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9화

아파트

by 봄단풍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참 많다. 요즘 차를 한 대만 끄는 집이 어디있냐고? 한 대도 없는 사람 여 있수다. 그 힘든 준상이 형도 출퇴근 때문에 중고차 한 대를 겨우 한 대 몰고, 결혼 준비중인 두성이 형도 겨우 한 대 마련할 정도인데.


사실 그 아줌마가 건의한 동별 주차장 통합은 분명 별 일 아니긴 했다. 사실 주차장에 몇 번 가보지도 않아서 동과 동 사이에 구분선이 그려져 있는 것도 몰랐다. 기왕이면 남는 공간 모두가 편하게 쓸 수 있으면 좋지. 어차피 101동에는 차를 가지고 다닐만한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는 거다. 겉으로는 반가워요, 하면서 주차장 얘기나 한다든지, ‘어차피 빈 자리 쓰는 건데’ 라며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나눠쓰는 걸 합리화 한다든지. 사람 곧 많이 들어온다는 데도 무시하고 그냥 서명이나 빨리 해달라고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차 한 대 끄는 집이 어쩌고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펑퍼짐한 실내용 원피스에 앞치마를 그대로 두르고 슬리퍼 바람으로 나와서 사람 좋은 미소와 웃음소리로 포장을 해도, 말투에 성격이 그대로 녹아나오는 사람이었다. 부디 내 얼굴에 거부감까지는 드러나지 않았기를.

손에 묻은 음식물쓰레기 국물을 털며 걷다보니, 입구 근처에서 서성대는 예은이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데려왔는지 손에는 몸 줄을 멘 갈색 푸들 한 마리가 안겨있었다. 분명 산책을 데리러 나왔다가 저렇게 모시고 있는 거겠지. 흘러나오는 웃음을 애써 밀어넣으며 나는 누나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산책중인가봐요.”

“응! 우리 달이랑.”


누나는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푸들을 억지로 내게 돌리며 대답했다. 멍한 눈빛의 달이는 나를 흘끔 보고는 다시 별 일 없다는 듯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달이가 귀여운지 누나는 한 번 픽 웃고 말았다.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이제 어르신이라고 놀리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갈색 솜뭉텅이 같은 그 녀석을 만져볼까, 하다가 물릴까봐 차마 갓 버린 쓰레기 냄새가 나는 손을 내밀지 못했다. 내가 겁이 많은 게 아니다. 딱 한 번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달이와의 첫 만남을 통해 그의 성량을 확인한 이후로 약간의 경외를 표하는 것 뿐이다. 그 작은 몸에서 어찌나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오던지. 그렇게 사나운 녀석이, 예은누나 품에서는 새벽잠 놓친 아기처럼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예은누나의 다독임은 사람한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구나. 그러자 갑자기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누나, 혹시 주리랑 친해?”

“음……. 꽤?”


잠시 달이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누나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관심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얼마 전에 만났었거든.”


나는 예은누나에게 교회에서 진로 이야기를 나눈 것, 전단지를 돌리다가 길에서 만난 것, 그리고 은행에서 만난 것 까지 얘기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예은누나라면 뭐든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만, 은행에서 주리가 서울에서 살기 힘들다고 했던 것과 그 외의 가정사는 얘기하지 않았다.


“어머, 잘 되는 거 아냐?”

“에이 장난하지 말고. 걔 인기 많다며.”


예은누나는 그 말에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달이를 쓰다듬으며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누나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걔도 참 괜찮지.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

“응. 장학금도 여러번 탔었어. 그리고 되게 착한 애야.”


누나의 가녀린 팔 위에 엎드려서 쓰다듬을 즐기던 달이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영락없는 갓난아기를 닮은 그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누나의 대답은 너무나 막연했다. 누나한테는 모두가 다 착하고 예의바르잖아.


“성격은 어때?”

“착해. 되게 착해.”


누나는 여전히 달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듯한 그 대답은 나로서는 영 불만족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누나가 원래 그렇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 안하려고 하는 대신 내 이야기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성심성의껏 들어주며, 다른 이에게 함부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누나와 친해지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럴 때는……. 좀 답답하다.


“누나가 볼 때는 어떤데?”

“애가 참 괜찮지, 착하고. 나랑도 같이 몇 번 놀러가고 그랬었는데…….”


오, 드디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려는 건가. 누나는 주리와 함께 놀러갔던 그 때를 떠올리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 착하더라 애가.”

“아이 참, 진짜.”


결국 참다못해 짜증이 흘러나왔다. 지금 착하다만 도대체 몇 번째 이야기하는 거야. 반면 누나는 누나대로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봤다.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왜? 너도 만나봤다며. 주리가 어떤지는 네가 직접 판단해야지. 나한테 할 때랑 너랑 만날 때랑 같은 애인지 어떻게 아니?”


맞는 말이다.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누나도 이럴 때는 참 꽉 막힌 것 같다. 두성이형이랑 같이 다녀서 그런 걸까. 누나의 이런 점 덕에 나도 내 얘기는 편하게 하고 힘도 얻고 위로도 받지만, 그렇긴 하지만…….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던 예은누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왜, 너는 어땠는데.”

“아니 나는…….”


난 그렇게 누나에게 차분히 이야기를 전했다. 참 예쁘긴 한 것 같다. 무슨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자꾸 마주치니까 생각이 나더라. 근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로에 대한 고민도 있어 보이고, 무엇보다 지난 번에 은행에 왔을 때 서울 살기 힘들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라……. 결국 나는 주리가 나에게 털어놓았던 어려움들까지 누나에게 그대로 이야기하게 됐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누나는 계속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끄덕, 혹은 그래, 하는 짧은 추임새를 넣으면서.


“그랬구나. 너한테 그런 힘든 얘기도 했나보네.”

“자세히는 얘기 안하더라.”


예은누나는 기특하다는 듯 이쪽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달이에게 그랬듯이 내 뒤통수를 한 번 쓰다듬을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누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천천히 대답했다.


“차차 마음을 열겠지. 그 애 얘기 잘 들어줘.”

“왜? 힘든 일이 많았어?”

“뭐……. 내키면 걔가 얘기 하겠지만. 그 애랑 대화를 제대로 해본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 없어.”


문득 교회에서 났던 여러 소문들이 떠올랐다. 생긴대로 논다더라, 까다롭더라, 남자 시선을 즐긴다더라. 여자인 친구가 몇 없는 거 보면 각이 나오지 않냐, 등등. 하기사 그런 얘기들을 당사자와 직접 대화를 통해 얻어냈을리는 없겠지. 그만큼 주리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던 걸까? 예쁜만큼 적도 많겠지만 친구도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녁에는 아직 날씨가 쌀쌀했다. 몸에 담요를 두르고도 벌벌 떠는 예은이 누나를 위해 다시 아파트 입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어느새 발길이 다시 쓰레기 분리수거장으로 왔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아직도 주민들이 오락가락하는 그 곳에서 자꾸만 누군가 버럭하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건 확실하게 느껴졌다.


누나의 느린 보폭에 맞춰 걷다보니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생겼다. 자세히 보니, 분리수거 하청업체 직원들 간의 싸움인 듯 했다. 짙은 남색 작업복을 입으신 아저씨 서너 분이 할아버지로 보이는 직원 한 분에게 손가락질과 더불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뭐야, 아파트 사람들끼리 싸우는 게 아니구나.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나와 상관없는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현명한 거다. 예은누나는 관심이 생긴 듯 흘끗 고개를 돌렸지만, 걸음을 멈출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여전히 잠들어있는 달이를 쓰다듬으며 계속 발을 움직였다.


“아무튼, 다른 사람 말은 신경쓰지 말고. 주리랑 얘기를 하면서 네가 천천히 알아가 봐. 진짜 착하고 괜찮은 친구야.”


예은누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달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어쩌면 내가 주리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자꾸만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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