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20화

아파트

by 봄단풍

아파트에서의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워낙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도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긴 했지만, 그 때는 하루하루 꾸역꾸역 넘어가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달력 앞에 선풍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날짜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잠을 자고 출근하고. 변하지 않는 생활의 사이클에 아파트 식구들과의 야식이 때때로 추가됐을 뿐이었지만 하루를 대하는 내 태도가 달라졌다.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먼저 준상이형의 인터폰을 두드린다. 답이없다면 호준이, 대호, 혹은 유화나 예은이 누나에게. 순서는 거꾸로 갈 때도 있었다. 기분에 따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대호나 호준이네 집에 슬리퍼를 끌고 들어가 맥주를 한 잔했고, 예은누나와 달이와 간단히 산책을 할 때도 있었고, 혹은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해외 축구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별 일 없이도 하루하루가 기대됐다. 오늘 저녁에는 퇴근하면 누구랑 놀까, 뭘 해볼까. 호준이와 엊그제 함께 했던 게임을 같이 연습하러 가볼까, 준상이형하고 뒹굴거리며 술이나 한 잔 할까. 아니면 쌓인 것도 많으니, 대호랑 함께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힘든지 욕이나 실컷 해볼까!


“그 분이 너한테 관심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날, 주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호준이는 그렇게 말했다. 어느새 호준이와 친해진 준상이 형은 든 게 많아 무거운 머리를 호준이의 허벅지에 내려놓은 채 누워서 멍하니 듣고 있었다. 누웠음에도 볼록 튀어나온 배는 들어갈 줄을 몰랐다. 그건 일종의 의사표현이었다. 이제 먹기도 지쳤으니 얘기나 하자.


“에이 무슨 관심이야 그게.”

“맞다니까? 아니면 왜 굳이 너네 지점까지 찾아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흘려듣고 싶었지만, 우리 셋 중에 연애를 하는 건 호준이가 유일했다. 그 말인즉슨 이 분야에서 가장 공신력이 있는 전문가라는 뜻이었기에, 또 그 내용이 내가 몹시 솔깃한 내용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됐다.


“봐봐, 말을 누가 먼저 걸었어?”

“주리지.”

“연락은 누가 먼저 했어?”

“연락은 안했는데.”

“너네 지점에 누가 갔어?”

“주리가 왔지.”

“그렇지?”


그것 보라는 듯, 호준이는 눈을 크게 떠보이며 맥주를 들이켰다. 뭐가,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거야? 준상이형을 만나다보니 점점 술이 늘어가서 그런지 호준이의 발언은 점점 신빙성을 잃어가는 듯 했다. 근데 또 모르지.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는 또 다른 것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야, 번호 몰라? 연락은 왜 안해?”

“번호 몰라.”


그러자 호준이는 더 흥분한 듯 했다.


“야, 번호 없는데도 그렇게 자주 마주치는 건 우연이 아니라니까? 걔가 각을 잰 거야.”


정말 그런가. 듣다보니 그럴 듯하기도 한데. 준상이형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지만, 누워서 허공에 트림을 할 뿐 별다른 답은 없었다.


“다음에 그럼 번호부터 물어봐.”

“너무 작업거는 것 같잖아.”

“야, 그냥 아는 사이인데 아직 번호를 모르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주리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예은누나의 지인이다보니 어쩌다 만나서 인사를 했고, 종종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만나면 인사를 하는 정도였지. 그러다가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얼마 전 주리가 진로에 관해 상담을 요청해왔을 때였다. 따지고 보면 호준이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게 오히려 진상을 간파한 것인지도 몰랐다!


“일단 너는 이 분이 좋은 거야?”


가만히 누워있던 준상이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트림대신 말이 나온 것은 오랜만이다. 마침 제 3자의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했던 나는 준상이형의 참여에 감사했으나, 정작 그가 던진 질문은 답하기 더 어려운 것이었다.


“아니 뭐……. 좋다는 게 아니라. 요즘 자주 보니까 친해지면 좋을 것 같다는 거지.”

“그럼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연락하고 싶으면 번호를 물어보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자고 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달라고 하고. 괜히 남 얘기 들어보고 재지 말고.”


호준이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의 끄덕임은 그래, 남 얘기는 듣지 말되 내 말은 맞으니까 들어라, 라는 것으로 보여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 하긴 손해볼 건 없으니까. 만나면 한 번 말은 꺼내봐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일요일이 다가왔다. 매주 휴일마다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가는 일은 그동안 참 힘들었지만, 예은누나 부부와 함께 차를 타고 가게 된 이후로는 굉장히 수월해졌다. 물론 정작 교회에서 주리를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가 운 좋게 마주치는 날이 있긴 했지만 그 전처럼 인사를 하고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주리를 만나게 됐다! 예배가 끝난 후 몰려나가는 인파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을 때, 나는 얼른 쫓아가 뒤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오빠!”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로, 놀라움 가득한 표정의 주리가 인사했다. 인사인지 비명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사 후에 대화를 이어가는 걸 보면 반갑긴 했던 모양이다.


“요즘 교회에서 보기 힘드네.”


기타치고 찬양하는, 흔한 교회오빠스러운 여유로움으로 인사를 건넸다. 보통 교회에서 아이들이 잘 따르는 교회 남자들은 이렇게 느끼하게 이야기 하던데. 정말 그게 통한 것인지, 아니면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반가워서인건지 주리는 그 밝은 눈웃음과 함께 대답해줬다.


“그러게요. 요즘 바빠서…….”


그랬구나. 서로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대답을 대신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대화가 한 번 오고가자마자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다가왔다. 얼마 남지않은 휴일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교회를 빠져나가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하는데.


“아, 너 번호 좀 가르쳐줄래?”


무슨 말을 해야할까,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렇게 믿을 수 없다던 호준이의 말을 나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 새겨놓은 모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언을 해준 게 호준이 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 그래도 연애 유경험자인데 틀린 걸 가르쳐주진 않겠지.


“왜요?”


그 하얀 얼굴에, 그 밝았던 미소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찬바람이 자리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조차 가시가 돋친 듯. 벌어진 입 사이로 조금 보이는 혀가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졌고, 똑같이 동그랗게 뜬 눈인데 큰 눈에는 경계와 의심이 가득 들어있었다. 오똑한 콧날, 하얀 피부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정호준 이 나쁜 새끼.


어……. 막상 이유를 대려니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차장님의 갑작스런 회식 요구에는 일 초에도 세 개 이상의 핑계를 생각해내곤 했던 내 머리가 이번만큼은 급속 냉각이라도 된 것처럼 도저히 돌아가질 않았다. 뭐, 뭐라고 해야 해? 그냥 연락처가 없어서? 아니면 솔직하게 얘기를 해버릴까, 너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싶다고?


얼음장같던 분위기를 깬 건 뜻밖의 웃음소리였다. 몰래카메라가 의심될 정도로 갑자기 터진 웃음을 뱉은 건 다름아닌 주리였다. 풋, 하고 입 한구석에서 바람빠지듯 웃음을 뱉은 그녀는 이내 푸하하,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장난이에요, 오빠. 우리 생각해보니까 서로 번호도 몰랐구나!”


주리는 자연스럽게 내 손에서 전화기를 가져가 자신의 번호를 눌렀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은 내가 뭔가 더 말하기 전에, 주리는 내 입을 막듯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따가 연락주세요. 저도 저장할게요.”


그렇게 멍해진 나를 인파 속에 두고, 주리는 떠나갔다. 헷갈렸다. 잘한 건지 못한 건지, 호준이의 조언은 맞았던 것인지 틀렸던 것인지. 결과론적으로 보면 번호를 받아냈으니 실패한 것은 아닌데. 주리가 장난을 쳤으니 괜찮은 건가? 아니 그게 정말 장난이었을까 무심코 새어나온 진심이었을까? 주리는 내가 멍한 걸 보고 재밌어서 웃은 걸까, 아니면 무심코 새어나온 진심을 감추기 위해 크게 웃어버린 걸까……. 세상에, 왜요? 라는 한 마디가 마음 한 가운데에 이렇게나 큰 파문을 일으킬 줄이야.


그 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마침 아파트로 들어가는 주현이와 성훈이, 그리고 몇 명의 후배들을 만난 나는 얼른 그들을 붙들었다. 어쩌면 나이는 어리더라도 학교에서 잘 노는 아이들이 여기에 대한 좋은 해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또 이 후배들은 어차피 주리를 만날 일이 없으니 털어놔도 괜찮을 거다. 물론 성훈이보다는 주현이가 이런 일에는 좀 더 믿음직스러웠다. 아니, 전반적으로 보다 믿음직스러웠다.


한참동안 내 이야기를 듣던 주현이는 뭐가 그리도 웃긴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오빠 정말 순수하신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전화를 할까 문자를 할까 톡을 할까, 그것만 알려줘봐.”


난데없는 칭찬인지, 놀림인지, 격려인지 알 수 없는 평가에 나는 정확하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배운 건 이거 하나다.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제시하라는 것.


“저는 톡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그냥 대화를 이어나가기에 덜 부담스럽고 편하지 않을까요?”


잠시 고개를 끄덕거린 후,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연락처에 진주리라고 저장된 번호를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메신저에 들어가 그 이름을 찾았다. 프로필 사진에 익숙한 뒷모습이 올려진 진주리씨의 메신저가 맨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1:1채팅이라는 버튼이 이렇게도 컸었나. 해당 버튼을 누르고 입장한 대화방에서, 나는 인사를 건네려다가 정작 뭐라고 대화를 시작할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다.


『주리야, 나 승민이야. 바쁘겠지만 힘내고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


첫 마디를 쓰게 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그냥 안녕, 뭐하니, 라고 보내기에는 처음 연락을 할 때의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대화가 이어질 여지를 남기자니 너무 속보일 것 같아서 마무리 인사와 함께……. 아, 사실 수없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보니 저런 문장이 만들어 진 것 뿐이었다.


답장은 늦을 거라 생각하고 편히 핸드폰을 침대 위 아무데나 던져놓았다. 원래 그런거라고 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소중하고 기다리게 되는 편지는 늦게 도착하는 법이라고. 그리고 설령 답장이 바로 온다 하더라도, 그 답장에 바로 답장하는 것만큼 없어보이는 건 없다고. 그리고 나는 메시지 알림이 떠도 오분 후에, 혹은 오분을 기다리다가 잠깐 졸고 일어나서 확인할 것이다. 보내려면 또 몇 분을 고민하고 보내겠지.


띠링.

『네 오빠 감사해요!』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이 날아온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숫자 1이 사라진 건 바로 그 다음 다음 순간. 평소에는 쓸모도 없던 반사신경이 이럴 때는 참 좋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하찮은 몸뚱아리 같으니.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답장이라도 심사숙고해서 보내리라! 아, 대화가 마무리가 됐으니 굳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될까?


『근데 오빠 번호는요?』


아 맞다.

어느새 나는 늦은 답장의 미학, 혹은 기다림의 미학 따위는 잊어버린 채 내 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있었다. 그런 것보다는 행여 주리가 내 답을 기다리다가 기분이 상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더 크게 작용했다. 한 번 더, 이번에는 메시지 없이 커다란 곰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이모티콘으로 답장이 왔다. 그리고 그렇게 주리와 나의 첫 온라인 대화는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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