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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유랑기 #15. 셜록홈즈 박물관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나의 퇴직유랑기 #15. 셜록홈즈 박물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아니 정확히는, 책을 읽는 것보다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듣고 보는 걸 좋아했다. 단순히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쓰여있는 이야기도 좋고, 뮤지컬처럼 노래와 극적인 무대 장치로 전해지는 이야기도 좋았고, 영화처럼 시점이 오락가락하며 정신없이 눈과 귀를 어지럽히면서 전해지는 이야기도 좋았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어쩌면 집중이 가장 힘든 책이라는 매체에 재미를 붙이게 해준 작품이 있는데, 바로 셜록 홈즈 시리즈다. 한창 아버지의 추천도서에 진저리를 칠 때인 중학생 때, 아버지께서는 외국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읽어야 한다며 그 당시 약 열 권 분량의 하드커버로 출판이 된 셜록홈즈 시리즈를 사오셨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색 선으로 셜록홈즈의 옆모습 실루엣이 그려진 책이었는데, 아직도 이 시리즈는 집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실 그 당시에 표지는 참 재미없어 보였다. 실제로 번역한 문체 역시 그다지 가독성이 좋지는 않았다.


근데 그 추리라는 게 뭔지. 까맣게 탄 피부에 비해 하얀 손목 하나만으로도 어디서 근무를 했는지 파악하고, 의뢰인이 놓고 간 물건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고민이 어떤 것인지 대략 짐작을 하기도 한다. 사실, 한 두 번 읽는 것만으로는 그 기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에 같은 문단을 여러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그러면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는 또 다른 독서의 매력을 알게 된 것 같다. 앞선 두 작품이 글을 통해 내 머릿속에 세계를 그려보는 상상력을 자극했다면, 셜록홈즈 시리즈는 소설 속 인물의 사고의 체계를 따라가는 것의 재미를 느끼게 해줬다고 해야할까.


사실 나 말고도 그 재미를 느낀 사람이 많은 듯 했다. 그래서 영화로도 각색이 여러 번 됐고, 옛날에는 드라마도 있었으니. 오죽하면 괴도라는 인물도 나왔겠냐만은, 내 맘속에서 아직 이 사람은, 그리고 이 작품은 셜록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


아, 그리고 최근 현대판으로 각색된 셜록이라는 영국 드라마도 빼놓을 수가 없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인 셜록이라는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정말 잘 각색 해놨으며, 단순히 반사회적인 인물에게서 푼수와 순수함, 그리고 귀여움까지 추출해내 해당 역을 맡은 배우를 세계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대부분의 각색이 원작 팬에게 비판을 받지만, 이 쪽은 분명 괜찮은 축에 속하는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이렇게 셜록이란 작품이 참 많이 애정을 쏟았던 터라, 영국에 간다는 마음을 정한 다음부터 런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셜록홈즈 박물관은 반드시 가야할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존 인물도 아닌데, 이 사람이 자주 갔던 카페, 이 사람이 살던 베이커 가, 어느 하나 궁금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분명 박물관이라 하면 이 사람이 쓰던 물건들, 읽던 책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바이올린까지 구현이 되어 있겠지. 자본주의의 힘이라고 해야하나 창작의 힘이다



햄리스 스토어에서 셜록 홈즈 박물관까지. 사실 걷기엔 다소 먼 거리지만 굳이 걸어가 보기로 했다. 천천히 걸어가며 주위 건물들도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오락가락 하는 비에 우산을 쓰는 사람들, 그냥 뛰는 사람들, 느긋하게 카페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내 맘대로 런던 사람과 외부 사람으로 구분해보기도 하고, 물론 나는 런던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맘에 삼단 우산을 손에 든 채 비를 맞으면서 걷고.


베이커 가에 당도했을 때, 그 가(Street)라는 개념이 생각보다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저기 표지판이나 건물의 간판 사이에 Baker라고 쓰여있었지만 박물관은 한참 멀리에 있었다. 우리나라 도로명주소도 그러할까? 우리집 주소만 알았지 우리집이 속한 도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지는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런던보다 서울이 크다고 하던데, 그럼 우리나라 도로명이 훨씬 긴 단위로 구분되어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기대만큼이나 소박한(?) 셜록 홈즈 박물관에 당도했다. 바로 그 아래에는 그가 자주 가던 카페라고 적힌 가게가 있었는데, 밖에서 계속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던 터라 바로 알 수 있었다. 언뜻 보면 복층의 작은 가정집이라고 느껴질 박물관에 들어가자, 18세기 그 시절……. 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을 주는 메이드복을 입은 웨이트리스 분과 마주칠 수 있었다. 꿀 떨어지는 목소리와 영국 억양으로 인사를 받고 나자, 그 뒤에는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 한 분께서 또 인사를 해주셨다.



가만히 둘러보니 그렇게 입고 계신 분들이 여러 명이었다. 아무래도 일하시는 분들은 전부 그런 옷을 입고 계신 듯 했다. 들어가서 바로 왼쪽에 올라가는 계단이 입구인 듯 했고, 올라가기 전 일 층은 기념품 가게와 입장권을 판매하는 카운터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일하시는 분들 모두 정장 아니면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 친절하며 영국 억양이 짙었다. 아 영국이니 이건 어디든 당연한 건가…….



입장권을 구매하고, 차분히 계단을 올랐다. 박물관 크기가 밖에서 봤듯이 가정집 크기 정도라 그리 공간이 넓지는 않았지만, 층마다 서너 명 정도의 관람객이 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크기 때문인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조용히 둘러보기에는 분위기가 참 좋았다. 셜록이 읽던 화학책을 펴놓은 곳도 있었고, 그의 바이올린은 물론 파이프 담배까지 재현해 놓은 곳도 있었다. 벽에는 셜록이 심심풀이로 총을 쏴서 썼던 글자도 있었으며, 왓슨에게 쓴 편지지도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간단한 거지만 셜록이 앉던 소파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다니! 팬의 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친절한 메이드 한 분께서 구도도 잡아주시고, 나름의 평가(?)도 해주셨다. 이건 친절한 게 아닌가……. 아무튼, 드라마나 영화보다 책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로서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셜록의 소파에서 그가 물던 파이프를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기념품도 좋았다. 아무래도 얼마 전 시즌 3가 끝난 셜록 드라마의 영향이 커서인지 기념품 대부분이 베네딕트 컴버패치의 얼굴로 도배되어 있긴 했지만, 컨텐츠가 많았다. 셜록 실루엣이 들어간 트럼프, 보드게임 세트, 옛날 컬러 만화책으로 접했던 수수께끼 책의 셜록 버전 등등. 자석부터 작은 펜, 머그잔, 티셔츠와 액자까지! 특히나 “I am sherlocked" 라는 문구를 세 줄로 나눠서 깔끔하게 만들어진 로고는 어디에 박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동안 워낙 규모가 큰 것만 밝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셜록 홈즈 박물관의 조그마한 규모도 맘에 쏙 들었다. 대영박물관처럼 이 곳을 꾸몄다면 아마 큰 공간 안에 마차와 베이커 가 전체를 재현 해놓고, 곳곳에 부스를 설치해 그 당시의 사회모습 혹은 생활상을 전시해놨겠지만 그다지 감동은 없었겠지. 오히려 작은 공간에 세세하게 그 작품의 캐릭터를 묘사해놓은 것이 참 좋았다. 큰 박물관이나 쇼핑몰에 갔을 때보다 더 몰입이 쉬웠고, 또 소소한 것도 재현해놨다는 감동도 받았고. 상품도 상품이지만, 그 당시 옷을 입고 집안 구석구석 안내를 해주시는 분들도 분위기 조성에 큰 역할을 하신 듯 하다. 요즘 열일하는 우리나라 민속촌 같은 느낌도 나고.


영국을 나설 때 25파운드가 남았다는 걸 돌이켜보면, 여기서 티셔츠라도 한 벌 사둘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첫 날이고 돈을 아껴야한다는 강박에 산 것이 고작 자석과 볼펜, 그리고 선물용 트럼프 카드라 그런지 아무래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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