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나의 퇴직유랑기 #14. 어른도 놀이가 필요하다.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디즈니 스토어에서 어렸을 적 기억이 되살아났다면, 그 어린시절에 느꼈던 감성을 통째로 재현하는 곳을 그 다음에 방문하게 됐다. Hamley's 라는 곳. TOYS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것으로 보아 장난감 가게인 듯 했다. 사실 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곳이라는 평을 들은 뒤에 가게 된 곳이다. 디즈니 스토어에서 이미 장난감에 충분히 놀란 나로서는 여기에서 뭔가 더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세상에. 첫 발걸음을 문 안쪽에 들여놓는 순간부터, 내 발은 어느새 내 나이가 한 자리수였던 시절을 걷고 있었다.
장난감 가게인데 얼마나 하겠어, 싶겠는데 무려 지하로 1층, 위로는 5층짜리 빌딩이었다. 정방형의 건물 가운데를 에스컬레이터로 뚫어놓은 디자인은 언뜻 중세시대 성을 방불케했는데, 여기에 더불어서 골목 골목마다 이색적인 장난감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직원들이 있었다. 벽을 기어가는 인형, 어디로 날려도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종이비행기, 바퀴가 뒤집혀서 아무리 넘어뜨려도 굴러가는 자동차.
당연히 이 모든 장난감들은 그 때 그 때 지나가는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백화점 시식코너마냥 누구든 관심이 동하면 만져보고 직접 움직여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건, 아이들만큼이나 어른들도 이런 놀이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편한 자켓에 빵모자를 눌러쓰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도 종이 비행기를 날리시고, 아이를 등에 업은 아저씨도 조이스틱을 움직이며 환호를 질렀다. 그런 모습들에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았고, 되려 그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어른들도 많았다.
놀라웠다. 문득 어린시절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사오고 컴퓨터 앞에 붙어있으셨던 약 이십년 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터넷에서 탱크과 벙커를 배치하는 방법도 프린트해오셨던 아버지였는데, 그런 아버지가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있으면 늘 어머님의 잔소리가 그 등에 콕콕 박히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나는 어른이 되면 게임을 하지 않겠지, 라는 묘한 환상에 사로잡혀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하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놀이라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에 정말 중요하고, 때문에 언제나 필요한 거라는 걸.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논다는 것에 우리나라 사회는 너무나 각박하고 또 매몰찬 시선을 보낸다는 것. 인형이나 피규어를 수집하는 소소한 취미조차도 받는 눈초리가 매섭고, 플레이스테이션이나 게임용 노트북 등 진취적으로 놀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이 무책임하게 던져진다.
왜? 세상 살면서 어릴 때는 놀고, 어른은 놀 수 없다는 걸 누군가 정해놓기라도 했다는 건지. 철없다, 철들라는 것만큼 폭력적인 정죄도 없는 것 같다. 불의를 당해도 꾹 참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 자체를 보람으로 삼으며 살아야 하는 게 어른이라는 건가. 보람이란 요만큼도 찾기 힘든 현대사회의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대한민국 성인일텐데, 월급이 유일한 보람과 보상이 되는 것이며, 그게 전부가 된다. 쌓이는 돈을 보고 뿌듯할 수는 있지만, 그 돈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정상이지 그 돈 자체가 보람의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다.
어린이들보다는 어른들이 참을 일이 많고, 또 희생해야 할 것들이 많다. 놀이의 시간도 어린이보다는 현저하게 적어질 수밖에 없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만큼 어른의 놀이는 더 존중을 받아야하는 게 아닐까. 나이 들었으니 그만해, 얼른 철 들어가 아니라, 나이들고 고생하고 있으니 그 정도는 즐길 줄 알아야지, 가 맞는 것 같다.
햄리스토이는 실로 장난감 성, 이라 칭할만 했다. 각 층마다 인형과 자동차, 레고 등등 세상 모든 장난감을 다 가져다 놓은 듯 했다. 우리나라의 한사토이와 비슷한 컨셉의 동물인형도 있었는데, 털의 세세한 길이나 감촉이 실제 동물과 굉장히 비슷했다. 동물들의 플라스틱 피규어도 있었는데, 이는 손톱만한 것부터 다 자란 어른정도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어떤 층은 세상 모든 공주들을 모셔놓은 듯했고, 또 다른 층은 마블과 디즈니,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에 나오는 각종 소품과 피규어로 가득가득했다. 심지어 호빗에 나오는 오크리스트라는 검도 있었고, 볼드모트가 쓰던 마술 지팡이에 리멤브럴까지, 해당 작품의 매니아라면 눈이 뒤집어질 질의 컨텐츠가 선반마다 꽉 차있었다.
아이부터 어른의 취향까지. 아니, 정확히는 나이에 상관없이 그저 전 세계 장난감의 모든 취향과 종류를 다 가져다 놓은 느낌이었다. 실로 천국이었다! 처음에는 아이들 입장의 백화점이구나, 부모님들이 꽤나 고생하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그마저도 착각이었다. 이곳은 진정 천국이구나. 진정한 장난감, 놀이 앞에는 아이와 어른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 시선이기도 했고.
때때로 골목마다 장난감 병정처럼 옷을 차려입은 직원이 캐리어를 끌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노래가 흘러나오는 스피커였다. 디즈니 스토어에서도 비슷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생소한 노래도 있었고, 어디서 들어본 듯한 유명한 뮤지컬 넘버도 있었는데,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직원들은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심지어, 우리나라 고속터미널이나 의정부 지하 시장에서 파는 장난감도 있었다! 입을 벌린 동그란 물고기에 미끼를 걸고 들어올리는 낚시 장난감인데, 아마 이건 전 세계적인 유행인 듯 했다. 역시 최신 유행은 시장에 가면 알 수 있는 거다.
사고 싶은 물건들이 참 많았다. 던져서 끄는 BB-8 자명종, 손바닥 사이즈의 오크리스트(호빗에 나오는 검), 볼드모트가 쓰던 마술지팡이, 안고 자면 좋을 듯한 강아지 인형, 위 아래가 뒤집혀도 잘 가는 원격 조종 자동차, 마스터 요다의 피규어, ……. 단지, 오늘이 첫 날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재정을 긴축적으로 운용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아, 첫 날만 아니라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영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것으로 동선을 짰더라면(물론 정말 그랬다면 공항세 때문에 돈이 더 들었을거다)!
늘 어릴 때는 충동을 억누르도록 교육을 받았다. 사실 그렇다기보다, 내가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거나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면 칭찬을 참 많이도 들었었고, 그게 나를 수동적이고 또 잘 참아내는(것처럼 보이는)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나는 아쉬운 맘 달래고, 전 층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한 채 성을 나올 수 있었다. 아, 이 곳에 한 번만 더 들려볼 수 있다면.
약 한 달간의 유럽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 혹은 다시 갈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몇 가지 장소가 떠오르는데, 햄리스는 그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만약 런던이고, 어린 시절의 향수,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장난감과 피규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영국의 명작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쯤 꼭 가볼만한 곳임을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아직도, 장난감 비행기를 날리던 할아버지의 미소와 장난감 자동차를 조종하며 신이 난 아버지를 재밌게 올려다보는 딸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