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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유랑기 #11. 영국박물관(1)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나의 퇴직유랑기 #11. 영국박물관(1)


도착한 첫 날은 비도 오고, 숙소도 다른 곳에 들어갔기에 푹 쉬었다. 한인 민박이라 나처럼 새로운 시선, 새로운 만남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저녁에는 편하게 맥주를 한 잔씩 나누며 수다를 떨었고, 나는 내심 속으로 내일부터는 열심히 돌아다니리라 이를 갈았다.


시차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다. 열 두시 정도에 누워서 바로 잠이 들었고, 여섯시 정도에 눈이 저절로 떠져서 다시 한 시간 정도를 더 자고 일어났다. 비행기에서 엉킨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첫 날이라는 생각으로 일어나서 그런지 활력이 넘치는 듯 했다.


아침을 먹고 본격적인 관광을 시작하기 전 나는 민박집 사장님과 함께 먼저 짐을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옮길 거라면 저녁에 옮기느라 하루종일 신경을 쓰기 보다는, 아침에 미리 옮겨놓고 맘편히 관광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아침, 캐리어와 배낭을 끄는 그 아침에도 비가 물안개처럼 보슬보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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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사장님은 생각보다 젊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내가 부르기는 형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법 한 사람이었다. 신기하게도 요르단에서 태어나서 자라셨고, 지금은 런던에서 민박집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요르단에서의 이야기도 더 들어보고 싶었고, 어쩌다가 런던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지만, 사장님과의 대화는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두 민박집을 운영하시느라 많이 바쁘셨던 터였다.


오전 열시 경. 마침내 짐을 본래 민박집에 옮겨 놓은 후에, 나는 홀가분하게 런던의 거리로 발을 옮겼다! 그 전에도 고민이 참 많았다. 배낭을 멜까, 여행자용 손가방을 들고 다닐까, 신발을 어떤 걸 신을까……. 유럽에 오기 전 강도와 소매치기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나는 여행자용 가방을 남방 안에 메고, 언제든 달리기 편한 운동화를 신은 채 거리로 나섰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영국 박물관이었다! 평소에 한국에서는 발도 안 들여보던 박물관이었지만 이 쪽은 규모가 다르리라 생각이 들었다. 가장 볼거리도 많을테고, 시간을 투자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힘든, 쉽게 말해 관광의 안전빵. 숙소에서는 걸어서 삼십분 정도 거리였다. 오이스터 카드도 구매했겠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굳이 걸어서 가기로 했다. 버스 차창 너머의 풍경보다 직접 발로 걸어서 천천히 보고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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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가 신기했다. 내가 지금 런던의 바닥을 걷고 있는 것도 신기했고, 버튼을 눌러야 점등이 되는 보행자 신호등도 신기했고, 그 많은 차들이 다니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도로도 신기했고, 그 와중에도 사고 없이, 또 아슬아슬하게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도 신기했다. 서울처럼 고층 건물이 시야를 가리기보다는, 옆으로 넓은 건물들이 여러채 다닥다닥 붙어있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건물들, 또 차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청바지에도 거리낌없이 구두를 신는 남자들이 많았고, 비가 오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민소매 티셔츠와 트레이닝복만 입고 조깅을 하는 남녀도 보였다. 그 시간에서야 출근을 하는 건지 정장을 입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도 보였고,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 택시에 버럭 욕을 뱉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였다.


겉모습은 많이 달랐지만, 도시의 내용물은 서울과 많이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길을 찾는 법은 서울과 달랐다. 서울에서는 항상 큰 건물들을 기준으로 길을 찾곤 했었는데, 런던에서는 그렇게 찾기보다 도로명을 찾아보는 게 더 빨랐다. 어쩌면 내가 그냥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수도 있었지만.+ 간판보다는 Baker Street처럼 그 길의 이름이 좀 더 눈에 잘 들어왔다. 아무래도 길 이름이 걸린 표지판은 여기저기 붙어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킹스크로스 근처에는 ACADEMY라고 붙은 건물들이 몇 채 있었다. 음악 학교도 있었고, 경영 학교도 있었고, 의료 학교도 있었고. 입시영어에 최적화(되어있지만 그렇다고 잘하는 건 아닌)된 나로서는 대학인지 학원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일단 그런 건물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 확연하게 세련되어 있었다. 전부 안이 비쳐 보이는 유리로 만들어졌다든지, 간판이 정말 크고 뚜렷한 글씨로 적혀있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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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ACADEMY가 아니라 COLLEGE 였던 것 같다. 기억이...)


킹스크로스를 지나 천천히 걸어서, 삼십분에서 사십분 정도가 지난 다음에 나는 영국 박물관에 도착했다. 역시나 어제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박물관 앞에는 사람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대학생들 무리로 보이는 단체손님도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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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박물관 안뜰에서 사진을 찍다가 안내를 따라 왼쪽으로 향했다. 작은 텐트가 쳐진 곳에서는 직원들 몇 분이 서서 입장하는 관광객의 짐을 간단히 검사하고 있었다. 여권과 현금이 겨우 들어갈만한 작은 가방하나 뿐이었던 나는 손쉽게 대영박물관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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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입구에서부터 나를 압도했다. 엄청난 높이의 천장과 곳곳에 설치된 계단들, 언뜻 보이는 기념품 가게는 커다란 쇼핑몰을 방불케했다. 어둑어둑한 입구를 지나자 곧 하얗게 칠해진 원형의 건물 내부가 나왔는데, 이 곳 역시 사람으로 가득가득했다. 박물관 내부 지도와 안내 책자를 파는 곳, 오디오가이드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곳, 그리고 음료를 비롯해 음식을 파는 카페 등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에 여백이 많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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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는 사람들도 참 많았다. 볼거리가 그만큼 많고 시간도 그만큼 많이 들어서일까. 궁금했다. 나는 얼른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하고 박물관으로 입장했다.


박물관 내 유물들은 세계 곳곳의 문화권을 기준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집트, 고대 로마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까지 있었고, 일본을 비롯한 일부 아시아권의 문화도 접할 수 있었다. 평소에 박물관을 자주 갈 일이 없어서 그런지 일단 그 내부를 걷는 것도 너무나 신기했고, 사진을 아무데서나 편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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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의 유물과 문화재는 분명 약탈의 증거이리라. 언뜻 듣기로는, 영국박물관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 이유중에 하나가 자국 물품이 일정 수 이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여태까지 몰랐던 나라이름과 문화권의 이름을 듣고 보게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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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신기했던 건 이런 문구였다. 우리나라 박물관에도 이런 문구가 있었는지 싶었는데, 어쩐지 은행에서 『식사중입니다』 팻말을 올려놓고 창구를 비워두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혹은 세미나로 인하여 휴강합니다 같은 느낌. 자주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멋있게 느껴졌다. 그래, 어서 가서 문화인류학이나 지리학, 고고학, 어떤 학문이든 인류의 연구와 고찰과 발전에 기여하고 돌아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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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하지 않았던 오디오가이드는 생각보다 충실했다. 유물 하나당 최소 1분에서 3, 4분까지 유창한 한국말로 재생됐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내가 아직 초등학생일 때 학교에서 틀어주던 역사 관련 시청각 자료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했고, 자연과학 비디오에서 들어본 목소리 같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오디오가이드이니만큼 당연히 영국사람이 어설픈 한국말로 녹음했거나 기계음으로 녹음했으리라 생각했는데…….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아무 목소리나 틀어놔도 참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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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가이드는 내용에서도 충실했다. 짧다면 짧은 재생시간 속에서도 유물 및 작품에 대한 설명과 그 시대 배경에 대한 설명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어쩐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정말 순수하게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책을 읽고, 학교 수업을 들었던 시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삼, 사학년 정도까지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다음부터는 당연히 학습지니 과외니 학원이니……. 배움은 내게도 내 친구들에게도 진절머리나는 것이었다. 지겹고 하기 싫지만, 인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것.


영국 박물관은 다양한 문화재뿐만 아니라, 개인 혹은 단체의 전시회도 일부 공간에서 열고 있었다. 지하로도 길이 참 많이 뚫려있어서 돌아다니다보니 스타워즈와 미술을 결합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무려 스타워즈라니! 흥분해서 들어가서 60인치는 되어보이는 커다란 TV에서 나오는 제작 영상도 보고, 여러 작품들도 구경하고……. 그런데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다. 내 정신이란…….


돌아다니던 중, 박물관 내부 지도를 볼 수 있는 오디오가이드를 통해 한국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신기한 마음에 얼른 지도를 뒤적거려 현재 위치를 찾고, 가는 길을 찾아 한국실에 도달했다. 문부터 느낌이 달랐다. 세계적인 박물관에서 정자체의 한글을 보게될 줄이야! 게다가 문도 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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