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매주 수요일은 아파트 분리수거의 날이었다. 일반 쓰레기는 매일 수거차량이 오지만, 각종 재활용쓰레기, 폐지, 음식물쓰레기까지 한 번에 수거하는 날은 수요일뿐이었기에 저녁만 되면 등 떠밀려 나온 가족 구성원들이 단지 내에 줄을 섰다. 아버지와 어린 아이들, 고무장갑을 낀 채 설거지 하다가 나온 주부들, 약수터 오르내리는 수레에 쓰레기를 담아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김영희씨는 그 날도 자신이 쓰레기를 버려야한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매일 출퇴근하는 것도 힘들어서 집안일을 대신 해주시는 가정부를 두긴 했지만, 늘 쓰레기 버리는 걸 깜빡해서 결국 그녀가 분리수거를 하곤 했다. 애 아빠는 부장 승진을 앞두고 있기에 매일 여기저기서 불려다니기 바빴고, 초등학생인 아이들은 학원에 갔다가 집에 늦게 오기 때문에 시킬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가볼 때가 됐어.’
학원에 불쑥 찾아가 출석이나 숙제 현황을 검사해야겠다 맘을 먹은 샛별 유치원 원장선생님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빠르게 걸어나갔다. 동대표가 된 다음부터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하는 데에 묘한 피곤함을 느끼게 됐다. 평소같았으면 인사만 하고 지나갈 사람들이 어쩐지 말을 더 걸어올 것만 같았고, 곤란한 부탁들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투덜거리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던 영희씨는, 먼저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고 봉지를 던지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파트 주민이니 당연하겠지만,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혹시 101동 사세요?”
남자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눈빛만은 경계심이 가득 들어있었다. 자신이 예감이 맞았음을 확신한 영희씨는 이 사람과 친해져야 함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102동 동대표에요. 오호호호.”
아까와 전혀 다른 인격을 꺼내든 영희씨는 점점 남자의 표정이 풀리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안녕하세요. 남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해왔다.
“101동 사시죠? 들어오신지 얼마 안 됐겠다.”
“아 예.”
“아니, 한참을 사람을 안 받다가 이제야 좀 들어오는 것 같더라구요. 오호호호. 주말에 막 짐도 옮기고 하던데.”
“네 뭐.”
남자는 어느새 웃는 표정으로 응답은 하고 있었지만, 영 귀찮다는 듯 대화가 이어지는 걸 피했다. 수많은 학부모들과 아이들을 겪어본 김영희씨는 그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고, 원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야 함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혹시 근데 차가 있으신가?”
“아뇨, 없어요.”
남자는 바로 대답했지만, 다소 의아하다는 듯 영희씨를 똑바로 마주봤다. 물어보니 대답은 했지만 그게 왜 궁금하냐는 듯. 영희씨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원하는 바를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101동 주차장에 보니까 차가 몇 대 없어서……. 혹시 그 중에 한 대 차주신가 해서 그래요. 오호호호. 아니 근데, 주차 할 때마다 자리가 좀 모자라더라구요.”
남자는 더욱 더 의아하다는 듯 되물어왔다.
“동 별 세대수만큼 주차자리가 있지 않나요? 전 그렇게 들었는데.”
“아유, 요새 차 한 대만 끄는 집이 어디있어요. 그리고 자리가 없는 게 아니라, 너무 꽉 들어차고 한 쪽은 너무 비고 이러니까 보기에도 답답하고 그렇다는 거지. 자리를 너무 많이 놀리는 것 같잖아.”
여전히 남자는 석연치 않은 듯 했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조금 상한 듯했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한 그는 마침내 그녀가 기다렸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요?”
“이제 동대표 회의도 얼마 안남았으니까, 그 주차장에 동별 구분선을 없애는 게 어떤가 싶어서요. 101동 102동 구분 없이 큰 주차장을 다 쓸 수 있게. 어차피 그 위에 칠만하면 되니까 수고로울 것도 없고.”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니 벌써 고민하는 중이군. 그래, 애초에 별로 거절할만한 건 아닐 거다. 입주민도 몇 명 없을테니까. 그리고 내가 동대표가 된 이후로, 102동 사람들은 내 덕분에 주차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거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김영희씨는 능력있는 사람이라는 걸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터였다.
“어차피 지금 결정할 건 아니긴 한데, 101동 사시는 분들은 어떤가 해서요. 아직 몇 세대 안들어왔죠?”
사내는 잠시 더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꺼내듯이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네……. 뭐. 많이 들어 왔어요.”
“아유 뭐 이제 막 들어오는구나? 그쵸? 오호호호. 아무튼 그럼 나중에 안건 올라오면 호응 좀 부탁드릴게요. 서명같은 것도 빨리 빨리 해주시고.”
이 남자 틀림없다. 밖에서는 호구소리 듣고 살 만만한 인물이다. 무슨 생각을 하려는지 다 티가 나잖아. 김영희씨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화의 마무리를 지었다. 대충 고개를 까닥하고 인사를 건넨 남자는 터덜터덜 101동을 향해 멀어져갔다.
물론 지금 아파트가 위치도 좋고 평수도 아담하니 사람들이 많이 탐 낼 매물이긴 했다. 무슨 이유에서든 막혀있다가 갑자기 받기 시작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몰리겠지. 그런데 부동산거래가 그리 빠르게 이루어지던가. 들어오기 전에 그녀는 분명 주차장 통합을 이뤄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런 일이야말로, 다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귀찮아서 아무도 나서서 해결하지 않던 일 아닌가.
곧 사람들에게 칭찬과 더불어 선망의 시선을 받을 생각에 김영희씨는 기분 좋게 분리수거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에는 콧노래가 발맞춰 걷고 있었다. 아파트 한 구석에서는 분리수거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에게는 무가치한 소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