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나의 퇴직유랑기 13. 디즈니와 만화.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새 오후 두시였다. 밥을 먹을 때가 살짝 지난 셈이다. 계속 걸어다녀서 다리도 저렸던 터라 나는 또 런던 시내를 돌아보며 괜찮은 식당을 찾아보고자 했다! 박물관을 나오자마자 맞은편에 스타벅스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주점이 있었으나 나는 그 식당을 조용히 지나쳤다. 뭔가 더 맛있는 식당이 나오겠지.
런던 거리의 느낌은 영화에서 자주봐서 그런지 친숙하게 느껴졌다. 물론 늘 다니던 익숙함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분명 처음 만난 지인인데, SNS를 통해서 사진으로 자주 접했던 인물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아 안녕하세요! 처음뵈옵네요! 사실 페이스북에서 사진으로 종종 봤어요. 누구랑 친구시더라고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식당들 메뉴도 김치처럼 익숙한 음식이 걸려있고, 한글도 쓰여있고…….
응?
한글 간판을 보고 깜짝 놀라서 돌아봤다. 세상에. 김치에 빠져봐라니. 문득 C모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 전마다 틀어주던 한국 공익 광고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부터 지겹게 접해오던 애국 코드를 넘치도록 집어넣은 광고였는데,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귀를 사로잡고 눈을 사로잡고 등등……. 언뜻 들으면 세계인을 볼모로 잡은 인질범이 된 기분으로 만드는 광고였다. 사로잡긴 뭘 사로잡아. 나의 오그라든 몸이 사로잡혔다면 모를까.
궁금해서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이 정말 많았다! 한국보다는 유럽이 느긋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오후 두시를 넘긴 시간임에도 점심을 해결하러 온 직장인들이나 여행객들이 꽤 많은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사람으로 보이는 동양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신기했다. 보통 한국 글씨가 쓰여진 곳에는 어김없이 패키지로 놀러온 어르신들이 한쪽 구석을 점거하곤 했었는데.
영국 박물관 한국실에서 받은 실망을 여기서 회복한 기분이었다. 줄은 없었지만 자리가 꽉 찬 식당 안을 들여다보며 나도 여기서 끼니를 해결할까……하다가, 굳이 런던까지 와서 한국음식을 먹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근데 막상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따라 죽 걷다보니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대부분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자라, 포에버21 등등의 의류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빌딩들이었다. 결국 삼십 여 분을 더 걷다가 나는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점심을 때웠다.
계속 걷다보니 디즈니 스토어가 나왔다. 명동에 있는 ‘ㅇ’화장품 가게만큼이나 규모가 컸다. 라이온 킹, 알라딘, 미녀와 야수처럼 어린시절 추억 돋는 작품부터 겨울왕국과 같은 최근 작품의 유명한 노래들이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고, 또 그만큼 다양한 작품의 캐릭터들이 인형, 피규어 등 다양한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이건 정말 사고 싶었으나 여행 첫 날이라는 부담감이 지갑의 봉인해제를 막아냈다. 하...>
한국에서도 유명한 마블사의 캐릭터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위한 공주님 세트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듯 했다. 또 한쪽 구석에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7의 캐릭터들도 살아있었다! 다소 흥분해서 달려가봤지만 아쉽게도 그 이전 작품들의 캐릭터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다양한 크기의 알투디투와 BB8의 인형들만 봐도 참 신기했다.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심바에 감정이입해서 눈물을 흘려도 보고, 처음으로 공주님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한 알라딘처럼 마법 양탄자를 그리워 해보기도 하고. 사실 알라딘에 대한 작품에 나는 참 많이 몰입했었다. 오죽하면 어렸을 적 이상형도 쟈스민에 가까웠을까. 또, 쟈스민과 알라딘의 듀엣곡을 보고 들으며 나중에 결혼하면 꼭 함께 살게 될 여인과 노래를 같이 불러봐야지……. 하는 생각도 가지곤 했었다. 물론 그 때는 내가 노래에 얼마나 소질이 없는지 깨닫지 못했었지만.
요즘에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3D로 나온다. 어쩌면 그건, 디즈니의 과거 작품들이 2D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이 모든 작품을 통칭하는 만화다. 만화. 머릿 속 상상과 환상을 현실화 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나는 대로 그려보고, 움직여보는 것.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만화라 함은 어린 아이의 현실도피성 유흥거리로 치부되며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아니 정확히는, 디즈니와 함께 만화로 통칭되는 나머지 작품들이 비하를 받는 다고 해야할까.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뜻을 품고 그려내는 사람들이 디즈니를 가리키면, 그건 디즈니니까, 하며 코웃음을 치고 그 손가락을 조용히 내릴 것을 권면한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나에게는 그 자체로 굉장히 숭고하고 멋있는 작업이다. 머릿속의 것들을 꺼내어 그려보고, 인물을 만들고, 개성을 부여하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리하여 눈앞에 펼쳐보이는 것. 많은 노력이 들지만, 디즈니의 작품들은 노력의 댓가를 나름대로 성취했다.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억대의 인구가 돈을 내고 극장에서 관람하며, 그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또한 전 세계인이 다음 작품을 기꺼이 기다리기도 한다. 현 세대의 부모와 자녀가 한 회사의 작품으로 공감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게 아닐까?
문제는 똑같이 만화라고 쳐도 디즈니의 만화가 우리 골목길에 있는 만화책 방 어딘가에 꽂혀있는 흑백 만화책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더 많은 돈이 들었고, 노력이 들었으니까. 당연히 나는 그 모든 작품이 동등하게 취급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론적으로 모두가 같은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이 소득에 따라 평가받지 않듯이 작품은 작품대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말.
생각해보면 요즘은 사람도 소득에 따라 평가를 받긴 하는 것 같다. 상위 1%가 아니면 가축취급을 하는 사람도 어딘가에 있다는 걸 보면.
대체 왜 일까. 만화책도 원피스, 나루토 등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작품이 분명 존재하고, 애니메이션은 픽사와 디즈니가 전세계인을 울리지만 왜 그 길을 가는 것을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을까? ‘그 길에서 성공한 건 그들뿐이야’, ‘그들이 운이 좋기 때문이야’, ‘그들은 이미 성공해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가능한 거야’. 요약해보면, 성공한 것은 극히 일부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은 위험하며, 때문에 그 분야 자체가 그다지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까지 비약이 되는 것 같다.
그 길이 쉽지 않다, 위험하다 까지의 의견은 나쁘지 않다. 건설적이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때문에 이미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까지 싸잡아 비하하는 건 옳지 못하며,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 있다. 애니메이션과 극작과를 통합하는 학교, 직장이 아닌 스튜디오라면 자연스레 가는 안쓰러운 시선, 포트폴리오보다 출신 학교를 더 따지는 취업 시장 등등.
또 다시 마음이 답답해진다. 어디서부터 고쳐야하나, 일단 순응해야 하나. 내가 가는 길은 아니지만 어딜 가나 비슷할 거라는 암시가 사회 곳곳에 복선처럼 깔려 있는데. 나는 무얼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