없이 그냥 나오시길래 우산을 씌워드렸더니 괜찮다며 마다하셨다. 런던에서 이 정도 비는 다들 맞고 다닌다고. 보통은 비가 와도 맞고 다니며, 빗줄기가 세지면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하며 그치길 기다린다고 하셨다. 관광객과 현지인을 구분하는 게 우산을 쓰고 안 쓰고의 차이라나……. 문득 부산에 아는 형과 놀러갔을 때, 겨울 부산에서 패딩을 입고 다니면 현지인, 덥다고 벗고 다니면 서울사람이라고 구분하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숙소 방향이 내가 알아온 방향과 다르다. 알고봤더니 예약이 엉켜서, 나는 다른 한인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고 내일 아침에 또 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내리자마자 비에 숙소까지 엉키다니. 크게 마음먹고 온 여행의 첫 단추가 쉽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 남은 침대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내려오니 그래도 피로가 어느정도는 풀린 듯 했다. 아직 잠도 안 오는데 산책이나 할까 하다가, 여행 계획을 세워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숙소 안에는 오래 거주하고 있는 듯한 분들이 몇 명 앉아계셨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 때였다. 거실에 놓인 모니터가 켜지면서 트와이스의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온 것은.
사실 군대를 전역한 이후로 음악방송을 자주 보지는 않았었다. 군대에서야 엠넷이 거의 기상나팔과 동급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억지로(계급이 오를수록 점점 자의로) 아이돌을 비롯한 연예계 신인 데뷔 현황과 신곡 발매 현황을 잘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다른 곳에 더 재미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이돌 시장이 워낙 유입과 이탈이 많았기 때문에 매번 파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면 아이돌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안무와 함께 뮤비를 본 것은 이번이 전역 이후 처음이었다. 트와이스의 Cheer up이라는 뮤비였는데, 세상에. 마음이 어딘가 간질간질하면서도 귀엽다는 느낌이 가슴 한 구석을 은혜롭게 가득 채웠다. 한 명 한 명 이름도 모르고 생김새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노래는 정말 나로 하여금 힘을 내도록 만들었다. 아직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거기 있던 남자분들과 대화가 텄다. 한 분은 아일랜드로 유학을 왔으나, 잠시 사장님을 따라 런던에서 알바처럼 구개월 째 일을 하고 있는 두 살 어린 동생이었다. 다음주면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간다며 우울해했던 것 같다. 말도 친절하고, 뭣보다 처음보는데도 방금 사온 두 병의 맥주를 건네며 이야기를 나눈 걸 보면 엄청 착했다. 그럼. 먹을 것을, 그것도 평일 저녁에 트와이스 뮤비앞에서 맥주를 나눠줄 정도면 엄청 착한 거다.
다른 한 명 역시 두 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년 가까이 일을 하다가 퇴직하고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했다. 혼자 여행을 왔는데, 다시 돌아가면 학교를 일단 다니기는 하는데 방학마다 일했던 휴게소에서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평소에 자주 접하던 일터가 아니었기에 휴게소에서의 근무를 묻게 됐다. 한 달동안 주말 평일 구분없이일하면서 딱 두 번 쉰다고. 대신 가게 매출은 엄청나다며, 하루에 천만원 가까이 물량이 나간적도 있다고 했다. 대신 자기처럼 오래 일하는 사람은 몇 명 없고 대부분 단기알바로 왔다가 바로 간다고도 했다.
“출퇴근은 그럼 어떻게 해요?”
제일 궁금했다. 차로 매번 출퇴근을 하는 건가, 그럼 기름값이 장난 아닐텐데. 그 분은 자기는 학생이라 차가 없고 근처에 직원용 숙소가 따로 있다고 했다. 그래서 흔한 학교 기숙사가 그러하듯, 직원들 사이에 연애전선이 흔하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존재한다고도 했다.
속으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한 달에 겨우 두 번 휴가가 나오는데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숙소가 직장 근처에 있다면, 출근은 몰라도 퇴근이란 것의 시간 기준이 굉장히 모호해지는 것은 당연해보였다. 더군다나 휴게소에서 판매를 맡고 있었다는데, 그럼 고객과의 접촉이 상당했던 위치였을텐데 그 일을 일년이나 가까이 버텼다는 것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어디에서 일하셨었어요……?”
아직 처음 만나 형이라는 표현이 어색했던 것일까, 나보다 키도 크고 피부도 조금 더 까무잡잡한 그 분은 그렇게 물었다. 나는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은행에서 일 했었고, 이런 것 때문에 퇴직을 하고 이렇게 여행을 왔다. 그러자 아까 처음 맥주를 나눠주었던 분이 반갑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그런 분 되게 많아요. 퇴직하고 오신 분. 그러고보니 은행 직원들끼리 오신 분들도 계신데?”
“오 정말요?”
세상은 재밌다. 같은 상황속에서도 나와 대처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게임의 새로운 공략법을 찾은 것처럼 반갑고 신난다. 역시 어딜가나 힘든 상황의 답은 좋은 사람들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