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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 입사한 후 재미있는 건 노조가 있다는 것이다. 본래 노조가 있다는 것은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함이기 때문인데, 사실 노조로 인해 보다 든든하다거나 안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회사에서 오래 일한 차장님, 혹은 부장님들도 노조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기 일쑤였기 때문에, 매일 아침 단체 메일로 날아오는 노조의 활약상을 읽어보는 것도 사실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나니, 의미가 없는 건 동일할진대 도대체 이들이 뭣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메일을 보낼까 궁금하긴 했다. 읽어보면 상당히 한 일이 많긴 한데, 실제로 우리가 체감하는 변화는 없다고 해야할까.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전임 대통령들이 세운 업적을 읽는 느낌이었다. 이런 것도 했었어?
그 날도 평소처럼 노조에서 메일이 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연재중인 웹툰의 다음 화를 열어보는 기분으로 클릭해봤는데 이번에는 내용이 많지 않았다. 대신, 설문조사를 필요로 한다며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링크가 올라와 있었다. ‘친애하는’으로 시작하는 메일은 아래와 같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하반기를 맞이하여 다시 한 번 행원 여러분의 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그간 사측의 무리한 영업과 실적압박, 야근 강요 등 근로기준법을 무시하는 행위에 지치셨을 여러분을 위해, 본 노조는 아래의 설문조사를 토대로 사측에 무리한 영업 중단, 실적에 의한 인사이동 금지 등을 요구하려 합니다. 철저히 익명이 보장되오니, 부디 행원 여러분께서는 설문을 ○월●일까지 제출해주시고, 궁금하신 사항이나 불편했던 점, 혹은 불합리한 요구를 당하셨거나 부당한 처우를 받은 경험이 있으시다면 필히 기재하여 송부해주시기 바랍니다.』
평소와는 다른, 다소 부드러운 문체에 웃음이 났다. 늘 사측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겠습니다, 사측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갈 것입니다! 등 강경한 어조로 의지를 천명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마치 군대에서 ‘자, 별 일 없을테니 한 번 편하게 얘기해봐’ 하며 소원수리함을 작성하도록 할 때의 기분이었다. 과연 몇 명이나 솔직하게 쓸까? 누가 그렇게 용감할 것인가?
회사라는 게 그런 거다. 군대와 비슷하다. 쓴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고, 익명이라지만 누군지 다 알게되는 거다. 나는 다른 사람이 들을세라 작게 혀를 끌끌 차며 설문지를 닫았다. 어차피 설문지 제출 마감 날짜는 좀 남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쓰는 걸 슥 보고 천천히 작성할 요량이었다.
“우 계장, 이따 끝나고 뭐, 약속있나?”
언제 나왔는지, 차장님 자리에 서 있던 지점장님이 불쑥 말을 꺼냈다. 어쩐지 다들 들으라는 듯 크게 낸 소리에 지점에서 일하던 모두가 돌아봤다. 보통 시킬 일이 있어도 혼자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 하시던 지점장님이 무슨 일일까 싶었다. 가족과의 외식? 친구와 약속? 순식간에 몇 개의 변명들이 스쳐지나갔지만 입은 어느새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아무 약속 없습니다.”
최대한 쾌활하게. 예전 같으면 이런 말을 할 때 웃음을 띄울 여유가 없었겠지만, 요즘은 달랐다. 어차피 늦게 퇴근해도 여기에 대해 한탄할 사람이 많으니. 오늘이 넘어가기 전에만 끝난다면 무슨 상관이랴.
“그럼 이따가 시간 좀 내. 축하파티 해야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역시나 바로 대답이 나왔다. 근데 무슨 축하파티?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지점장님을 바라봤지만 어느새 그는 몸을 돌려 지점장실로 가고 있었다. 여쭤볼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애매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다시 컴퓨터를 바라봤다. 설마 자기 결혼기념일이라든지, 가족 행사라든지 아무튼 나랑 상관없는 일에 부른 건 아니겠지.
“우 계장. 무슨 축하파티인지는 알고 알겠습니다, 한 거야?”
들어가는 줄 알았던 지점장님은 다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보기 힘든 익살스런 미소를 띄우고서.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어쩐지 나 빼고는 다 아는 눈치였다. 차장님들도, 과장님도, 그리고 바로 옆에 앉은 대리님조차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 우대리?”
아. 그제서야 나도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정말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온 거다.
“진급 축하해 우대리.”
조용하게 다가온 지점장님은 어느새 손에 작은 봉투와 무엇인지 모를 종이백을 쥐어주셨다. 별 건 아니고, 아까 오대리 시켜서 사온 선물이야. 집가서 뜯어봐, 라는 쿨한 멘트를 남기며. 차장님들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도 자리에서 박수를 쳐주셨고, 어느새 오대리님은 나에게 선물을 쥐어주는 지점장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있었다. 그래,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내가 저 사진을 행내 게시판에 게시를 해야한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대리라니.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던 진급이 바로 오늘이라니!
“원래 대리 진급하면 진급 턱 내는 거야. 어?”
“내일 아침에 커피 부탁할게.”
“커피 가지고 돼요? 저는 저녁 쐈는데. 고기였는데, 고기!”
차장님의 일갈이 떨어진다. 물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처음 지점에 올 때는 신입이 온다며 그렇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분인데. 또 일을 배우면서 가장 많이 화를 내셨던 분인데, 지금은 웃고 계셨다. 기분이 묘했다. 평소 준상이형과 호준이에게 그렇게 욕을 하던 분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그 사람의 미소가 참 기분 좋게 다가왔다.
진급 덕분인지 퇴근은 생각보다 빨랐다. 회식자리로 바로 이어졌을 뿐이다. 평소에 술을 잘 안하신다는 지점장님도 기회다 싶었는지 열심히 술을 돌렸고, 나 또한 받은만큼 열심히 다른 차장님과 과장님, 또 대리님들께 돌려드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회식 장소인 고깃집으로 이동하기 전에 오대리님과 몰래 편의점에 들러 숙취해소 음료를 마셔둔 덕이었다.
“우대리, 요즘 아주 달라진 거 알아? 자기가 느껴?”
얼굴이 빨갛게 올라온 지점장님이 불쑥 말을 꺼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나쁜 얘기는 아닌 듯 한데, 괜히 불안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어, 이것도 모르겠다, 저것도 모르겠다, 하다가 곽차장한테 혼나가지고. 금고에서 질질 짜고 그러더니. 지금은 아주 밝아. 일도 안 밀리게 바로바로 처리해놓고.”
“맞습니다. 그 때 기억하죠.”
곽차장님은 지점장님 바로 옆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아, 평소에 일 할 때도 이렇게 웃고들 계시면 얼마나 좋아. 평소에 말이 없던 과장님도, 이번만큼은 갑자기 끼어들어 지점장님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요즘 진짜 좀 밝아졌어.”
“감사합니다.”
“아니, 임마. 감사한 게 아니라, 잘하고 있다고. 잘하고 있어.”
어느새 입이 거칠어진 지점장님은, 칭찬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에 다른 손님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저, 다들. 노조에서 메일 온 거 받으셨죠? 설문조사 하는거.”
네에. 다들 유치원생이 선생님 말씀에 반응하듯 명랑하게 대답했다. 어느새 다들 술이 좀 들어간 모양이었다. 지점장님은 그게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곽차장님이 새로 만든 소맥 한 잔을 다시 원샷하며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잘 써야 해요. 뭐 분기마다 써온 거니까 알아서 잘들 하시겠지만.”
이윽고 지점장님은 천천히 눈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반쯤 풀린 그 눈에는 아직도 즐거움이 가득했지만, 눈꺼풀에 반쯤 가린 눈동자만큼은 내 속을 뚫어보는 날카롭게 느껴졌다.
“특히 우 대리. 잘 써야해. 내가 볼 때 우대리는, 요즘 하는 것처럼만 하면 임원까지도 갈 수 있을거야.”
그 말을 뱉은 지점장님은 이내 거나하게 트림을 내뱉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고, 바로 옆에서 아양을 떨던 곽차장님 역시 이건 너무한 것 아니며 공개적인 비난을 하고 나섰다. 결국 지점장님의 공식 사과를 받아낸 임직원은 천천히 그 날의 회식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숙취에도 불구하고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했다. 노조에서 온 메일을 대충 넘기고 설문조사 링크를 클릭한 나는, 해당없음에 전부 체크하고 바로 답장을 눌러버렸다. 홀가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