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나의 퇴직유랑기 #12. 영국박물관(2) 한국실과 우리나라, 결혼에 대한 고찰.
돌아다니던 중, 박물관 내부 지도를 볼 수 있는 오디오가이드를 통해 한국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신기한 마음에 얼른 지도를 뒤적거려 현재 위치를 찾고, 가는 길을 찾아 한국실에 도달했다. 문부터 느낌이 달랐다. 세계적인 박물관에서 정자체의 한글을 보게될 줄이야! 게다가 문도 꽤 컸다.
과연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니 근데, 우리나라 유물은 대부분 다 우리나라에 있을텐데, 대영박물관에서는 도대체 어떤 것을 보관하고 있는 걸까? 혹시 그 옛날 무역의 증거가 되는 주화나 도자기들이 있을까, 혹은 지도나 그림도 있을까, 전쟁 중에 퍼져나간 무기같은 것도 있다면 좋을텐데.
커다란 한국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그마한 전시실이 하나 나왔다. 갤러리를 연상케하는 그림이 몇 점 걸려있었고, 한 쪽 구석에는 청자로 추정되는 도자기들이 서너개 전시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박물관을 많이 가보지 못해서일까, 도자기와 그림들은 그다지 한국풍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도자기 하나가 엄청 컸다.
옳거니, 여기가 시작이고 이제 길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뭔가 더 나오겠지. 그럼 그렇지, 한 쪽 벽에 열 명 정도가 들어가 앉을 수 있을 법한 크기의 방이 전시되어 있었다. 영어로 사랑방이라고 적혀있는 그 내부의 모습이 어디서 본 듯 익숙해서 묘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야. 비행기타고 열 한 시간 걸려서 온 여기에서 옛날 우리나라의 사랑방을 볼 수 있다니. 이상하게 옥희 성대모사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사랑방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돌아 나가면…….
바로 출구가 나왔다.
세상에.
“와 이건…….”
이건 자존심이 상해야하는 건지, 그만큼 영국에 약탈당한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니 안심해야하는 건지 헷갈렸다. 아니 뭐……. 굳이 비교를 할 대상을 찾자니 일본이 떠올랐는데, 일본실도 그렇게 내용물이 많지는 않았다. 작은 공예품들이 주를 이루고, 내부에는 일본 작가들, 혹은 일본에 갔던 다른 여행자들이 그린 일본 풍경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근데 그래도 여기 한국실보다는 좀 더 컸었는데. 사실 굳이 뭐 이런 사실 하나하나에 감정을 쏟을 필요는 없어보였다. 당연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인데, 우리나라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을 리가 있나.
생각해보면, 사는 것도 비슷하지 싶었다. 꼭 우리나라가 세계 제 몇 대 경제 강대국이 되어야하고, 군사력이 몇 등 안에 들어야 하는 걸까? 경제력, 군사력, 혹은 전세계에 미칠 파급력이나 영향력이 최고여야만 우리의 삶이 좀 더 윤택해지는 걸까 싶었다 . 그저 절대적 가난이 최소화되고, 더 나아가 사라지고, 노력에 따라 더 잘 살게 될 수도 있는 정당하고 공정한 사회가 자리잡으면, 세계적인 순위야 어찌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물론 삶의 윤택함과 경제적 순위가 완전 독립된 주제는 아닌 건 분명하다. 잘 살려면 GDP를 비롯한 전반적인 경제지수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 건 당연한거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향상시키려면 기반 시설이나 제도등이 확립되어야 하며, 자연히 경제규모는 자라날테고 세계적인 순위도 높아지겠지. 그런데 가끔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그 순서가 거꾸로가 된 기분이다. 우리는 순위를 높여놨으니, 너네가 못사는 건 너희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거다. 노력해라 노력. 혹은, 우리는 순위를 높여놨으니 이러저러한 잘못은 슥 넘어가도 되는 거다. 그 정도는 묵인해야 이런 휘황찬란한 결과물이 나오는 거다.
<자동차 보닛 위에 그려진 작품. 1950, 60년대 작품으로 기억한다. 영국박물관은 이처럼 단순 고대 유물뿐만 아니라 근현대 작가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 선생님들의 가치관을 비판하게 되고, 군대에 있을 때는 지휘관의 뒷담화를 하기 바빴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역시 동기들 및 동료 선배들과 경영진에 대한 비판을 매일하곤 했었다. 비판의 이유도 매일 달랐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가 달라졌음을 인지하지 못해. 그들의 방식은 매번 똑같아. 그들은 우리가 현장에서 얼마나 힘들게 근무하는지 알지 못해. 그들은, 그들이 회사에 다닐 때만 회사가 멀쩡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나봐.
이 중에서 그나마, 혹은 가장 순화된 비판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의 경영진은, 회사의 크기와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는 데에는 참 열심히 했고 성과도 올렸으나, 이미 자리잡은 사업을 어떻게 유지하며, 더 빠르게 달라져가는 사회속에서 새롭게 적응해나가는 것에는 익숙치 못하다. 그들이 어떤 악의가 있거나 레임덕이 온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뿐이라는 것.
정치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간혹 악의가 있지 않나, 혹은 나태가 몸 구석구석 자리잡은 것이 아닐까, 싶은 사람도 있고, 또 분명 더 나은 사회,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머리를 열심히 짜내고 굴리고 계시지만, 어쩌면 더 빨라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아이디어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용히 묵사발하고, 그것에 뿌듯해하는 대다수의 어르신들의 태도 역시 그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멍 때리면서 천천히 박물관을 걷다보니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진작 운동좀 할 걸, 하는 마음으로 나는 박물관 로비로 나왔다. 처음에 들어올 때 로비 구석구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좀 이해가 됐다. 하지만 혼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소심하기 때문에 나는 굳이 박물관 구석구석 놓여진 자그마한 의자를 찾아 다녔다.
영국박물관 안에는 카페와 식당도 있었다. 1층에는 소소한 카페와 먹을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지만 사람으로 꽉 차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식탁 옆에 유모차가 있거나 잔뜩 심통난 얼굴의 아가들, 그리고 한숨을 쉬며 그런 아이들을 곁에 두고 자기들 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궁금해졌다. 나도 어릴 때 부모님 손잡고 이런 박물관에 자주 왔겠지. 물론 한국에서. 국립박물관이나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부산이나 제주도 등등. 나름대로 여행을 하긴 했던 것 같은데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몇 없었다. 이래서 부모님이 그렇게도 사진을 찍어두자고 이야기하셨던 것 같다. 어렸을 적 나는 항상 여행을 오면 얼른 집에 가고 싶다며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참. 나같은 걸 부모님은 어떻게 길러내셨는지 싶기도 하다. 회사를 다니던 입장에서, 가족을 위해 며칠 휴가를 내고, 그것도 아이들 방학과 휴일에 맞춰서 여행계획을 짜고, 또 찡찡거리는 남자아이를 둘이나 데리고 여행이라니. 아주 어렸을 때는 태국도 갔었고, 또 친척을 따라 미국에 간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말도 안 통하는 해외로는 어떻게 다녀오셨던 걸까?
어렸을 때는 얼른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싶어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돈도 벌고 가정도 꾸리고. 내 가족이라 묶이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평생을 붙어서 지낸다는 건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아이는 둘 아니면 셋, 마당이 있는 집에서 반려견도 데리고 살아야지. 주말마다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플레이스테이션을 돌리고,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 학교 숙제를 도와주고……. 누구나 가져보지 않았을까? 결혼에 대한 환상은.
누구나 그렇듯, 시간이 흐르고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그 생각은 서서히 바뀌었다. 내 시간을 조금도 찾기 힘든 삶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참아내고 견뎌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쉬운 각오로 도전할 일은 아니었다. 매 달 기일에 맞춰서 간신히 들어오는 월급으로는 나 자신의 삶을 위로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이 돈을 남을 위해서 쓰며, 집에 와서도 어떻게 남을 배려하면서 지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해 뜨기 전에 출근하고 해 진 다음에 퇴근하던 어느 날에는, 결혼이 너무나도 무섭게만 느껴졌었다.
항상 결론은 비슷했다. 돈만 있다면! 내게 충분한 돈만 있다면, 혹은 충분한 부가 보장되는 넉넉한 급여와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이 있다면! 그렇다면 결혼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겠지. 아무리 바쁘고 내 삶이 없어도……. 아니, 그래도 내 시간이 없다면 돈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돈을 벌어도 쓸 시간이 없는데.
그럼 다시 머릿속의 논쟁은 직장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넉넉한 돈과 빡빡한 근무를 택할 것인가, 출퇴근을 비롯한 내 삶과 조금 부족한 급여를 선택할 것인가? 구체적인 액수와 시간이 있어야만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직장이 둘 중에 어느 쪽인지 판단할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리 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들 결국 내가 직접 들어가서 겪게 되는 직장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기준과 다르다.
맞벌이를 하셨던 우리 부모님께 새삼 감사했다. 그리고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결혼할 수 있을까, 결혼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내 아이를 태어나서 길러내면 적어도 나에게 감사함을 느낄 정도로는 바르게 키울 수 있을까……. 그저 우리 아버지가 나를 길러낸 정도로만 내 자식을 길러낼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성공한 결혼을 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