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7화

아파트

by 봄단풍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대기 손님을 확인했다. 금요일 오후라기에는 드물게도 대기 손님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주말 전에 밀린 공과금이나 벌금 납부, 혹은 예금이나 대출 상담등으로 대기 번호가 삼사십번까지는 무리 없이 올라갔을 터였다. 뭐, 가끔이라도 이런 날이 있어야지. 아무리 주물러도 풀리지 않는 어깨와 목을 연신 좌우로 젖혀가며 혹시나 들어오는 손님이 있는지 살폈다.


“우 계장, 몇 개 했어?”


다른 창구에서 상담중이던 마지막 한 분의 손님이 나가자마자 뒤에서 차장님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제는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다. 몇 개 했는지 생각하는 척, 어……. 하고 잠시 컴퓨터를 뒤적거리다가 대충 대답했다. 오늘 신용카드 두 개 받았네요.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칭찬은 없다. 해야할만큼의 목표만 채운 셈이다. 차장님의 질문은 서둘러 옆 자리의 대리님께 향한다.


대체 요즘 누가 신용카드를 그리 쉽게 만들어 주나요……. 따지고 싶지만, 여기도 대답이 돌아올리 없다. 차장님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니까. 중요한 건 할당량을 채웠느냐, 채우지 못했느냐일 뿐이다. 그렇다면 더 높은 곳에 상소를 올리면 어떨까? 경영진이나 이사진, 혹은 마케팅 부서에.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다.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영업이 힘들어도 참아달라. 그렇다면 적어도 현실성 있는 목표를 세워주든지, 아니면 마케팅 전략을 짜 주든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같은 대답에 귀결하는 것이다. 우리 때도 그런 거 없이 잘 팔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넋두리도 똑같다. 요즘 신입들은 너무 어려, 개념이 없어, 의지가 약해, 노력 할 줄을 몰라.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객장 안에 손님은 없었다. 어딜 가나, 어느 회사나 비슷하겠지. 그러니까 사표를 내밀지 못하는 거다. 퇴근이라도 빠르면 좋으련만. 괜시리 시계를 한 번 보고,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마감 이후에도 할 일이 많았다. 내일 있을 지점 내 워크샵을 위해 신규 고객 유치 방안을 짜야했고, 그러려면 전용 단말을 이용해 지난 달 신규 및 이탈 고객의 성향까지 분석해야했다. 마감을 아무리 빨리 끝내도 여섯시이니, 그 때부터 일을 한다고 치면…….


오늘도 야근이구나. 한숨이 나왔지만, 오늘은 그래도 눈치 보지 않고 야근할 수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 됐다. 무슨 말이냐하면, 일을 다 끝냈음에도 일이 끝나지 않은 차장님이나 다른 선배들 때문에 퇴근하지 못하는 경우는 아니라는 거다. 할 일이 있어서 야근을 하게 되니까 눈치 볼 일은 없겠지. 분명 오래 걸릴테니, 다 하고 천천히 집에 가서 준상이 형하고 호준이하고 치킨이나 시켜 먹을까?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 뒤에서 다시금 차장님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승민씨. 손님 좀 받아줘요.”


왜 눈을 뜨고 있었는데 보지 못했을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일어나서 번호를 눌렀다. 어서오세요. 입에서 반사적으로 안내멘트가 흘러나올 때 쯤, 객장 안에 엉거주춤 서서 이 쪽을 마주보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내 번호를 확인하고 앞에 다가와 앉는 주리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여전히 멍한 나는 주리의 얼굴을 살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멍하긴 멍한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며칠 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가 생각났다. 그러고 있자니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니, 에어컨은 킨 거야 만 거야 대체.


“적금 해지 하려구요.”

“아 네. 통장이랑 신분증…….”

“많이 더우세요?”

“어 갑자기 그러네. 에어컨이 왜 이러지…….”


당황한 모습이 재밌었는지, 어느새 주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괜히 뿌듯하다. 아, 오늘 할 일을 다 한 기분이다. 그런 기분과 상관없이 손은 기계적으로 신분증과 통장을 받아들고 키보드로 향하고 있었다.


주리는 신분증의 사진조차 남달랐다. 보정을 엄청나게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못나게 나오지도 않았다. 수수하게, 있는 그대로. 마치 예전 우리 아버지의 운전면허증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


“멋있어요.”

“어?”


뭐가? 때로는 사고가 몸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주리가 뭐라고 했지? 어……. 뭐가?


“오빠 이렇게 정장입고 앉아서 근무하는 거 처음보네요. 멋있어요.”


손님용 의자에 앉아서 작은 백을 배에 안은 채로 말을 건네는 주리의 눈에는, 늘 자기 전 천장에 그려봤던 눈웃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그 눈에 빠질것만 같아서, 나는 일하는 척 얼른 눈을 모니터로 돌렸다.


멋있다는 말에 대답을 해야할 것 같은데. 무시한다고 느끼면 어떡하지? 근데 멋있다는 말에는 뭐라고 대답해야해? 평소에 들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술을 마셨을 때처럼 어쩐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은 멋대로 모니터 한 구석, 업무와 아무 상관없는 바탕화면 한 구석을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지난 번에 서서 근무하는 것도 멋있긴 했는데.”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맞다. 그런 적이 있었지. 얼굴에 터져나오는 실소를 감출 수가 없어서, 나는 결국 이상한 소리를 내며 키보드 위로 엎드려버렸다.


“아, 창피한 모습 보였네.”

“왜요, 오빠 목소리 좋던데.”


그러더니 주리는, 안녕하세요 그린은행입니다, 하며 그 날 전단지를 돌리던 나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해.


“저는 은행원하면 이렇게 하루종일 앉아서 근무하는 줄 알았어요.”


물론 대부분 앉아있긴 하다. 하지만 그 날처럼 아침마다, 혹은 점심시간에, 혹은 마감 이후에 근처 상가나 대로를 돌며 전단지를 돌리기도 하고, 또 매일 마감때마다 금고와 ATM 기기를 돌아다니며 돈을 세야한다.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앉아만 있는 건 아닌 셈이다.


“은행도 영업해야지.”


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요새는 다들 그러더라구요. 저 단골인 미용실도 주말마다 나와서 커피 나눠주면서 영업하던데……. 요즘은 그런 영업 안하는 데가 없는 것 같아요.”


후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어쩐지 아까 달아올랐던 열기가 한숨에 같이 빠져나온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주리를 앞에 두고 앉아있자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적금이 두 개 있네. 둘 다 만기가 아닌데, 어떤 걸 해지하려고?”

“아, 둘 중에 큰 거에요.”


주리가 의자를 탁상쪽으로 가까이 당기며 앉았다. 막 준비를 하고 나온 듯 샴푸냄새가 코끝을 살짝 스쳐지나갔다. 정말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착각에,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금 컴퓨터에 집중했다.


“꽤 모았네. 만기까지 아직 몇 달 남았는데. 지금 해지 하려고?”


문득 고개를 돌리자 어쩐지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주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앉아있었다는 걸 그 짧은 사이에 잊어버려서, 나도 모르게 가까워진 얼굴에 집중해버렸다.


“급하게 쓸 일이 생겨서요.”

“그래, 그래.”


슬퍼진 얼굴을 어떻게든 달래보려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럴 땐 꼬치꼬치 물어보지 말고 얼른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게 상책이겠지. 해지 전표를 주리에게 건네려는 찰나, 주리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가 다쳐서…….”

“어? 많이 다치신 거야?”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잘 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주리의 얼굴에서 미소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다만 그 미소 자체가 슬퍼보여서 그렇지.


“많이 다친 건 아니에요. 그냥 요리하시다가…….”


처음으로 주리의 눈이 내가 아닌 탁상을 향했다. 탁상 너머 바닥을 향한 것 같은 멍한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조용히 내가 할 일을 했다. 전표와 펜을 두 손으로 공손히 주리에게 건넸다. 이런 바보 같으니.


“고마워요.”


슬프게 웃어보이며 주리는 천천히 전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계좌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컴퓨터를 보고 불러줬고, 전표를 받은 뒤 비밀번호를 요청하고. 손님 응대하듯 별다른 말, 혹은 관심표현 없이 그렇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자니 이내 주리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울에서 사는 거 힘드네요.”

“어?”

“원래 저희 가족 원주에 살았었어요. 저 학교 때문에 다같이 이사 온 거라…….”


원래 서울 사람이 아니었구나. 워낙 예쁜 외모에 세련된 옷차림 때문에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나름 유복하게 살아온 줄 알았는데. 사는 게 힘들다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주리는 말없이 전표를 건넸다. 문득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뭐가 너를 그리도 힘들 게 하는 거니?


무의식 중에 전산처리를 마친 뒤 영수증을 출력하며 생각을 해봤다.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빌려줄 수 있을텐데. 그런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돈을 빌려준다 그러면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편하게 매일 얘기라도 들어줄 수는 있는데. 별다른 사심 없이, 편하게 친구처럼……. 차마 입으로는 꺼내지 못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대신했다. 그 표정을 읽은 것인지 혹은 그냥 버릇인지, 주리는 영수증을 받아 들고 평소의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돈은 입출금 통장 하나 있길래 그 쪽에 넣었어.”

“고마워요.”


어쩐지 나를 더 안쓰럽게 여기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천천히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는 주리를 보며 나도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는 목소리가 진짜 좋은 것 같아요. 그냥 듣기만 해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야.”

“어 그래? 고마워라.”


태연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속은 그렇지 않다. 쿵쿵.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쿵. 그래 네 목소리도 좋아. 그냥 듣기만 해도 가슴이 울리는 기분이야. 귀가 아니라 가슴이. 네 목소리를 들을 때만은 내 고막이 심장 옆에 달린 것 같다니까? 하지만 차마 입을 통해 나오지는 못했다. 때마침 몰려온 손님들 때문에, 나는 주리에게 손을 몇 번 흔들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야했다.


설렜다. 지난 번 차갑게 스쳐갔던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오늘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쳤던 눈웃음과 슬픈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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