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24화

아파트

by 봄단풍


떠나간 겨울에게 인사도 채 못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있었다. 가로수에는 어느새 푸른 잎이 무성했고, 도시에는 차 소리 대신 매미소리가 그득했다. 짧아진 사람들의 옷은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붙잡고자하는 결연한 의지. 겨울만큼이나 꽁꽁 닫힌 건물의 창문들은, 애써 감춰둔 찬 바람을 붙잡으려는 절실한 마음.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경이롭지만, 늘 환영받지는 못한다. 얇아지는 옷, 자꾸 흐르는 땀과 여기저기 더 많이 보이는 벌레들, 짧아진 세탁 주기, 뜸해진 바람. 겨울에는 항상 출근할 때 해를 볼 수 있길 기도했지만, 정작 출근길에 마주친 햇빛은 그리 따스하지 않았다. 바늘로 콕콕 찌르듯 눈과 몸을 파고드는 햇빛은 땀을 의미했고, 땀은 곧 빨랫감이 하나 추가됨을 의미했으니까. 혼자 사는 입장에서 세탁, 건조, 수납이라는 세 가지 과정을 내포한 빨래는 쉽게 넘기기 어려운 업무였다.


사람들을 더 많이 초대한 덕에 내 아파트에서의 삶은 더 바빠졌다. 아무나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많아졌고, 취미삼아 사둔 차나 커피를 직접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다. 스무 세대를 넘어가다보니 갑자기 약속을 잡아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고, 때로는 약속이 겹쳐서 한 쪽에 양해를 구해야 할 때도 있었다. 간혹 수도 점검이나 가스 점검등을 공지할 때에는 건물주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오피스텔 사장이 된 것 같기도 한 기분에 묘한 행복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반면 소중한 몇 명에게는 집중하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새로 전입 온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대호와의 만남을 몇 번 미뤘었는데,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마침내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고객의 요청에 의해, 당분간 사용이 정지 된 번호입니다. …….』


호준이의 말에 따르면 평일에는 다시 신림으로 가고, 주말마다 다시 아파트로 들어오는 것 같다고 했다. 종종 마주쳤지만 되도록 사람들과 만남을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아무래도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준비하기 위함인 듯 했다. 그래도 그렇지, 몇 번 못 만났다고 인사도 없이 잠수를 타는 게 어디있어. 마음이 상했지만 대호가 앞둔 시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더 이상 별다른 연락은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이 늘어나자 예상치 못했던 일도 생겼다. 아파트 운영에 적극적으로 호불호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이 나타난 거다.


『요즘 아파트가 너무 소란스러워진 것 같지 않아?』

『우리 윗 집 또 야밤에 피아노 친다.』

『승민아, 네 후배들 자꾸 새벽에 와서 술마시지 말라고 해. 했었으면 한 번 더 분명하게 얘기 해.』


두성이형은 하루에 하나씩은 꼭 메신저를 보내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의 개인적인 메신저가 아니라, 처음 반상회를 가졌던 사람들의 단체 톡방에서였다. 글쎄,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민원을 올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의도에서든 나를 위한 것은 아님이 분명해보였다. 민원은 이렇듯 개인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2차로 들어 온 사람들한테는 다시 한 번 전체 공지를 해야 할 것 같다.』


두성이형이 제시하는 민원 중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처음 전입한 사람들을 1차, 승찬이 형을 비롯해 나중에 전입한 사람을 2차라고 자기 멋대로 나눠서 부르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구분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왜 굳이 한 아파트에 살면서 구분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예은누나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예은누나는, 자기도 매일 달래고 있음에도 소용이 없다며 답답해했다. 아마 결혼식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서 초조해서 그런 것 같다며. 누나는 나에게 이해를 바랐지만 이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 너도 힘들다는 건 알겠다. 근데 아파트를 관리하기로 한 이상, 네게도 책임이 따르는 법이야. 여럿이 모여서 산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


결국 두성이형과 단 둘이 만나게 됐다. 직접 만난 두성이형이 내 이야기를 한참 듣고 한 말은 이랬다.


“일단 미안하고. 대신 너도 하나만 약속하자. 앞으로는 세입자를 좀 더 신중히 받자고. 우리하고도 얘기를 하고.”


여기는 제 아파트에요, 라는 답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힘겹게 참아냈다. 내 아파트고, 내가 신중히 가려서 지금까지 잘 받아왔는데, 뭘 어떻게 더 신중하게 받으라고? 그리고 첫 반상회에서 내가 알아서 하기로 정했었는데, 이제와서 왜 자신이 전입 과정에 참여하려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눈 앞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나는 최대한 공손히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스무 세대가 넘는다. 새로 누구를 받는다 한들 마주치기도 힘들고, 마주쳐도 기억을 못할테니까. 그 약속 이후 두성이형의 민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1차와 2차를 구분지으려는 것은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파트 밖의 삶은 변화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대리 진급 이후 나는 더 고단해졌다. 물론 업무량도 분명 많아졌지만 나를 더 힘들게 만든 건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에는 내게 하지 않던 말들이 한 두 단어씩 추가가 되곤 했던 것이다.


“대리가 자꾸 이런 실수해서 되겠어?”

“대리 달고 그만 둘 거야? 장가 안 갈 거야?”

“알아서 하세요. 이제 대리잖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 오대리님이 회사의 미운오리새끼였다면, 이제 내가 그 자리를 물려받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일을 잘해서, 나는 처세를 잘 해서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누구라도 겪을 일이었고,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라고. 오기가 생겼다. 얼마든지 해봐라. 멋지게 버텨주겠어. 내게는 함께 사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띠링.

『오빠, 오늘은 퇴근 언제 하세요?』


그리고 아파트 밖에서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있다고 하면, 그건 바로 주리였다. 첫 메신저 대화 이후로 멈출 것 같던 대화가, 오히려 주리의 연락으로 재개된 것이다. 이번 주에는 몇 부 예배를 드릴 거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주말마다 함께 예배를 드리자는 소소한 약속으로 변해있었다. 덕분에, 예은누나 부부의 차를 더 이상 얻어 타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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