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위하여!”
짧은 건배사 이후에 술잔들이 요동치고,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지만 늘 개강파티보다는 종강파티가 뜨거운 법이다. 한 쪽은 다가오는 고통을 잊어보자는 취지지만, 다른 한 쪽은 고통의 끝에서 쾌락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니 어느쪽이 뜨거운지는 굳이 정량적 비교를 하지 않아도 되겠지.
전역 후 첫 학기를 성공적으로 보낸 스물 세 살의 박성훈씨는 그동안 참아왔던 욕구를 푸는 중이었다. 일학년을 마치자마자 부모님의 강제로 군입대를 했고, 그 덕에 후배를 이년 만에 처음 보게 된 것이었다. 동생들에게 인사를 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한 학기가 걸렸지만, 익숙해졌으니 지금부터는 원없이 즐길 수 있을 터였다.
이번 학기가 성공적인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동기 및 후배들과 엠티를 추진했고, 아는 선배의 도움으로 굉장히 좋은 곳에서 값싸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능력자로 인정을 받을만한 일인데, 두 번이나 이런 일을 해냈음은 물론 그 숙소를 반 고정적인 아지트로 만들어냈다! 물품을 놓기도, 사람이 들어가 자리를 잡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았던 반방을 효과적으로 확장한 셈이었다. 물론 공은 그 아는 선배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으나, 재학생들이 졸업생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
성훈이 확장한 새로운 반방은 위성도시, 혹은 앞마당 멀티라고 불리며 이번 학기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다른 반, 학회, 혹은 동아리에 조금씩 소문이 퍼지면서 부러움의 시선을 받기도 했고, 그 덕분에 ‘경제●반 과대는 능력이 좋다더라’, ‘거기 과대가 완전 갑부라더라’ 등 기분 좋은 유언비어들을 성훈씨는 학기 내내 실컷 들을 수 있었다. 비록 학년이 오르며 처음으로 들었던 전공수업의 학점이 밑바닥을 치긴 했지만, 덕분에 얻은 위상과 평판에 대한 희생으로 치면 충분히 감내할만 했다. 성적은 재수강을 하면 되니까!
딱 하나, 성훈이 성적과 더불어 성취하지 못한 것이 딱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주현이었다. 입학 이후에 오매불망 연애를 기다리던 성훈이 주현이에게 한 눈에 반한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뽀얀 피부, 통통한 볼 살,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겁 없이 말을 걸어주는 호탕한 성격. 일처리는 얼마나 빠릿빠릿한지, 또 책임감은 얼마나 투철한지!
학기 내내 함께 과대표로 일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같이 일하다가 학교에서 밤을 샐 때도 많았고, 서로에 대한 얘기도 많이 했고. 반 행사를 준비하다가 시험기간에는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끼니때마다 밥도 같이 먹었고, 시간이 남으면 커피도 마셨고. 성훈은 분명이 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주현이는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과대표가 마무리되는 자리니만큼 중간에 나갈 수도 없을 것이고, 분위기 상 주현이도 술을 적당히 마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도직입적인 고백으로, 과대 출신의 CC가 탄생하는 모습을 모두에게 당당하게 공개하리라! 언젠가 인터넷에서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고백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고백이라는 걸 본 적이 있지만, 지금 자신이 한다면 분명 다른 결말이 나올 것이라 확신하는 성훈이었다.
“오빠,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결심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자신이 마신 술이 무엇인지, 어떤 잔으로 몇 잔이나 들이켰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때 쯤 성훈이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몇 명의 후배들에게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놀 때는 놀더라도, 리더의 임기가 끝나지 않은 이상 무게감있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오빠 옷에 술 흘리셨어요…….”
“어떡해, 너무 많이 드셨나보다.”
몇 명인지 모를 후배들이지만 그 중에 한 명이 자신의 옆에 앉았다는 걸 느낀 성훈은 애써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이 똑바로 앉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탁자에 두 팔을 올려 이마를 괸 자세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오빠는 그 집 어떻게 구하신 거에요?”
“맞아.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고개를 푹 숙이고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성훈의 눈은 옆자리에 앉은 후배를 훑었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긴 머리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머릿속에 꽉 차있던 주현이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아 뭐……. 별 거 아니야.”
머릿속에는 아파트를 어떻게 구했는지 경위를 다 설명하고 있는데 정작 입으로 새어나온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탁자위로 쓰러지려던 성훈을, 옆자리의 후배가 간신히 붙들었다. 양 어깨를 붙들은 손이 참 따뜻하다고, 성훈은 생각했다.
“그거 오빠가 집 산 거라는 소문도 있던데 진짜에요?”
“친척들이 여행가서 빈 집이라지 않았어?”
참 소문도 다양하게 난다. 옆 탁자에서 그 모습을 보던 주현이는 혀를 차며 눈 앞의 안주에 다시 젓가락을 가져갔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놀고 싶은 마음이 폭발한 것인지. 종강파티가 시작한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성훈은 술에 흥건히 적셔져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한 학기 내내 쫓아다니며 둘이서만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만들려던 그가 마지막으로 뭔가 시도를 해볼만한 건 오늘뿐이었으니.
걱정을 한 시름 덜었다고 생각한 주현은, 갑자기 귀에 들려오는 성훈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아파트가 통째로! 그 형거야.”
“우와, 한 집이 아니라 아파트가 전부?”
“어, 우리 이모가 그 아파트 사는데?”
“그게 누구에요? 우리 과 선배에요?”
아연해진 주현은 재빨리 성훈에게 달려갔다. 많이 취했네. 재빨리 성훈의 입을 막고 일으켜 세우려는 찰나, 옆자리에 앉은 후배 한 명이 그녀를 저지했다.
“언니, 괜찮아요. 오빠 많이 힘드니까 제가 부축할게요.”
그리고 바라보는 눈빛이 굉장히 차갑다. 어쩐지 심각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주현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후배는 눈을 거두고 어느새 소세지 한 조각을 성훈의 입에 억지로 넣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웨이브를 잔뜩 넣은 그 후배는 성훈이 안주를 삼키자마자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밖으로 나갔다.
그래, 입만 단속하면 되는 거니까.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한 주현은,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한 느낌을 애써 지우며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